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우 신부] 12월 30일(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집회 3,2-6.12-14; 콜로 3,12-21; 루카 2,41-52

한 해의 마지막 주일, 교회는 이 주일을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로 지내며 그 한 주간을 ‘가정 성화 주간’으로 보냅니다.

먼저 질문을 하나 던져 보겠습니다. 성가정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는 흔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가정이 된다는 것을 이렇게 생각하곤 합니다. 기본적으로 나와 내 가족 모두가 세례를 받는 것. 그리고 가족이 함께 주일미사를 빠지지 않고 드린다면 성가정이라고 흔히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성가정의 조건일까요? 예수님의 가르침, 그리고 가정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에 충실히 따르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성가정이 ‘되어’ 가는 과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특별히 가정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선 교회는 창세기에 드러난 인간의 첫 상태에 대한 하느님의 말씀에 주목합니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창세 2,18)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타인과의 관계를 형성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에게 있어 공동체 구성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게 서로를 채워 주는 협력자로 창조된 하와를 통해 인간은 최초의 공동체인 가정을 구성하게 됩니다. “하와는 아담과 “한 몸”(창세 2,24; 마태 19,5-6 참조)을 이루기 위하여, 자신의 다름[타성, 他性]으로 아담을 완성하는 사람으로서(창세 2,18 참조) 아담처럼 창조되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605항)는 교회의 가르침은 바로 이 부분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인 역시 당신의 사도적 권고 ‘평신도 그리스도인’에서 이 부분에 주목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함께 자녀를 출산함으로써 창조주의 협력자가 된다.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창세 1,28) 창조주의 계획에 따라 가정은 “개인과 사회를 위한 ‘인간화’의 첫자리”이며 '생명과 사랑의 요람'이다."('평신도 그리스도인' 40항)

성가정 이콘. (이미지 출처 = Pixabay)

그렇게 성경은 가정공동체의 형성은 창조주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거룩한 행위라고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신앙 역시 가장 기초공동체인 가정에서 형성됨을 구약성경에서부터 살펴볼 수 있겠습니다. 쉐마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신명기 6장은 주님의 사랑과 충실성, 그리고 거기에 응답할 필요성을 배우는 곳은 가정이라는 것을 잘 알려 줍니다. “아버지께서는 나에게 이렇게 가르치셨다. “내 말을 마음에 간직하고 내 계명을 지켜라. 그러면 네가 살리라.”(잠언 4,4)와 같이 자녀들이 덕과 관련된 삶의 지혜가 담긴 최초의 가장 중요한 교훈들을 배우는 곳도 바로 가정입니다. 특별히 예언서들은 주님께서 혼인 생활의 중심에 계심을 강조합니다. 네가 배신한 젊은 시절의 네 아내와 너 사이의 증인이 바로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그 여자는 너의 동반자이고 너와 계약으로 맺어진 아내이다."(말라 2,14) 이 말씀대로 주님께서 몸소 혼인 생활의 사랑과 정절의 보증인이 되신다고 교회는 가르칩니다.

가정생활의 거룩함은 예수님께서 실제로 구체적 한 가정 안에 사셨다는 데서 그 절정을 맞이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한 가정에서 태어나 자라시면서 가정의 모든 특성을 받아들이셨고 혼인 제도에 최상의 품위를 부여하시어 새 계약의 성사로 만드셨다.(마태 19,3-9 참조) 이러한 새로운 관점 안에서 부부는 혼인의 충만함을, 가정은 그 견고한 토대를 발견한다.”("간추린 사회교리", 210항)라는 교회의 성찰은 신앙생활이 가정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 셈입니다. 이와 함께 교회는 가정생활 안에서 서로 내어 줌의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사회에 대한 교회의 첫 외침이라고 평가받는 교황 레오 13세의 회칙 ‘새로운 회칙’ 반포 100년을 기념하여 반포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백주년’에서 교황은 혼인으로 결합된 남자와 여자가 서로 자신을 내어 줌으로써 생명의 환경을 만들고, 어린이가 자신의 능력을 기를 수 있고, 자신의 존엄성을 의식할 수 있으며, 반복될 수 없는 자신의 유일한 운명에 대비할 수 있는 곳은 바로 가정임을 강조합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복음의 한 장면을 부각하면서 강론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자신을 애타게 찾았던 어머니 마리아를 향한 아들 예수님의 알 수 없는 대답이 나타납니다.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복음 역시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루카 2,50)라고 전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의 모습이 너무나 인상 깊습니다.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2,51) 우리는 서로에게 너무 조급합니다. 같은 가족이어도 그렇습니다. 부모는 내 생각대로 아이를 키우려 하고 아이는 자신의 생각에 갇혀 부모의 모습을 거부하는 모습을 자주 발견합니다. 제가 부각하고 싶은 오늘 복음의 모습은 바로 기다림입니다. 사회는 비록 조급함의 벽으로 우리를 몰고 가지만, 그리고 지금은 내 남편의, 내 아내의, 내 자녀의 모습이 이해 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내가 생각하지 못한 더 깊은 무언가가 담겨 있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바로 기다림과 생각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희망하는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그 모습처럼 한발 물러서 기다리고 생각할 수 있는 신앙인의 가정이 되기를 바라 봅니다.

유상우 신부(광헌아우구스티노)

천주교 부산교구 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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