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과 성찰 - 이재영]

이 글은 <가톨릭평론> 2018년 11-1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중재를 요청받은 사건

무더운 여름날, 서울의 작은 동네 놀이터에서 자정 넘어 시끄럽게 기타 치고 소리 지르는 청소년들을 야단치던 동네 어른이 10대 청소년 4명에게 위협당하고 특히 한 학생에게 폭행당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난동은 경찰의 출동으로 끝났고, 가해를 한 17살 학생은 폭행죄로 조사를 받았다. 이후 피해자는 목에 가벼운 디스크 증상이 나타나는 등 일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치료하는 데 큰 비용과 시간이 들었다.

가해 소년은 초등학교 때 부모가 이혼해 현재는 아버지와 조부모와 함께 살면서 고등학교(2학년)에 다닌다. 중학교 1학년 때 왕따를 당해서 몇 주 동안 학교에 가지 않은 적이 있는데, 그때 아버지가 학교에 찾아와서 괴롭힌 아이들 나오라고 복도에서 소리를 질렀다. 아무도 나오지 않자 아버지는 너를 괴롭힌 아이 이름을 대라고 하면서 모든 학생이 보는 앞에서 그 소년의 뺨을 때려 학교를 뛰쳐나온 경험이 있다. 어머니가 재혼해 사는 중국에 가서 몇 달 살았지만, 적응하지 못해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중학생인 남동생이 있는데, 공부를 곧잘 해서 그 동생만은 학교를 잘 다녔으면 한다. 평소 조용하고 말이 많지 않은 편이고 지금도 아버지와는 이야기하지 않으며, 아버지 연배의 어른들에 대한 반감이 크다.

피해자는 50대의 가장으로 지방에서 화물선을 운전하는 선장으로, 주로 주말에만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러 서울에 올라왔다. 경제적으로는 부족하지 않은 형편이고 세 남매를 키운다. 이번 사건 전까지 항상 동네에서 특전사 전우회에 열심히 참가하고 동네 치안을 위해 노력하는 정의의 사도로 불리는 사람이다. 자식들이 아버지의 무용담을 듣고 존경심을 표하는 것을 자랑으로 살아온 사람이다. 이번 일로 그는 자식들과 부인에게서 앞으로는 나서지 말라는 핀잔을 받았다.

피해자는 사건이 있었던 날 밤, 전우회 모임을 마치고 기분 좋게 술에 좀 취해 집으로 돌아오다가 동네 한복판에 있는 놀이터에 잠시 앉아 깜박 잠이 들었다. 그런데 잠시 후 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시끄럽게 기타를 치고 담배 피우는 모습을 보고 늦은 시간에는 조용히 해야 한다고 훈계했다. 그때 갑자기 가해 소년이 피해자에게 달려들어 사정없이 주먹을 휘둘러 큰 피해를 보게 되었다. 결국 가해 학생은 현장에서 경찰에게 연행되어 경찰서로 가서 조사받았고, 가해 소년의 보호자를 대신하여 삼촌이 경찰서에 나와 조사에 함께했다.

그 뒤 검찰 조사를 거쳐 법원에서 사건을 의뢰하여 이들은 회복적 정의 프로그램에 나오게 되었다. 가해 소년은 자신의 행동에 후회했고 피해자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지만, 어떻게 책임을 져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피해자는 훈계하는 과정에서 청소년들의 마음을 상하게 했을 수 있다고 인정하지만, 가해 소년이 도대체 왜 그렇게 자신을 심하게 구타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막내아들보다도 나이 어린 학생에게 맞은 것이 창피하기도 하고, 집에서도 자식들에게 면목이 없었다. 병원비나 위자료보다는 그 가해 학생이 자신의 행동이 잘못이라는 것을 아는지 알고 싶고, 학생이 깡패처럼 행동하는 것을 막아 보고 싶었다.

가해자-피해자가 한자리에 모이다

회복적 정의 프로그램 시간을 통해 가해 소년은 자신의 잘못을 더 확실하게 인식한 듯 연신 미안한 자세를 보였다. 그러나 실상 가장 걱정스러운 부분은 어떻게 책임을 져야 할지 막막했다는 점이다. 오히려 피해자는 가해 소년의 성장 이야기를 듣고 나서 왜 자신에게 그토록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했는지 조금 이해가 된다는 반응을 보였다. 아버지에게 받았던 상처가 그 연배의 어른들에게 반항적 모습으로 드러났다는 사실을 소년의 개인사를 들으며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가장 좋지 않은 상황 속에서 만났지만, 양측은 대화하면서 조금씩 서로를 이해하기 시작했고, 이제는 서로 미래를 걱정해 주는 관계로 발전했다. 피해자는 형편이 어려운 가해 소년 측에 변상을 요구하기보다는 그 소년의 미래를 위해 장학금을 제공할 용의까지 있다고 했다. 이 사건 이전에 전혀 알지 못하던 두 사람, 그것도 폭력의 피해자와 가해자로 만난 두 사람이 나눈 대화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큰 변화가 일어난 시간이었다.

