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주년 저널리즘 세미나 3 - 경동현 발표, 김지환 토론

<가톨릭뉴스 지금여기>는 '한국 교회를 있는 그대로 쓴다'는 저널리즘의 원칙으로 교회쇄신을 지향해 왔습니다. 창립 10주년을 맞아 내일 더욱 충실한 언론이 되기 위해 저널리즘 공개 세미나를 열고 있습니다.

세 번째 세미나는 11월 28일(수)에 경동현 편집위원장의 발표, 김지환 전 편집위원장의 토론과 독자들의 질의응답이 있었습니다. 가톨릭언론이 가야 할 길을 함께 고민하면서 깊이 있는 토론을 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발제문과 토론문, 2가지를 아래와 같이 더 많은 독자와 나누고자 합니다. -편집자 

 

이날 경동현 편집위원장(왼쪽)이 발제를 맡았다. ⓒ달군

발제 : 주체 형성의 관점에서 본 천주교 사회운동과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의 길

경동현(안드레아),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위원장,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실장

 

1. 대항 공론장으로의 대안 언론 운동

주류 공론장에 대한 저항 혹은 대안의 의미로 사용하는 대항 공론장(alternative public sphere) 개념은 한국사회와 교회의 현실 안에서 공공성 회복을 위한 방안을 논할 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기본적으로 대항 공론장은 보편적 주류 공론장에 대한 대응적 의미로 나온 개념이다.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 1992)는 보편적 공론장에서 참여가 배제된 이들이 모여 그들 자신의 방법대로 토론하고, 여론을 형성하는 복수의 공론장이 별도로 존재한다고 보고, 이것을 대항 공론장이라고 정의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대항 공론장은 주류 공론장에 저항하는 개념으로, 상대적으로 사회적으로 무시되거나 소외된 계층과 그 담론들을 끌어내고 재생산하는 공간으로 정의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교회사를 돌아볼 때, 수도원 운동은 일종의 대항 공론장의 역할을 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수도원 운동은 콘스탄티누스 시대 이후 그리스도교가 사회적 약자에서 강자로, 소수자에서 지배자로 변하고, 지배 계층의 종교가 됨에 따라 예수 운동이 가졌던 본모습을 회복하기 위한 운동으로 나타났다. 초대교회가 보여 주었던 복음적 역동성을 회복하기 위해 시작되었던 수도원 운동은 공동체적 이상을 계승했지만 교회 전체를 변화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희미해져 가는 교회의 공동체적 전통은 근대주의라는 사회적 변화 과정에서 종교개혁의 좌파인 일부 급진 세력들에게 계승되었다. 이들은 종교개혁의 이상이 애초의 그것과는 다른 양상을 빚게 되자 독자 노선을 걸었던 급진주의자들이었다. 종교개혁 좌파 가운데 대항 공론장의 역할로 소개할 수 있는 그룹은 이른바 ‘재세례파(Anabaptist)’라고 불리는 집단이다. 이들은 19세기에 일어난 혁명 운동들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된다. 더욱 철저한 복음적 정신과 실천을 강조했던 이들은 자신들이 가졌던 종교개혁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가톨릭교회와 종교개혁 세력 모두에게 이단으로 몰렸다. 이들은 교회를 혁명적 방식으로 변화시키고자 하였다. 기존의 제도 중심의 교회는 이미 교회가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에 혁명이 아니고서는 변화시킬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이들은 비록 소수파였지만 공동체 운동의 역사에서 볼 때 많은 의미가 있다. 우선 이들은 유럽에서 이루지 못한 자신들의 이상을 미국과 캐나다에서 펼치고자 했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공동체 사상을 전파하였다. 미국과 캐나다에서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공동체적 사상과 실천들은 모두 이들에게서 출발하였다.

