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과 본당의 뜻에 대해

(마크 파이퍼)

낭만적인 향수에 젖어, 휴일의 음유시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휴일에는 집 만한 곳이 없어요.” 직접 들이대지만 매끄러운 마케팅으로, 세계적인 가구업체인 이케아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 가운데 3/4은, 집을 이제 더 이상 집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케아의 놀랍게도 실존적인 연례 “가정에서의 삶 보고서”에 따르면,

- 사람들의 29퍼센트는 자기가 어디에 살든 간에 집의 편안함을 느끼지 못한다.

- 미국인의 45퍼센트는 개인적 시간을 갖기 위해 자기 차 안으로 – 집이 아니라- 간다.

- 젊은 부부들의 53퍼센트는 자기의 주거 공간에서 소속감을 느끼지 못한다.

- 응답자의 33퍼센트는 자기들의 거주지에서 안전하다는 느낌을 얻지 못한다.

- 집에 있듯 편안하다고 느낄 수 있는 5가지 핵심 요소는 사생활(프라이버시), 안전감, 안락감, 소유감, 소속감이다.

그래서 이 정보를 받아들고, 나는 궁금해진다. 만약, “이케아” 대신에, “가톨릭교회”를 집어넣으면 어떻게 될까? 그리고 “주거 공간과 소속감” 대신에 “본당과 소속감”을 넣어 보면? 나는 집에 있어도 집같이 느끼지 못하는 미국인의 수만 늘어나는 게 아니라, 자기 본당에 가서도 집처럼 편하게 느끼지 못하는 가톨릭 신자의 수도 늘어나고 있지 않을까 한다. 즉, 우리 가톨릭교회는 해마다 다른 그리스도교 종파에 비해 더 많은 신자를 계속 잃고 있다. 이런 결과들을 보면서, 나는 또한 이케아가 단테에서 영감을 얻은 상품을 팔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모든 희망을 버린 자, 이곳에 들어오는 그대다”라는 문구를 담은 광고지. 현관 매트에 쓰면 알맞겠다.

일요일 아침 10시에 나는 세인트바나바스 성당에서 내 주변 사람 약 300명을 조사했다. 여기에 나와 함께 신자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 가운데 몇이나 영적으로 집처럼 편안하게 느끼고 있을까? 우리가 50분 동안 함께 (미사나 기도회를 하며) 지내는 동안보다 자기 차 안에서 기도하는 게 더 좋은 경험을 한 사람은 얼마나 될까? 젊은 부부들은 이 본당에서 소속감을 얼마나 느끼고 있을까? 얼마나 많은 동료 신자들이 이 장소에서 안전하다고 느끼지 않고 있을까? 집처럼 느끼게 하는 5가지 핵심요소라고 이케아가 정리한 것들, 사생활(프라이버시), 안전감, 안락감, 소유감, 소속감은 어떤 한 가톨릭 신자가 자기가 속한 본당에서, 더 크게는 보편교회를, 집처럼 편하게 느끼려면 필요한 핵심요소들과 비슷하거나 같은 것이 아닐까?

아직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이케아의 설문조사에서 자기 집에서 집처럼 편안하게 느끼지 못하는 비율이 청년층에서 가장 많았던 것과, 자신들의 영적 가정인 교회를 떠나는 청년의 비율에는 상관관계가 있지 않을까? 그런데, 내 생각에 그런 전제는 맞지 않아 보인다. 내 또래 세대 대부분, 그리고 나보다 젊은 사람들이 (나는 30살이다.) 교회를 떠나는 것은 말 그대로 영적 가정을 떠난 것이 아니다. 내 경험과 그간 들어온 증거들로 볼 때, 이들은 교회를 집으로 보거나 경험한 적 자체가 전혀 없다.