회복적 정의는 직면을 의미한다. 물론 누구에게도 편하거나 좋은 자리가 아니다. 부담과 어려움, 심지어 또 다른 고통이 따를 수 있는 자리다. 하지만 서로 만나지 않으면 아무것도 풀 수 없다. 서로의 배경과 환경, 잘못된 행동, 힘든 고통의 이면에 있는 뿌리와 역사를 이야기하지 않고는 문제를 풀 수 없고 진정한 의미의 회복을 이룰 수 없다. 회복적 정의가 화해와 관계회복을 보장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양측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들을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을 만드는 것이 필수적이고, 또 불가능하지 않다. 그러니 이런 과정을 이끌어 갈 진행자가 준비되어야 하고, 이들에게 자신의 역할을 갖게 도와주어야 한다. 회복적 정의는 개인의 권리를 주장하며 충돌하는 장이 아니라, 공동체의 역할을 통해 갈등하는 주체가 변화를 경험하는 장이 되었다.

화해 (이미지 출처 = Pxhere)

정의 패러다임과 그리스도교

우리는 누구나 정의에 관한 패러다임을 가지고 산다.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대한 가치나, 잘못을 어떻게 다뤄야 할 것인가, 공정과 형평성의 문제 등 정의는 우리의 삶과 사고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다. 얼핏 보면 정의는 특정 전문영역으로 여겨지기 쉽지만,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김영사, 2010)라는 책이 한국에서 100만 권 이상 팔리는 걸 보면 정의의 문제가 많은 사람에게 여전히 흥미 있는 주제임은 틀림없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에게는 어떤 정의의 패러다임이 필요할까? 만약 정의에 몇 가지 다른 패러다임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생소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사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딱히 다른 정의 패러다임을 갖고 있을 것이라는 논리는 비현실적이다. 보통 ‘권선징악’ 정도의 일반적인 정의 패러다임을 생각할 때가 많다. 때로는 신앙인일수록 오히려 더 선악에 대한 선명한 분별력을 갖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잘못한 사람을 처벌함으로써 이뤄지는 정의가 낳는 부정적인 (심지어 비성경적인) 결과들을 주의 깊게 본 그리스도인이라면 정의의 문제가 주는 신앙적 딜레마를 접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하느님의 정의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간혹 하느님은 마치 높은 의자에 앉아 죄인을 단죄하는 재판관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보면 하느님을 ‘공의’의 하느님으로 표현하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서구 사법의 기초가 되는 구약의 언약법도 마치 신이 만들어 놓은 법을 지키고, 지키지 않은 사람을 처벌하는 것을 본질적 의미로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신이 인간과 사이에서 성립한 계약의 목적은 고통을 줌으로써 두려워 어쩔 수 없이 복종하는 장치가 아니라, 신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계속하려는 하느님 사랑의 의지에 기초한다. 즉 어떤 행위들은 하느님을 노하게 할 것이고, 인간과 신의 관계를 멀어지게 하므로 조심하고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일종의 선 지침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느님의 창조 원칙인 샬롬이 유지되고, 범죄로 인해 깨어진 것이 다시 원래의 상태와 관계로 회복되는 것이 가장 근본 목적이다. 물론 하느님도 벌하실 때가 있지만, 그 처벌 목적은 샬롬의 회복에 기초한다. 샬롬은 평화와 안녕만을 의미하지 않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바른 자리매김이라는 정의의 개념을 함께 내포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정의 실천은 잘못된 사람을 징벌하고 내쫓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하느님의 화해와 샬롬의 구원사업에 동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비록 역사적으로 성경적 정의가 응보적 정의를 강화하는 데 많이 오용되었지만, 이는 신학적 이유라기보다 정치적 목적으로 신학이 이용당하면서 나타난 왜곡 현상이다. 그 본질의 의미는 매우 회복적이다.