그리스도교 역사 안에서 이러한 대항 공론장의 역할을 했던 수도원 운동이나, 재세례파 등의 도전을 거치면서 가톨릭교회가 현존할 수 있었던 것은 중앙집권적 요소가 강하게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수도원 운동이 제도 안의 쇄신운동으로 흡수된 사례라고 한다면, 재세례파 운동은 탈교회운동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탈교회운동은 특성상, 탈중심적이고 탈제도적 지향을 갖기 때문에 탈근대적 특성에 부합하는 운동이고, 넓은 지지층을 확보할 수 있는 장점을 지닌다. 하지만 이 지지층은 논리 구조상 탈조직적이기에 지지층의 지지행위 역시 소극적이거나 방관적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이 운동은 특정 시기에 탈중심적이고 탈제도적인 교회론이 강력히 형성된다고 해도, 일정한 흐름 이후에는 기존 교회를 변화시키는 지속성을 갖지 못하고, 약화되기 쉽다. 탈교회적 성격이 강한 ‘평신도 중심의 천주교사회운동’이 198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 정점을 찍다가 쇠퇴한 데에는 이 운동이 지닌 탈교회적 특성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중앙집권적 교계의 특성과 성직중심주의, 시민사회운동의 성장과 같은 요인들로 인해 교회쇄신을 지향하는 목소리는 갈수록 작아지는 형국이다. 교회쇄신의 주체 형성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교계제도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평신도들의 목소리는 이제 거의 들리지 않는다. 이는 사제와 수도자 중심의 사회참여 활동이 비교적 활발했던 근래의 상황과는 별개의 문제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의 쇄신을 기치로 창간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이하 <지금여기>)의 등장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나아가 탈교회적 천주교사회운동과 정서적으로 가까운 <지금여기>가 추구하는 교회 쇄신의 내용은 무엇인가?

 

2.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의 독자층

<지금여기>가 태동했던 2009년을 전후한 시기는 용산참사와 노무현 대통령 사망, 광우병 쇠고기 파동 등이 연이어 발생하면서 교회의 사회참여 활동도 점차 활발해지는 상황이었다. 이처럼 민감한 사회적 사안에 대해 기존의 교계 언론은 침묵하거나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상황에 반감이 높아 가던 상황에서 <지금여기>의 등장은 교계 안팎으로 주목을 받을 수 있었다. 복음과는 거리가 먼 당시의 상황이었지만, 이를 보도하는 <지금여기>의 목소리는 오히려 교계의 지원 없이 탄생한 독립 언론이 자리를 잡아가는 데 큰 힘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앞서도 언급했듯이 이 당시 천주교 사회운동은 사제와 수도자가 주도하는 운동적 특성으로 인해 사회를 향한 교회의 목소리는 높았지만, 교회를 향한 쇄신의 목소리는 미약했다. 교회 쇄신의 관점에서 본다면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다. 과거 1970-80년대 교회의 사회 참여 활동을 둘러싼 갈등이 주로 교회 제도권과 비제도권으로 대표되는 갈등 양상(주1)이었다면 오늘날은 제도, 비제도권 구분 없이 사제와 수도자들이 주도하면서 평신도들은 수동적 협력자의 역할에 머물거나 오히려 사제, 수도자들의 활동을 발목 잡는 형국이다. 교회의 사회참여 활동에 사제, 수도자 그룹이 두드러지는 현상은 동전의 양면처럼 진보적 평신도 운동의 퇴조, 신자 구성의 중상층화, 보수화 현상과 맞물려 있다. 이러한 흐름에 대해 박영대는 2010년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교회쇄신을 위해서는 평신도 중심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한 사제가 의미 있는 문제제기를 했다. “지금 성당에서 주로 활동하는 사람은 대부분 먹고 살 만한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은 대부분 조중동을 보고 한나라당 당원이다. 이들 중심으로 성당이 움직인다면, 천주교가 앞으로 어떻게 되겠느냐?” 옳은 지적이다. 이제 평신도 중심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단순한 주장은 옳지 않다. 그렇다면 교회쇄신의 필요를 더욱 절박하게 느끼는 요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사제, 수도자, 평신도 구분을 넘어서는 진보신앙네트워크가 필요하다. 하지만 어찌할 것인가? 아직도 진보 사제들은 자꾸 사제들끼리만 뭘 하려고 하니. 평신도로서 아쉽고 섭섭하고 걱정스럽다.(주2)

