엊그제 사도 토마스 축일이었다. 복음에서 예수님의 부활하신 모습을 보지 못한 사도 토마스는 예수님 손에 있는 못자국과 옆구리에 난 상처에 손을 넣어보고야 믿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믿음(신앙)의 대상은 "모르는 어떤 것"이다. 바로 우리가 신비하다고 표현할 때 그 신비한 존재는 인간의 지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어떤 대상인 것이다.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믿음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신 것은 신앙에 관하여 지극히 마땅하고 옳은 말씀이다. 사도 토마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느끼면서 그때서야 예수님께서 실제로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고 "주님, 나의 주님"이라 고백한다. 어쩌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그렇게 사도 토마스처럼 무언가 믿음의 근거가 입증이 되고 그것을 알고 나서야 믿는 태도를 보인다. 이런 모습은 불완전 인간존재이기에 어느 정도는 이해할 만하다. 그런데 인간존재로서 더욱 부족한 모습은 사실을 보고 들어도 믿지 않는 모습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대화를 하거나 토론을 할 때 같은 말을 듣고도 서로 다르게 이해하고 다른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이는 실제로 똑같은 내용의 말을 듣고도 각자의 시각과 이해력의 차이에 기인할 것이다. 불완전한 인간존재로서 자연스런 모습일 수 있다.

그런데, 요즘 대한민국의 정부, 이명박 정부는 이런 인간존재의 불완전성 때문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국민의 소리, 국민의 아픔을 왜곡하며 자신들이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어리석은 행태를 보이고 있다. 왜? 이렇게 어리석은 모습의 이유는 뭘까?

바로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한 욕심 때문이리라. 강부자, 고소영만을 위한 이익 그것도 아주 천박한 물질적 이익에만 눈이 멀어 자신들이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어리석음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 욕심은 우리 사회의 각 분야마다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노동시장의 완화를 외치며 비정규직을 더욱 양산하여 서민들을 낭떨어지로 내밀고 있고 사교육 시장을 더욱 크게 하여 학부모들의 허리를 휘게 만든다.

또한 아픈 서민들의 최소한의 위안이 되는 국민의료보험 보다는 사적 의료보험을 장려하려든다. 심지어 도시개발이라는 명목 하에 여기 저기 삽질 경제를 조장하여, 마침내 용산에서 철거민들을 때려죽이고 불태워 죽였으면서도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은 없다. 또한 법치를 강조하면서도 검찰과 경찰, 국세청 등은 수시로 법을 임의대로 해석하며 국민을 탄압하는 도구로 쓰고 있다. 또한 생명을 경시하는 분위기에서 아기 낳기를 장려한다고 지자체마다 보조를 해준다고 떠든다. 그런데, 이렇게 생명을 우습게 보는 분위기에서 어느 여성이 어느 부부가 아기를 낳으려고 하겠는가? 그러니, 세계에서 자살율 1위, 출산율 꼴찌에서 두 번째 하는 나라가 된 것이다. 정말 가슴 아픈 일이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 단지 대통령 한 사람 잘 못 뽑은 죄밖에 없는 국민들에게 너무도 큰 아픔이다. 정말 통탄할 일이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자, 이제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첫째, 이 상황을 직시하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살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정확한 보도가 필요하다. 따라서 여러 정론지(인터넷 신문 포함)를 선택하여야 한다. 물론 거짓을 퍼뜨려 자신들의 사익을 도모하는 조.중.동. 쓰레기 종이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대항해야 한다.

둘째, 정확한 사실을 근거로 올바른 식별이 필요하다. 식별의 기준은 생명이고 공동체성이다.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사회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셋째, 올바른 식별에 근거하여 나아갈 방향을 정하고 구체적으로 행동한다. 이 행동은 우리 각자가 서있는 자리, 생활의 자리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을 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 이는 바로 "두려워 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무언가 두려워 한다면 아무리 좋은 생각과 식별이 있더라도 아무것도 실천할 수 없을 것이다. 무엇이 두려운가? 궁극적 두려움의 대상은 "죽음"이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저 두려워말라는 것이 아니라 두려워하지 않을 근거를 주신다. 그것은 바로 "부활사건"이다. 부활 한다는 데, 다시 살아 날 것이라는데 그 무엇이 두려울 것인가?

자, 이제 부활사건에 대한 신앙으로 아무런 두려움 없이 희망을 갖고 이 사회가 사람사는 세상이 되도록 투쟁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유가족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김민회 수사님과 최영님 신부님.

▲신부님들의 커리캐처를 그리고 있는 만화가.

▲엄마와 딸이 고구마와 상추를 들고 왔습니다.

▲분향소를 찾은 우비소년.

▲조현철 신부님과 서강대 학생들이 기도장을 찾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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