샬롬은 하느님이 예수를 통해 구현하려는 복음의 핵심이기도 하다. 예수는 오직 법(율법)을 지키는 데만 얽매였던 유대인들을 불쌍히 여기고 일부러 법을 어김으로써(안식일 사건 등) 법의 껍데기가 아닌 원래의 취지를 이해하라고 요구하셨다. 예수는 기존의 율법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법이라는 올무에 얽매인 인간을 해방함으로써 율법을 완성했다. 예수는 당대의 법에 매여 무겁게 살던 유대인들에게 해방을 선포하신다. 하지만 예수의 방식은 기존의 질서를 개혁하고 무력화하는 데 있지 않았다. 그는 율법의 본래 의미를 깨닫게 함으로써 율법이 존재하는 이유를 완성하기 위해서 왔다는 것을 강조했다. 여기서 완성이라는 의미는 바로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고, 사랑이 빠진 (율)법은 완성될 수 없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배운다는 것은 권선징악이라는 세상의 법의식을 배운다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고차원적인 사랑에 기초한 정의를 배운다는 뜻이다. 바로 화해와 치유를 부르는 정의, ‘회복적 정의’를 의미한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모세를 통해 전해 온 율법을 새롭게 설명하면서, 전에는 미워해도 되는 원수까지도 이제는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의로움과 샬롬을 회복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5) 예수 구원사업의 최종목표는 죄인이 된 인간의 구원이었고, 깨어진 하느님과의 관계회복이었다.

회복적 정의는 사실 희년의 개념과 연관되어 있다. 희년은 주님 은총의 해이고, 에제키엘서에 나오듯이 자유의 해를 뜻한다. 어떤 경제적, 정치적 죄로 노예가 되었던 사람이 자기 씨족에게 돌아가 조상 전래의 소유지를 회복하는 은총의 해다. 예수는 우리를 위해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돌아가셨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예수를 우리의 희년(Jubilee)이라고 생각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우리는 새 생명을 얻는다. 이것이 은총, 이른바 거저 받은 은총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생각과 믿음이 거저 받은 은총을 감사히 여기고, 그 은총을 묵상하는 감상주의적 신앙에 그치면 안된다. 하느님의 은총을 누린다는 것은 바로 의롭게 되는 것, 즉 하느님의 정의에 동참하는 것을 뜻한다.

로마서 5장 12-21절에서 “그러므로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았듯이,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습니다”(로마 5,18)라는 의미를 깊이 새겨보아야 한다. 사람은 죽어야 할 죄인들인데 대가 없는 용서를 받았다. 인간은 원래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없는 존재다. 의롭지 못한 사람은 판단과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게 되는 것이 당연한 운명이다. 하지만 그 해가 비켜 지나가 버렸는데, 이것은 사람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의롭게 될 수 있는 이유, 즉 죄가 사해지는 단 하나의 이유는 하느님이 선포한 희년의 약속을 하느님 자신이 스스로 친히 사람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지키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정의를 회복함으로써 바로 이 하느님의 은총에 동참한다. 그 말은 이 땅에 하느님의 의를 실현한다는 의미다. 바로 세상의 기준이 되는 응보적 정의와는 전혀 다른 패러다임인 회복적 정의를 이 땅에 실천하는 것이다. 하느님이 (율)법을 통해 완성하고 싶었던 것은 하느님과 우리의 사랑 관계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바로 하느님의 희년이 직접 강생하여 사람들에게 나타난 일대의 사건이고 은총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날 한국의 그리스도인은 응보적 관점이 더 강하다. 용서와 화해라는 개념이 성경구절에는 표현되었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에서는 살아 움직이지 않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심지어 교회가 스스로의 갈등과 모순, 불의로 자기 앞가림조차 하기 힘든 상황들이다. 이런 현실에서 “그리스도인에게 왜 회복적 정의여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해야 한다면, 그것은 시편에 나와 있는 것처럼 주님께서 “우리의 죄대로 우리를 다루지 않으시고 우리의 잘못대로 우리에게 갚지 않으신다”(시편 103,10)라는 말씀으로 대신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느님 희년의 은총을 입은 사람이기 때문이고, 용서받은 자로서 용서해야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관계의 회복과 은총으로 채워진 그리스도교의 샬롬과 언약법의 개념이 더 강력한 처벌만을 외치는 오늘날의 응징적 보복 논리로 변질된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바로 그리스도교가 국가의 종교가 되면서부터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후로 로마에 의해 더는 핍박받는 종교가 아니라 다른 종교를 오히려 핍박하는 종교가 되면서 그리스도교의 강제적 포교가 시작되었고, 11세기의 십자군 전쟁으로까지 발전한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 중앙집권적인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사법의 주체가 국가로 바뀌고, 국가에 반역하는 행위를 강력한 처벌을 통해 통제하게 된다. 결국 거의 모든 범죄행위에서 국가가 피해자를 대리하고, 가해자와 국가 사법기관 사이에 공방을 벌여 진실을 밝히고 처벌을 내리는 현재의 사법제도로 발전했다. 이제 범죄는 국가(또는 국가가 정한 법)에 피해를 주는 행위로 간주되고, 피해자는 정의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피해 사실만을 진술하는 부수적 존재로 전락했다.