소속감과 소유감을 넘어, 집이란 추억을 만드는 장소의 기능이 있다. 집에서의 행복한 추억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내가 사서 사는 집이 아니고 빌려 사는 경우가 많아지는 사회, 갈수록 이동성이 강해지고 일시적으로 머무는 사회에 살고 있다. 새 동네로 이사 가면 새 본당에 교적을 옮기는가? 명절 때에 “집으로 가는” 사람들이 어디로 가던가? 아마도, 친지의 집일 것이다. 진짜로 엄마와 아빠가 사는 집으로 간다 해도, 그 엄마 아빠가 그 청년이 자라오던 그 집에 지금도 살고 있던가? 그리고 본당에 걸어 들어가는 일이 1년에 대략 2번 정도라면, 그 성당에서 좋든 나쁘든 추억이라는 게 생길 수 있겠는가? 더구나 집처럼 말이다.

CEO 신자(성탄절과 부활절에만 성당에 가는 신자, Christmas-and-Easter-Only)의 모습이 여기에 있다. 크리스마스에 관해 이야기하자면, 성탄 잔치를 멋진 아파트에서 하든, 3세대가 모여 사는 집에서 하든, 성당에 가서 하든, 나는 성탄 구유를 보면 내 생각이 얼마나 중산층다운 생각인가를 깨닫곤 한다. 성가족에게는 평화의 왕이 들어갈 집이라고는 큰 여물통밖에는 없었고, 그나마 곧 이집트로 도망가야 했다.

흔히 가정 교회라고 하는 떠들썩한 가족의 집은 본당이라는 공동체에 적용될 좋고 비슷한 개념이 되어야 한다. 즉, 초대교회 때는 신자들의 집이 또한 예배를 드리는 장소이기도 했다. 당신의 집에 있는 사람들은 당신이 누구인지 알고 당신의 존재 자체를 사랑하며, 당신이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밀어준다. 서로 논란이 있을 수는 있지만, 당연히 서로 존중한다. 집(이라는 본당)에서 늘 보는 사람들은 집에서 멘토이기도 하고 형제자매 또는 부모이기도 하며, 새로 오는 사람이든 늘 보던 사람이든 손님을 초대하는 환대가 습관이다. 교훈을 나누고, 이야기를 들으며, 유대를 형성하고, 바쁜 일정의 밋밋한 일상과 힘든 나날, 오해와 막무가내, 가정의 위기, 비극 그리고 세상의 힘든 일에 사랑의 맛을 더한다. 그런데 가족의 20퍼센트만이 1주일 평균 1시간만 만난다면, (그 가정인) 우리의 신앙 공동체에 그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겠는가?

폴란드에 있는 한 이케아 매장. (사진 출처 = NCR)

물론, 자신의 영적 가정(본당)에서 시간을 별로 보내지 않는 것은 난제다. 사람들이 그러는 이유는 집처럼 편하게 느껴지지 않아서일 수도 있고, 한 번도 간 적이 없어서일 수도 있다. 또한 나이와 상관없이, 자기 동네 본당을 자신의 영적인 집으로 여겼던 (아마도 당연한 것으로) 이들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이들은 마치 본당을 쇼핑이라도 하듯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자기 본당을 떠나거나 아예 영원히 교회를 떠나고 있다. 가정과 본당은 우리가 당연히 소속되어야 할 곳이라는 점에서 비슷하다. 우리가 일상 삶을 살기 위해 세상으로 되돌아가기 전에 머물며 휴식을 취하는 곳이다.

가정에서, 그리고 성당에서 멀어지는 것은 여러 이유에서일 것이다. “본당 홈커밍데이” 같은 프로그램의 결과는 어떠한가? 많은 정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자금도 꽤 괜찮게 모았고 고급 비디오도 만들었지만, 상대적으로 성공적이지 못했다. 결국, 원래 사람들이 집을 떠났던 이유가 인정받지 않는데 왜 돌아가야 하는가? “저와 우리 집에서는 주님에게 봉사합니다”라는 팻말이 붙은 이러저러한 장식품을 많이 살 수는 있겠지만, 성서 구절이 적힌 장식을 벽에 걸어 놓는다고 해서 그 벽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그 말씀이 살아지고 있는 뜻은 아닌 때문이다.

이케아의 마케팅은 이사야서 38절에서 나온 것처럼 보인다. 이케아 상품들은 당신의 집을 정돈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나온 것이므로. 교회와 각 본당이 각자의 집 안을 정돈할 때가 아닌가? 우리가 영적인 집이나 우리가 말 그대로 집처럼 느끼는 우리 자신의 공간이 없다면, 누가 우리가 모시는 아버지의 집(이사야서 38절 또는 요한 14장 2절) 안으로 환영받고 있음을 파악하려 주의를 기울일 수 있겠는가?