이런 신자들의 태도에 문제의식을 느낀 한국 가톨릭교회는 2011년 주교회의 차원에서 사회교리 주간을 선포하며, 교회 전통 안에서 세상 문제에 대한 관심을 놓치지 않았다는 것을 주지시키고 강조해 왔다. 나아가 교구마다 정의평화위원회를 중심으로 사회교리 학교를 개설해 의식 전환을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서울대교구의 사회교리학교가 1995년 시작되었고, 2000년대 들어서면서 대부분의 교구가 사회교리의 확산을 위해 애를 쓰고 있지만, 이러한 노력에 대한 대체적 평가는 ‘들을 사람은 얼추 다 들었다’ 정도로 정리되는 듯하다. 문제는 들을 사람들은 대체로 다 들었음에도 구체적인 변화나 실천으로 이어지는 것을 체감하기는 어렵고, 사회교리학교를 통해 양성된 평신도 그룹도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실정이다. 평신도 중심의 천주교사회운동 침체, 사회교리 확산 노력이 정체된 상황은 평신도 양성에 대한 관점의 부재에서 비롯된 측면이 강하다. 이 상황은 <지금여기>의 후원자 정체 혹은 감소 현상에도 일정한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주체 형성의 관점에서 볼 때 새로운 천주교 사회운동은 사회교리의 세례를 받은 양성된 평신도 그룹 중심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본다. 이 그룹들이 확장될수록 <지금여기>의 독자층도 확장될 터인데, 독자층의 확장을 위한 <지금여기>의 복안은 무엇이어야 할까?

 

3.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의 비전에 대하여

내년 창간 10주년을 앞두고 <지금여기>는 두 영역에서 10주년을 준비 중이다. 첫째로 지속 가능한 독립언론의 길을 가기 위한 재정 강화 방안 마련이다. 창간 이후 2년에 한 번꼴로 사무공간을 옮기는 형편이고, 최근 몇 년간 후원자는 감소추세이다 보니 재정 강화를 위한 특단의 대책이 절실한 상황이다. 창간 당시 상근 기자 1명에서 많게는 6명까지 늘었다가 현재는 4명으로 편집국을 꾸려 가고 있다. 초창기에 비해 기자 수가 늘고, 후원자도 비약적으로 늘어난 것은 맞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 초기 멤버인 취재팀장을 제외하면 다른 기자들의 근속연수는 3년 미만이고, 이직률도 비교적 높은 편에 속한다. 역사는 10년이지만, 저널리즘과 대안 언론으로의 노하우는 3년이 채 안 된 신생 언론사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이에 대한 원인으로 취약한 재정 여건을 꼽을 수도 있겠지만, 논자의 견해로는 교회 언론 운동으로의 <지금여기>가 지향하는 비전과 기자 개개인의 비전이 얼마나 유기적으로 통합되었는가와 관련이 깊어 보인다. 10주년 준비를 위한 두 번째 영역은 창간 정신에 더욱 충실한 언론이 되기 위해 진행하는 저널리즘 공개세미나다. 달리 말하면 2019년의 교회와 사회 상황에 걸맞은 <지금여기>의 비전 찾기로 표현할 수 있겠다. 사실 이 둘은 한 가지 사안에 대한 다른 표현이다.