교회는 서구의 사법제도 생성뿐만 아니라 왜곡에도 적지 않은 역할을 해 왔다. 지금도 전쟁 같은 국가 차원의 폭력이나 사형제도 등 강력한 처벌을 요구하는 정치그룹 뒤에는 선악의 구분이 강한 그리스도교 조직들이 어렵지 않게 발견되곤 한다. 첫 번째 살인자인 카인을 사형시키지 않으시고, 계속해서 죄를 범한 이스라엘 백성을 섬멸하지 않으셨던 하느님의 끝없는 구원사업의 의미를 깊이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자신을 희생하여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용서의 하느님을 기억해야 한다.

회복적 정의 패러다임: 교회를 향한 이 시대의 요청

‘회복적 정의’라는 정의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이 한국교회에 던지는 시사점은 매우 단순하지만 큰 의미가 있다. 정의는 갈등하고 분쟁하는 사람들에게 대의를 위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낮추라고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교회의 문제를 세상 법정으로 끌고 가라는 것도 아니며, 교회에 만연한 죄의식을 바탕으로 폭력적 권위로 누르는 것도 아니다. 정의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의미한다. 어떤 불의한 일에 영향을 받은 모든 사람이 함께 모여 진솔하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고 들을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 ‘시간’과 ‘공간’을 창출하는 것이 바로 조정자의 역할이다. 갈등하는 사람들이 안전하게 느끼고 서로의 경험과 아픔에 대해 판단과 비난 없이 이야기하고 들을 수 있는 거룩한 터(Holy Space)를 만들어 가는 것이 바로 평화를 이루게 하는 사람들의 소임이다.

교회는 하느님나라를 이 땅에 드러나게 하는 실험의 장이다. 세상의 방법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원칙이 통용되는 예수 제자들의 공동체다. 신학과 신앙의 ‘앎’의 단계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제자의 ‘삶’의 단계로 넘어가는 실험의 장이다. 온갖 분쟁과 갈등의 혼돈 속에 있는 오늘의 한국 교회가 이 연단의 시기를 배움의 기회로 승화해 하느님의 화해의 영이 머무는 ‘거룩한 터’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분열과 폭력으로 찢어진 이 사회와 국가에 화해와 치유라는 하느님 샬롬의 신비를 전하는 메신저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날마다 깨져 가는 세상, 폭력 때문에 고통스러워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매일 듣고 살아간다. 그러면서 점점 도대체 하느님은 어디에 존재하는지, 왜 이 고통의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는지 의문을 가질 때가 많아진다. 예수님이 말한 사랑과 평화는 도대체 어디에서 어떻게 등장할 것인지 막막한 현실 앞에 무기력해지기 쉽다. 하지만 하느님이 이끄시는 화해의 영은 여전히 이 세상에 운행하고 계신다. 다만 그 화해의 영이 운행할 통로들이 막혀 있다. 하느님이 이끄시는 화해의 영이 운행할 통로란 바로 분쟁 가운데, 다툼 가운데, 깨짐 가운데 기도로 중재와 조정의 역할을 하는 중재자들의 존재다. 우리가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를 외치는 데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화해와 평화의 영이 운행하는 통로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폭력과 불의로 얼룩진 오늘날 제자들에게 준 소명이다. 21세기에도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화해이고, 화해를 통해 새롭게 세워지는 정의로운 평화일 것이 분명하다.

이재영
미국 이스턴메노나이트대학교(EMU)에서 갈등분쟁전환학(회복적 정의 초점) 석사를 졸업하고, 현재 (사)한국회복적정의협회와 한국평화교육훈련원(www.kopi.or.kr)에서 대표를 맡고 있다. 학교, 지역사회, 사법부, 단체 등을 위한 갈등분쟁 해결과 회복적 정의 관련 교육훈련을 해오고 있다. 또한 2011년부터 출범한 동북아평화교육훈련원(www.narpi.net) 책임자로 매년 여름 동북아시아 평화교육자원을 양성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