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쇄신과 회복]

  

▲서울 은평구 신사동 소재 <예수의 작은자매들의 우애회> 경당 (사진/김정식)

한국헤세학회에서 주최하는 헤세심포지움에 초대되었다. 헤세의 시로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노래는 세 곡인데, 서유석씨가 만든 <아름다운 사람아>와 내가 만든 <들판을 넘어><흰구름>이다. 목원대학교 콘서트홀에서 진행되는 심포지움 후반부에 ‘내가 만난 헤세’이야기와 함께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대전으로 떠나려는데 급하게 전화벨이 울렸다.  

“로제리오씨. 아이꼬 자매가...”
“돌아가셨군요. 뇌암으로 수술을 받으시고 투병하시느라고 고생하시더니...”


대전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지난날을 생각했다. 29년 전인 1980년 겨울. 대구 2군사령부에서 군종병으로 근무 하던 내게 여동생이 찾아왔다. 그 즈음 샤를 드 푸꼬의 영성으로 살아가는 <예수의 작은 자매들의 우애회>라는 수녀회와 가깝게 지내던 동생은 편지에 늘 자매들의 삶을 적어 보냈었다.『단순 가난의 나자렛 삶』을 동경했던 우리는 자연스럽게 자매들의 대구 공동체를 찾아갔다. 서너 분의 자매들이 계셨는데 그날의 기억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공동체 가족 모두가 하던 일을 멈추고 찾아온 손님과 함께 한다는 것인데, 다른 수도공동체에서 만나기 힘든 모습이다. 또 하나는 비록 라면 한 그릇일지라도 자신들이 가진 것을 온전히 나누는 모습이었다.

손님이 와 있는데도 아랑곳없이 동네 신자 아주머니 한 분이 찾아오셔서 아이꼬 수녀님을 나무라셨다. 얘기를 들어보니 연탄이 떨어졌기에 100장을 사드렸더니 당장 쓸 몇 장만 남기고 신자도 아닌 이웃집에 나누었다는 것이다. 사주신 분은 수녀님들 때시라고 드렸는데 지난번처럼 또 남을 줘버렸다고 투정이시고, 식구 중 가장 어른이신 일본인 수녀님께서는 당신들도 어렵지만 이웃에 더 어려운 사람이 있어서 나눈 것 뿐 이라고 말씀하신다.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도 감동으로 가슴이 차올랐다. 폐가나 다름없어 보이는 수녀님들의 거처는 누추하기 그지없었고, 매서운 바람을 막기 위해 여기저기 비닐을 쳐 놓았는데 연탄마저 떨어진다면 겨울을 지내기가 쉽지 않을 터인데도, 더 가난한 이웃과 나눈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 때 보았던 아이꼬 수녀님의 천연덕스러운 표정이 아직까지 내 가슴에 따스한 온기로 남아있고, 내가 만났던 작은자매의 첫 기억이다.  

 

머리수건을 써보고 싶다는 우리집 아이들의 호기심에 부응하는 자매들. 자매들도 이런 순간을 무척 기다렸던 듯(?)(사진/김정식)
▲새로운 동심수도회 창설(사진/김정식)

 

 

 

 

 

 

 

 

 

 

 

 

그 후로 작은자매들과는 가족처럼 가깝게 지내왔다. 자매들도 종종 나를 ‘또 다른 자매(불어로 D'autre soeur)’라고 부를 정도였다. 수차례의 종신서원에서 전례음악 진행을 맡아 연습을 위해 함께 했던 시간들과 그 밖의 행사들을 통해서, 그리고 일상에서 우리는 자주 만났다. 내가 30여 년 동안 국내외에서 진행해 왔던 일은 생태보전과 인권회복을 위한 노래마당과 ‘복음 따라 사는 기쁜 삶’이라는 피정 프로그램이었는데, 자매들은 자신들의 공동체가 있는 도시라면 어김없이 찾아와 함께 해 주었다. 나 또한 세계 어느 곳에 초청되어 가든, 이름난 관광지를 뒤로하고 누추하지만 행복한 자매들의 공동체를 찾아갔다. 가난한 삶을 지향하고 가난을 살아보겠다는 열망이 서로에게 깊은 공감과 신뢰를 주었기 때문이다. 

