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여러 종교를 이렇게 보실꺼야 - 성서와 이웃종교 27]

최초의 금기 

창세기에 따르면, 하느님은 첫 사람 아담과 ‘여자’를 지으시고 이들이 사는 에덴동산에 보기 좋고 맛있는 온갖 과실나무들을 자라게 하셨다. 동산 한 복판에는 생명나무와 선악나무도 돋아나게 하셨다.(창세 2,9) 사람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영원히 살게 되고,(3,22) 선악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말 그대로 선과 악을 알게 해주는 그런 나무였다. 그 뒤 하느님은 아담에게 이렇게 명했다: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먹지 마라, 그것을 따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는다.”(2,17) 

‘여자’(하와라는 이름은 아직 없었다)는 이 가운데 선악나무에 관심이 많았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명령을 역으로 상상할 줄 아는 능력, 새로운 지혜를 추구하는 본성, 한 마디로 인류 지혜의 기원에 대한 신화적 설명이라고 할 수 있다. 생명나무가 가져다 줄 ‘끝없는 생명’(3,22)이라는 엄청난 개념도 그것을 인식하고 소화할 줄 아는 지혜에 근거해서만 상상되고 추구된다는 뜻도 들어 있다. 물론 이 이야기에는 타락의 기원이 여자에게 있음을 말하려는 의도도 담겨 있겠지만, 역설적이게도 근본적인 지혜에 대한 추구가 여자에게서 시작되고 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금기 너머에 대한 상상 

이 때 뱀 한 마리가 나타나 동산의 중앙에 있는 나무 열매를 먹으면(또는 먹어도) “절대로 죽지 않으리라”(3,4)며 여자를 유혹했다. 죽지 않을 뿐만 아니라 “눈이 밝아져서 하느님처럼 된다”는 것이었다. “죽지 않으리라”는 말로 시작한 것으로 봐서 아마도 영원히 살게 해주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먹으라는 유혹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당초 선악과에 관심 있던 여자는 생명나무가 아닌, 자기에게 새로운 지식을 주기에 충분해 보이는 나무, 즉 선악과를 따 먹고 말았다.(3,6) 그리고는 배필인 아담에게도 따주었고, 그도 받아먹었다. 그 나무는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도 좋을’ 뿐더러, 자기를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나무’였기 때문이다. 여자는 지식과 지혜를 얻고 싶어 했던 것이다. 

금기를 넘어 하느님을 향하여 

그러자 두 사람의 “눈이 밝아졌다.”(3,7) 선과 악을 구분할 줄 알게 된 것이다. 그러자 자기가 옷을 입지 않고 있다는 사실, 벗고 있다는 사실에 “두려워할 줄도 알게 되었다.”(3,10) 여자와 그 배필인 아담은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서로 벗고 있었으면서도 전혀 부끄러운 줄을 몰랐다.(2,25) 그러나 새로운 지혜를 얻고는 부끄러움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무화과 잎을 엮어 부끄러운 알몸을 가렸다. 이른바 최초로 옷을 해 입은 셈이니, 옷을 시작으로 하는 인류 문명의 씨앗이 피어나기 직전이었던 것이다.

선악을 분간하면서 부끄러움도 알게 되었다는 점에서, 단순하게 적용하자면, 부끄러워할 줄 아는 것이 ‘선’이고 모르는 것은 ‘악’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옷을 입어 부끄러움을 가린 행위는, 하느님의 명령을 거부하면서 얻어졌으되, '악' 보다는 '선'에 가까운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선악을 분간하는 지혜를 얻은 인간은 그만큼 하느님께 가까워졌다. 하느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제 이 사람이 우리들처럼 선악을 알게 되었다.”(3,22). 선과 악을 알게 됨으로써 인간은 신의 경지 비슷한 단계에 이른 것이다. 

에덴으로부터의 도약 

인간이 선악을 알게 된 것은 기왕지사라 치고, 하느님은 인간이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것을 염려했다. 다음 단계란 인간이 생명나무의 열매마저 먹어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그것이 염려되어 하느님은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내쫒게 된다: “야훼 하느님께서는 ‘이제 사람이 우리들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되었으니, 손을 내밀어 생명나무 열매까지 따먹고 끝없이 살게 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시고 에덴동산에서 내쫒으셨다.”(3,22-23a)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지혜의 결과이되, 역설적이게도 하느님의 명령을 어긴 데서 얻어진 결과이기도 하다. 인간이 하느님의 금기를 깨고는 하느님에 가깝게 다가선 셈이라고 할 수 있다. 선악을 제대로 구분하는 것이야말로 신의 경지에 가깝다. 여기에다 “끝없는 삶”까지 더해진다면 그것이야말로 신의 경지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신의 경지를 향한 오부능선을 넘게 된 인간은 분명히 선악과를 먹기 이전의 유아적 상태와는 다르다. 흔?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어김으로써 인간이 타락했다지만, 냉철하게 판단하면, 타락했다기보다는 도리어 성숙해졌다. 온실에서 보호받던 유아적 상태에서 거친 광야로 홀로 나오면서 내적 능력을 한껏 발휘하게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켄 윌버가 간파했듯이, 인간은 에덴에서 타락한 것이 아니라 에덴으로부터 도약한 것이다. 

