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티에레스 신부] 1월 6일(주님 공현 대축일) 마태 2,12

하나되는 다양한 인종들. (이미지 출처 = Pixabay)

공현이란 드러남을 의미한다. 어떤 의미에서 공현은 성탄을 우리끼리만 하는 기념제로 국한시키고 싶은 유혹을 벗어나게 해 주고 역사의 갈림길에 있도록 해 준다. 역사의 길들을 가는 남녀들에게 공현은 부르심이요, 도전이다. 공현은 장애물들을 무너뜨리고, 예수님이 모든 사람을 위해 왔다는 사실을 다시 밝혀 준다.

베들레헴, 도시들 중에 가장 작은 도시

마태오의 서술은 매우 다채롭다. 예수님이 태어난 뒤 현자들이 찾아왔다. 복음서는 현자들이 몇 명이었다고 밝히지 않으며, 왕들이나 다른 인종(색별)인가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이러한 정보의 부족은 그리스도교적 전통의 상상력에 의해 채워진다. 그래서 복음서는 더 다채롭다. 아마 그들은 현자들, 사제들, 아니면 점성가들이었는지 모른다. 그들은 아기를, “유다인들의 임금”(마태 2,2)을 찾고 있었다. 예기치 않은 방문객들의 도착은 권력가들을 불안하게 했다. 헤로데는 율법학자들을 모아 놓고 묻는다. 그들은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이라고 대답한다. 미카 예언서를 인용하면서 마태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모습은 작아도, 베들레헴은 결코 유대의 땅에서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라고 확신한다. 복음사가는 후에 “가장 보잘것없는”(25,40.45) 이 안에서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고 말한다. 베들레헴처럼, 처음에 보면 가난한 사람들, 잊혀진 사람들은 미천하지만, 그들을 통하여 주님이 우리에게 오시므로 결코 작은 사람들이 아니라, 위대한 사람들이다.

현자들은 아기를 만나 경배한다. 여기에서 복음서 구절은 아름답게 마무리를 한다. 헤로데의 계략을 알게 된 현자들은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2,12) 우리는 현자들이 예수님을 만나 삶이 변화됐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성서에서 길을 바꾼다는 것은 회심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회심은 주님을 만난 뒤에 나타나는 결과다.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또 다른 길을 선택하는 힘이 생기는 것이다.

신비의 계시

성경의 관점에서 볼 때, 신비는 수수께끼가 아니며, 어떤 풀 수 없는 문제도 아니다. 신비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어떤 실재이며, 따라서 우리의 온전한 이해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신비가 어떤 선택된 소수에게만 국한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져야 한다. 바오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방금 드러난 것에 대해 에페소인들에게 말한다: “다른 민족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한 몸의 지체가 되며 약속의 공동 수혜자가 된다”(에페 3,6)는 사실이다. 이것이 공현의 핵심이다. 동방의 현자들에게 계시된 것이 이방인들에게도 드러난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교의 전통은 다양한 국가들과 다양한 인종들의 대표들이 모일 때 제대로 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사야서의 구절은 공현 축일의 매우 기본적인 상징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주님의 영광이 네 위에 떠올랐다.”(이사 60,1) 주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가져오는 빛은 “온 땅에 덮여 있는 어둠”(60,2)을 벗겨 낸다. 모든 국가들이 이 빛으로 몰려들 것이며,(60,3)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라는 초대를 받고 있다.(마태 28,19) 그렇기 때문에 공현은 위대한 복음 선포의 축일이다.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이 모인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모순이다.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다. 신앙은 사적인 것이나, 내적 차원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신앙은 대화와 공동체 생활을 요구한다.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신부
1928년 페루 리마 출생. 의대를 졸업한 뒤에 사제로 살기로 결단했다. 사제가 된 뒤에는 리마 가톨릭대학에서 신학과 사회과학을 가르치면서 리마 빈민지역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목을 했다. 대표적인 해방신학자로 빈민의 관점에서 복음을 증거해 왔다. 주요 저술로는 "해방신학"(1971)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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