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우 신부] 12월 16일(대림 제3주일) 스바 3,14-18ㄱ; 필리 4,4-7; 루카 3,10-18

사제의 장미색 제의가 상징하듯 장미 주일이라고도 하는 대림 제3주일, 교회는 전통적으로 대림 제3주일에 기뻐하여라(Gaudete) 주일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기쁨을 상징하는 장미색 제의와 같이 곧 다가올 성탄의 기쁨을 미리 체험하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대림 제3주일은 기쁨이란 단어가 집중적으로 조명되고 있습니다. 말씀의 전례 전체에도 기쁨이라는 단어가 빠지지 않습니다. 우선 입당송으로도 제시된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주님 안에서의 기쁨을 이야기합니다. 사실 복음은 예수님의 탄생을 배경으로 한 장면들에서 주님 안에서의 기쁨을 반복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루카 복음만 전하고 있는 사건, 엘리사벳을 만난 자리에서 자신에게 다가올 주님의 탄생을 받아들인 성모 마리아의 노래 역시 하느님 안에서의 기쁨을 이야기하고 있고,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루카 1,46-48) 마태오 복음만 전하고 있는 이야기, 태어난 주님을 향해 길을 떠났던 동방박사들도 주님을 인도하는 별을 보고 기뻐하였다(마태 2,10)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 신앙인이 기쁜 이유는 주님과 언제나 가까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 곁에 오심을 확신하기에 그 기쁨을 미리 맛보고 있는 셈이지요. 대림 제3주간 월요일부터 맞이할 대림 두 번째 시기에 미사 전례 역시 이를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저희가 깨어 기도하고 기쁘게 찬미의 노래를 부르면서 성탄 축제를 준비하고 기다리게 하셨나이다. - 대림 감사송2)

대림의 기쁨. (사진 출처 = Max pixel)

1독서에 배치된 스바니야 예언서 역시 기쁨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 민족 곁에 주 하느님께서 계시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 바로잡히고 두려움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 기쁨은 생동적인 기쁨입니다. 그렇게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정체되어 있지 않고 무언가가 변할 수 있고 움직일 수 있는 생동성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기쁨은 구체적 삶의 방식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교회문헌은 그렇게 신앙인의 구체적 삶 안에서의 기쁨을 끊임없이 이야기합니다. 먼저 교회가 “역사 안에서 새로운 길을 걷기 시작한”('자비의 얼굴' 4항) 1965년 제2차 바티칸공의회 폐막 직전에 반포된 문헌,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의 첫 단어이자 제목이 "기쁨과 희망"임을 상기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더불어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발표하신 교황권고 3개 모두 제목에 기쁨이 포함되어 있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2013년에 발표하신 현대 세계의 복음 선포에 관한 교황권고의 제목이 ‘복음의 기쁨’, 2016년 가정의 사랑에 관한 세계주교대의원회의 후속 교황권고의 제목은 ‘사랑의 기쁨’, 그리고 올해 반포된 현대 세계에서 성덕의 소명에 관한 교황권고의 제목은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이지요. 이 세 문헌의 공통점은 복음선포와 가정 그리고 성덕의 소명 내에서 구체적 삶의 방식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특별히 교황님께서는 ‘복음의 기쁨’에서 오늘 1독서의 말씀을 이렇게 설명하고 계십니다. “스바니야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구원의 기쁨이 넘치는 잔치 한가운데에 당신 백성과 함께 계신다고 말합니다”('복음의 기쁨' 4항) 동시에 구원을 향한 가장 “강렬한 초대”가 바로 스바니야 예언서에서 드러난다고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생동성이 내재된 기쁨은 퍼져 나가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바로 그렇습니다. “요한은 그 밖에도 여러 가지로 권고하면서 백성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 세례자 요한은 구원자께서 오심을 알아차리는 동시에 그것을 사람들에게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역시 자신의 기쁨임을 사람들에게 증언하였습니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요한 3,29) 기쁨은 나눌수록 커진다는 말이 새삼스럽게 떠오르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기쁨은 계속 전달되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림 제3주일의 또 다른 이름 ‘자선 주일’의 의미를 살펴볼 수 있겠습니다. 기쁘게 살기 위해서는 구체적 삶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자선은 내가 체험한 기쁨을 이웃과 나누는 행위입니다. 그러기에 무엇보다도 복음적 행위입니다. 기쁨을 체험하지 못하고 있는 이웃을 향한 자선 행위를 통해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신 주님의 삶을 닮아 가게 됩니다. 그러기에 자선 역시 표면적으로는 상대방을 위한 것이지만 제대로 기쁨을 누리기 위해 노력하는 나를 위한 행위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대림시기의 한가운데에 들어섰습니다. 주님을 맞는 기쁨을 이야기하는 이때에 여러분 모두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기쁨이 끊임없이 새로 생겨나기를”('복음의 기쁨' 1항) 기도 드리겠습니다. 

유상우 신부(광헌아우구스티노)

천주교 부산교구 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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