 작은자매회 수도가족들이 다 그랬지만 아이꼬 수녀님은 특별히 겸손했고 인자한 성품을 지녔다. 40년 동안을 한국에 살면서 한국 사람들을 존중했고, 일본사람들이 잘못한 것에 대해 늘 사죄하는 마음을 지니고 살았다. 이 점은 자신을 내세우거나 드러내 보이려고 하지 않는 것과는 다른 또 하나의 겸손의 모습이다. 수녀님의 세례명이 막달레나 마리아였기에 축일 즈음에 내가 만든 「막달라 마리아의 노래」를 들려드리면 고요하게 웃으시며 행복해 하셨다. 일본말로는 「마구달라 마리아」라고 하기에 내가 장난삼아 이렇게 놀리면 빙그레 웃으셨다. 

“수녀님. 뭘 마구 달라는 거예요? 마구 달라 마리아는 욕심쟁이들의 이름이예요.”

“맞아요. 제가 욘심이 마니 한 것 같아요.”

▲초딩 수도녀 김이슬(사진/김정식)
▲어린 수도녀 김이랑(사진/김정식)

 

 

 

 

 

 

 

 

전에서 학회가 진행되었고, 공연 순서에서 노래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난 며칠 동안 헤세의 시로 내가 만든 두 곡을 우리말과 독일말로 열심히 익혀 두었었다. 그러나 「들판을 넘어」를 잘 부르고 나서 「흰 구름」을 부르다가 너무 눈물이 나서 부르지 못했다. 왜 그토록 눈물이 났는지를 여기서 다 말할 수는 없지만, 내가 사랑했던 헤세의 서정에 스스로 감동되어 노래를 거의 부르지 못했다. 그럼에도 참석하신 분들은 모두 오랜만에 만난 깊은 감동이었다고 했지만, 울다가 노래를 망쳐버린 내게는 위안이 되지 못했다. 동학산 자락에서 하룻밤을 함께 하고 다음 날 오전까지 이어지도록 계획된 일정을 뒤로하고, 서둘러 서울로 돌아왔다. 다음 날 아침에 있을 아이꼬 수녀님 영결미사에 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자매들 슬랑이(사진/김정식)
▲남자수녀(김이삭)까지?(사진/김정식)

 

 

 

 

 

 

 

 

 

 

 

아침 일찍 일어나서 수녀원으로 전화를 했다.

“제가 아이꼬 수녀님 가시는 길에 노래 한 곡 불러드리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그렇게 하셔요. 그렇지 않아도 「막달라 마리아의 노래」를 좋아하셨기에 녹음기로 들려드릴까 생각했었는데 마침 잘 되었네요. 그리고 기왕 하시는 김에 바로 이어서 우리 자매들이 부를 「의탁의 기도」도 함께 불러 주시면 좋겠네요.”

부지런히 반주곡을 준비하여 미사가 있는 성당으로 가는데, 출근정체가 덜 풀렸는지 무척 차가 밀렸다. 가까스로 미사시작시간에 대어 갔지만, 미리 음향기를 연결하지 못한 채였다. 내가 노래하기로 한 영성체 시간이 미사 뒷부분이어서 다행스러웠지만, 그래도 불안한 마음을 다 떨쳐버릴 수는 없었다. 주교님의 강론과 동료자매들의 기도를 들으며, 다소 피곤하기는 해도 대전에 남지 않고 밤늦게라도 올라 온 것이 다행으로 여겨졌다. 

 

▲아이꼬 수녀 영정사진(한상봉)
▲음향잡음에 놀라서 셔터마저 흔들림 (사진/한상봉)

 

 

 

 

 

 

 

 

 

 

 

 

 

 

영성체가 시작되고 이윽고 내가 노래 부를 순서가 되었다. 한 쪽에 미리 준비해 둔 음향시스템을 성당의 기존음향과 연결해야 한다. 모두가 침묵 중에 성체를 모시러 나가는 그 순간, 연결된 음향기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조치를 취해보려 해도 속수무책이었고, 연결 부위를 손으로 감싸 쥐고 잡음이 안 나는 상황을 유지하면서 노래는 시작되었다. 정말 간담이 서늘했다. 아무리 애를 써도 간간히 들려오는 잡음소리와 연결부위를 쥐고 있는 손에서 나는 진땀으로 노래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그래도 전문가답게 당황하지 않고 끝까지 불렀는데, 정신은 이미 어디론가 외출한 것 같았다. 오래 전 일본 이사하야에 있는 성모기사회에 입회한 한국인 수녀들을 축하해 드리기 위해 초대되었을 때 바로 이 노래를 일본말로 부른 적이 있었기에, 오늘은 아이꼬 자매의 삶을 생각하며 1절은 한국말로 그리고 2절은 일본말로 불렀다. 고요함 속에서 들었더라면 참으로 감동이었을 노래를 아슬아슬하게 부르고 있었고, 듣는 이들도 모두 긴장하였을 것이다. 