과연 <지금여기>는 가톨릭교회의 대안 언론으로 쇄신을 위해 어떤 대안 담론을 추구하는가? 문제는 쇄신을 통해 궁극적으로 <지금여기>가 지향하는 교회의 모습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소공동체 사목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소공동체들로 엮어진 교회공동체인가, 아니면 외국 교구에서 제시한 이상적 공동체의 요소를 충족하는 교회공동체인가? 물론 전문 연구집단이 아니기에 <지금여기>에 대안적 교회 모델을 구체적으로 요구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 그렇더라도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제시한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교회’라는 기본적 방향성만 지닌 채 복잡다단한 오늘날의 상황에서 대안을 모색하는 일은 난망한 일이다. 아래 표는 우리신학연구소가 평신도 중심의 신학운동을 통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에 관해 연구소 구성원들과 논의 과정을 거쳐 정한 핵심 연구 과제 목록이다. 목록을 작성하고 시간이 많이 지나서 몇몇 세부 주제들에 대해서는 업데이트가 필요하지만, 연구소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연구자들의 주된 관심사를 토대로 정한 연구 의제이다 보니 개인적으로도 애착이 가는 주제들이 많다. 기자의 개인적 관심사인데, <지금여기>가 추구하는 저널리즘의 의제와도 연결된다면 그 기사는 분명 한 걸음 더 들어간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지금여기>가 말 그대로 지금 여기의 한국 사회와 교회 안에서 교회의 쇄신과 관련해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논의를 촉발할 이슈의 목록들은 무엇일지 목록화하는 작업은 꼭 필요하다.

<우리신학연구소의 연구 어젠다 목록(2012년 작성)>

이 이슈 목록을 편의상 <지금여기> 저널리즘의 ‘어젠다’라고 해 보자. 통상적으로 정책학 분야에서 다뤄지는 어젠다는 일반적으로 어떤 문제나 이슈가 공공의 혹은 정책 결정자들의 관심을 촉발해 공공정책의 형성을 위해 논의될 수 있는 상태에 놓일 때 그 문제나 이슈가 어젠다에 위치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저널리즘의 어젠다라는 의미는 <지금여기>가 취재와 보도를 통해 교회 안에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논의될 수 있는 상태에 있는 문제나 이슈의 목록을 말한다. 가령 현재 상황에서 교회의 관심 밖 영역이지만 사회적으로는 이슈인 주제이고, <지금여기> 저널리즘의 어젠다 목록에 있다면 <지금여기>는 이 문제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이 어젠다의 중요도와 우선순위를 정하는 과정은 이슈를 둘러싼 이해집단(교회내 진보/보수, 성직자/평신도, 남성/여성, 성인/청소년, 교황청/지역교회, 교구/본당, 교회/사회, 예언 전승/왕조 전승, 고용인/피고용인 등) 사이의 정치적 성격이 강한 과정이다. 이렇기 때문에 논의되는 이슈에는 이해당사자의 의도가 포함되어 있고 그 해결방법의 실마리가 숨어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슈를 어젠다화하는 과정은 이해 집단들 사이의 갈등과정이며, 그 과정에서 타협, 흥정, 조정이 이뤄지는 정치적 과정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런 이슈화 과정은 교회내 이해 당사자들 사이의 권력관계를 반영해 준다. 곧, 이슈로 등장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 최종적으로 채택되는 해결방안은 문제를 정의하는 집단들 사이의 세력 관계가 반영된 일종의 타협안이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볼 때, 정치적 힘이 강한 그룹의 이익은 많이 반영되고 힘이 약한 그룹의 이익은 조금 반영되거나 무시되어 버리기도 한다. 이런 이유로 이슈는 처음 정의한 대로 남아 있지 않고, 재정의되어 가는 역동적 상황 속에서 여러 가지의 하위 이슈들로 구체화되거나 다양화하는데, <지금여기>의 어젠다들을 교회 내 공공의 영역에 포함시키기 위한 공론화 노력이 다양한 형식의 기사와 칼럼, 사설 등의 형식으로 나와야 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교회의 쇄신을 지향하는 교회내 쇄신그룹, 운동 주체에 관한 이야기가 필요할 듯하다. 글의 서두에서도 말했듯이 탈교회적 성격이 강한 ‘평신도 중심의 천주교사회운동’, 교계제도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평신도들의 목소리는 이제 거의 들리지 않는다. 과거 교회 NGO 중심의 단체(비공인 단체)가 주도해서 열었던 활성가 양성과 연대를 목적으로 하는 이른바 ‘활성가 연수회’는 이제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주관으로 개최하는 전국의 ‘교구 정의평화위원회 활동가 연수’로 이름이 바뀌었다. 쇄신의 의지가 교계제도 내로 흡수되었던 수도원 운동처럼 공식기구인 정평위 중심의 교회쇄신 관련 활동은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향후 탈교회적 성격의 평신도 운동이 재등장하기는 어려워 보이는 상황에서 <지금여기>는 어떻게 교회쇄신의 이슈들을 어젠다화 할 것인가? 이 질문은 똑같이 우리신학연구소나, 교구별 정의평화위원회를 비롯해 천주교 사회운동 그룹들에 물어도 여전히 유의미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4.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의 영성에 대하여

