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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지의 관심[구티에레스 신부] 12월 30일(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루카 2,41-52

가족 간의 일치가 아무리 강력하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해도(제1독서 참조), 그 구성원들의 책임과 인격 향상의 과정은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가족 간의 유대는 각 구성원의 과제와 사명을 재강화하기 위한 것이다.

사랑의 옷을 입기

바오로는 친목적 삶에 대한 충고를 한다. 우리는 서로를 참아 주고 겸손하며 인내해야 한다. 필요할 적에는, 또한 용서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러므로 그분의 태도는 우리 자신들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콜로 3,12-13) 그러나 무엇보다도 “모든 것 위에”, 우리들은 사랑의 옷을 입어야 한다. 바오로는 이것을 그의 서간에서 자주 사용된 은유로 말한다.(3,14) 이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평화”가 우리의 마음을 다스릴 것이다.(3,15)

평화란 갈등이 없는 상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 사이에 반드시 차이가 없어야 하거나 일시적 오해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사랑이 우리를 일치시켜 주는 끈이 될 때에, 평화는 한 걸음씩 세워질 것이며, 부정적 만남들은(대립도 마찬가지로) 사라질 것이고, 관계들은 더 투명해질 것이다. 집회서 구절에서(집회 3,3-17) 이러한 끈들은 인간 가족이라는 틀 안에서 구체화되고 있다.

예수가 12살 때 예루살렘에 홀로 머무르다 부모가 찾으러 온 장면. (이미지 출처 = Flickr)

마음속에 간직하기

다시 한번, 루카는 예수의 부모들이 그들의 종교적 의무를 수행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2,41-42) 아이는 후에 그가 십자가에 못박히게 될, 예루살렘 도시에 남아 있음으로써, 부모를 당황하게 한다. 그들은 사흘 뒤에 예수님을 발견하는데, 이 사흘이란 기간은 상징적인 중요함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비난으로 시작되는 기분이 언짢은 만남같이 들리는 어려운 대화를 보게 된다: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이 질문은 부모들이 방금 경험했던 노여움으로 야기된 질문이다.(2,48) 그런데 대답이 놀랍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2,49) 그러나 예수님의 두 번째 질문은 더 충격적이다: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아니다, 부모들은 진짜로 몰랐다; 그들은 깨우치고 있었다, 그리고 루카는 우리에게 말한다,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2,50) 믿음과 신뢰는 항상 진행 중인 여정과 같다. 믿는 이들로서 마리아와 요셉은 당황함, 불안, 그리고 기쁨 가운데에서 믿음이 자라고 있다. 상황은 점차 더 분명해질 것이다. 루카는 마리아가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2,51: 또한 같은 표현을 2,19에서도 볼 수 있다)고 지적한다. 우리가 “상황(혹은 일들)”이라고 번역하는 그리스 말(rhema)은 또한 “말씀”(히브리 말 dabar는 예언적 말씀을 표현하는데, 사건을 의미하기도 한다)을 뜻한다. 마리아의 깊은 새김은 예수님의 사명의 중대성을 간파하게 해 준다. 예수님과 마리아 사이의 특별한 가까움은 우리가 하느님의 계획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때때로 겪는 어려움들을 치워 주지 않는다. 제자로서 마리아는 예수님에 의하여 첫 번째로 복음화되는 사람이다. 마리아 역시 메시아의 징표를 알아들어야 한다. 예수님처럼, 요셉과 마리아도 은총과 지혜가 자라나야 한다.(2,52) 그리고 물론, 우리들도 그렇다.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신부
1928년 페루 리마 출생. 의대를 졸업한 뒤에 사제로 살기로 결단했다. 사제가 된 뒤에는 리마 가톨릭대학에서 신학과 사회과학을 가르치면서 리마 빈민지역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목을 했다. 대표적인 해방신학자로 빈민의 관점에서 복음을 증거해 왔다. 주요 저술로는 "해방신학"(1971) 외 다수가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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