 

사랑을 드리려고 옥합을 깨옵니다, 주님 발 앞에.
담아둘 수 없는 향유로 발을 씻게 하옵소서.
이 몸을 드리려고 머리를 푸옵니다. 주님 발 앞에.
묶어 둘 수 없는 머리로 발을 씻게 하옵소서.
이 맘을 드리려고 눈물을 흘립니다. 주님 발 앞에.
멈출 수 없는 눈물로 발을 씻게 하옵소서.  

(최세균 시/김정식 곡 「막달라 마리아의 노래」전문) 

 

우여곡절 끝에 노래를 마치고 자리에 앉았다. 어제 헤세학회에 이어 연속 이틀 째 이어지는 실패였고, 40년 가까이 노래를 불러왔지만 이런 경험은 또 처음이어서 개망신이라고 여겨졌다.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으니 괜찮아. 전문인의 기능을 가늠할 때는 실수는 무시하고 잘 한 것만 점수를 매기는 거야.’라고 스스로를 위로해 보았지만 별로 도움이 되는 것 같지 않았다. 

바로 그 순간 아이꼬 수녀님의 삶이 떠올랐다. 한국에서 살았던 수녀님의 삶이 대부분 이런 일들의 연속이 아니었을까? 편안하고 안정된 일본생활을 포기하고 낯선 이국생활을 선택하여 멸시의 눈총 속에서 살아왔던 삶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샤를 드  푸꼬가 살아낸 삶을 그대로 살아내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샤를 드 푸꼬는 불란서의 귀족 신분을 버린 채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북부 사하라 오지로 가서, 이방인이며 이교도들인 무슬림과 함께 살다가 무슬림에 의해 죽을 때까지, 단 한 사람도 개종시키지 않고 그들 속에 스며들어 그들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냈다. 마치 예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아이꼬 수녀님의 한국 삶 또한 때로 실수한 것처럼 보이고 때로 망신스러울 수도 있었겠지만, 그것을 개의치 않고 수녀님은 당신 삶의 진정성을 가슴에 새기면서 고요하게 침묵하며 살아내셨을 것이다.

 

그렇다. 내가 수녀님의 영결미사에서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는 것은, 잘 불러 나의 노래실력을 한껏 뽐내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좋은 노래로 깊은 감동을 주고 싶었던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성모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모든 것을 가슴에 간직하고 새긴 채, 늘 침묵으로 겸손하게 살다 간 한 일본인 수녀의 마지막 가시는 길에 봉헌의 의미를 담아 들려드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토록 무안해 할 일도, 망신스러워 할 일도 아니다. 사람이 숨이 끊어진 후에도 청각은 가장 오래까지 남아있다고 하니, 마지막 숨을 거두신지 만 이틀이 지난 아이꼬 수녀님께서 그 노래를 들으셨을 것이고, 잡음이나 실수가 아닌 진정한 내 마음을 알아차려 주셨을 것이다. 그리고 관 속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이다.

“고마워요. 로제리오 현제님. 자르 든었어요. 내 마으믄 핸복하게습니다. 나도 사르면서 시르수는 마니 했다고 샌각 하게써요. 안년히 계세요.” (*내 마음 행복합니다. 나도 살면서 실수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2008년 7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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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식/가수 겸 작곡가로 생활성가의 개척자이며, 파리국립음악원에서 그레고리안과 지휘법을 공부하였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돕기위한 자선음악회와 환경보전과 인권회복을 위한 사회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으며 어린이들을 위한 노래와 예술가요 및 연주곡 등 다양한 장르의 노래를 만들고 부른다.  

 

최세균 시/김정식 곡/김정식 노래「막달라 마리아의 노래」- 김정식 곡/작은자매와 뱅상 신부 노래 「에수의 새를르 작은형제의 <의탁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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