교회의 논리 

초기 교회에서는 예수를 하느님과 비슷한 경지, 아니 거의 같은 경지로 올려놓았다: “아들과 아버지는 하나이다”(요한 10,30), “나를 본 사람은 이미 아버지를 보았다”(요한 14,9) “아들 것은 모두 아버지의 것이고 아버지의 것은 모두 아들 것이다”(요한 17,10). 더 나아가 성서에서는 제자 토마가 부활한 예수를 만난 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요한 20,28)이라며 예수를 하느님처럼 고백하는 장면이 나온다. 인간과 하느님의 현격한 차이를 전제하던 유대교적 관례에 비추어보면, 예수를 이렇게까지 높이게 된 초기 교회 구성원들이야말로 정말 엄청난 논리적 변혁을 이룬 셈이다. 특히 그 뒤 예수의 신성화가 전체 그리스도교의 핵심 교리가 되었다는 점에서, 교회의 역사는 ‘눈이 밝아져 하느님처럼 되리라’며 유혹하던 뱀의 논리를 구체화해온 역사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예수를 따르던 그리스도인들이 앞으로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에까지 참여하게 되리라 희망하고 신뢰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리스도교는 ‘이들이 영생까지 하게 해서는 안 되겠다’며 생명나무 열매를 먹지 못하게 길목을 막았던 에덴동산 하느님의 논리를 확실히 넘어섰다. 인간이 생명나무 열매가 있는 에덴동산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려고 길목에 거룹들을 세우시고 불칼을 장치하셨다지만,(창세 4,24) 결국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점차 영생을 희망하고 추구해온 역사였다는 점에서, 에덴동산을 지키던 거룹과 불칼은 점차 무너져가고 있는 중이라고 하겠다. 

예수의 논리 

예수가 하늘나라를 선포하라며 열두 제자들을 이스라엘로 파견하면서, 곧 겪게 될 위험과 박해가 걱정되었는지 “여러분은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마태 10,16) 권면한 적이 있다. 이 가운데 “뱀같이 지혜로우라”는 말이 눈에 띤다. 무슨 뜻일까? '미드라쉬'에 하느님이 “저들(이스라엘)이 이방인에게는 뱀같이 지혜롭고 자신(하느님)에게는 비둘기 같이 순결하다”는 표현이 나오는 걸로 봐서, “뱀같이 지혜로우라”는 일종의 처세술에 가까운 교훈이라고도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면서도 율법의 형식이 아니라 정신을 추구했던 예수에게 “선악을 알게 되고 하느님처럼 되리라”는 뱀의 유혹은 그저 불경한 유혹이기만 했던 것 같지는 않다. 도리어 율법 혹은 말씀을 분간할 줄 아는 지혜의 역설적 표상처럼 여겨졌을 가능성도 크다. 왜냐하면 실제로 예수 안에는 굳어진 관례나 도그마를 넘어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려는 순수한 의지와 열망이 가득 차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는 이미 그 새로운 세계 안에 들어선 존재였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율법이라는 문자가 아니라 그 문자 안에 갇히지 않을 정신의 실천을 통해 더 구체적으로 실현된다는 점에서, 인간은 외형적 금기를 타파함으로써 내면적 정신에 더 가깝게 다가서는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의 명령을 거부함으로써 하느님을 더 잘 알게 되었다는 역설적 사실은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여러 가지를 시사해준다. 한편에서 예수는 금기를 강요하는 에덴동산의 하느님보다 금기를 깰 것을 요구하는 뱀의 지혜에 더 가까운 인물이라 해도 오해를 살 일만은 아니다. 예수는 아담과 하와의 유산을 새롭게 물려받아 심원하게 확장시킨 참으로 사람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담의 생명을 다른 이에게도 전한 새로운 아담이었던 것이다.(1고린 15,45 참조)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이찬수(종교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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