이케아의 보고서에는 다섯 문항으로 된 퀴즈가 포함돼 있다. 나는 이 퀴즈를 보고 집에 관해 내 느낌을 어떻게 말할지, 그리고 더 좋은 가정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내가 할 수도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 퀴즈는 이렇게 돼 있었다. “누구나 그러한 집의 느낌을 경험할 자격이 있습니다.” 도러시 데이의 말을 빌리자면, 나는 아마 고등학교 이후로, 내가 느끼는 신앙은 산상설교로 정리할 수 있다고 생각해 왔다. 그래서, 내 처와 나는 우리 아이들을 우리 집에서 키우고, 거의 이해할 수 없게도 자녀들을 매 주일마다 미사에 데려가며, 우리 넷이 본당과 우리의 집이라는 가정교회에서 산상설교에서 그리스도에게 배운 바처럼, 사생활, 안전감, 안락감, 소유감, 소속감을 경험하기를 바란다.

가정의 이미지는 성경 곳곳에 스며 있으며, 가정의 이미지는 우리의 심리와 공명하는 듯하다. 예수는 아버지의 집이 기다리고 있지만 이곳 지상에서는 한 집안이 갈라서면 버티어 내지 못한다(마르 3,25)고 명확히 했다. 나는 출장 중이 아닐 때는 4살짜리 딸이 잠자리에 들 무렵이면 파자마를 입히고 이를 닦고 책을 두 권 읽고 저녁기도를 하고, 그리고는 노래 한두 곡을 부른다. 그 기도와 노래 중간에, 나는 딸에게 간단할 퀴즈 같은 문답을 하면서 기초 지식을 가르친다.

예를 들어, 네가 사는 데가 어디냐고 물으면 딸은 대답한다. 어느 거리냐고 물으면 대답한다. 그러면 주소를 묻고 대답한다. 때로는 더 많은 질문을 하기도 하지만, 늘, 언제나 너는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 질문을 끝에 한다. 그리고 내가 기대하는 답은, 딸이 매일 저녁 틀리지 않고 외우는 답은 “나는 안전하고 사랑받고 있고, 집에 있어요”라는 답이다.

딸이 “나는 안전하고 사랑받고 있고, 집에 있어요”라고 하면 우리는 서로 안거나 꽉 껴안고 잘 자라는 인사를 한다.

내 믿기에, 딸이 그렇게 확신을 지니고 말하는 것은 자기 집에서 진짜로 안전하고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이를 특히 언급하는 이유는, 교회의 구원 사명과 가족, 즉 가정교회의 구원 직무는 공간과 관계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당신의 집(house)에서든 당신의 본당에서든 집(home)을 만들게 되면 공간과 관계가 둘 다 필요하며 서로 얽혀 있어서 떼어낼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건물과 주소는 바뀔 수 있고, 방도 고쳐 만들 수 있지만, 한 집(home) - 영적, 물질적 집-의 고유한 공간에는 그곳에 사람이 초대받지 않으면, 사람이 안전하지 않으면, 사람이 사랑받지 않으면 실현될 수 없는 고유한 목적이 있다. 사람들을 초대하고 환영하며, 사랑을 실천하고, 사람들을 안전하게 지켜라. 우리가 이케아에서 배웠듯,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곳을 집처럼 편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행복선언을 입에 올렸고, 나는 그것이 하느님나라를 건설하는 데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우리 가정에서, 우리 지역사회에서, 우리 교회에서 집처럼 편하게 느끼게 하는 데 열쇠라고 주장한다.

(마크 파이퍼는 미식축구팀 그린베이 패커스의 팬으로, 신성하지 않은 곳에 살며, 비영리부문에서 일한다. 시카고에서 가족과 함께 거주하며 드폴 대학에서 공공정책학 석사학위를, 세인트재비어 대학에서 학사학위를 받았다.)

기사 원문: https://www.ncronline.org/news/spirituality/young-voices/ikea-insight-catholics-when-home-doesnt-feel-h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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