말이 나온 김에 오늘은 <지금여기>에 약이 되는 이야기 하나 더 하고 싶다. <지금여기>의 구성원들이 천주교 사회운동 그룹과 정서적 친밀감이 높다는 전제로 영성에 대한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해 볼까 한다. 익히 알고 있듯이 사회운동을 하다 보면 마음의 상처가 많아지기 마련이다. 치유할 책무가 늘 앞을 다투는 것처럼, 기자들도 찾아야 할 현장과 써야 할 기사는 늘 산적해 있을 터이다. 남을 위한 치유에는 시간과 공간을 마련하면서도 정작 자신을 치유해 줄 시간과 공간, 사람이 없다는 게 사회운동에 투신하는 이들의 어려움인데, <지금여기>의 구성원들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교회의 쇄신을 위해 소통이 필요하다고 신문사 소개 페이지의 제일 상단에 적어 놓았지만, 정작 함께 일하는 이들 사이에서 주고받는 마음의 상처는 매번 덧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매년 열리는 천주교활동가 연수(지금의 ‘정의평화활동가 연수’)나 송년 모임에 <지금여기> 구성원들이 참가를 목적으로 다른 활동가들과 관계를 맺고 취재도 겸했던 것은 비전 모색과 영적 갈증을 해소하는데 이러한 만남이 도움이 된다는 판단이 있어서라고 생각한다.

천주교 사회운동에 마음가짐, 영성에 관한 논의가 나타난 것은 오래된 일이지만 운동가 개인의 성화(聖化)에 방점을 두기보다 천주교 사회운동이 신자 대중 안에 파고들기 위해 방법적으로 채택된 구호였다. 영성이란 말은 독실한 신심이나 신학적 언어 구사력과 상관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 한 축으로서의 신학적 관심은 우리신학연구소와 같이 신학의 대중화를 지향하는 평신도 연구그룹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신학은 영성과 관련이 깊으면서도 꼭 같은 것은 아니었다. 일상을 돌보는 신앙이 사회로 확장될 때, 사회의 성화는 시작된다. 운동가의 성화가 곧 사회운동을 거룩한 신앙운동으로 발전시킬 수 있듯이, <지금여기> 구성원들의 성화는 기사와 칼럼을 통해 우러나는 <지금여기>만의 독특한 향기로 피어난다. 지난 2차 저널리즘 세미나에서 <한겨레> 조현 기자가 쇄신과 대안을 이야기하다 보면 거칠고 아픈 이야기들이 많은데 따뜻한 이야기, 아름다운 이야기 꼭지가 고정적으로 있으면 좋겠다는 제안은 이를 염두에 두고 한 제안이 아니었을까 싶다. 나아가 기자 개인의 종교성(영성)은 앞서 논한 교회쇄신의 어젠다와 어느 지점에서 연결되고 구분되는지 이번 세미나를 계기로 접점을 찾는 계기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

 

5. 나가며

두 가지 의견을 제출하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하나는 앞서도 이야기했던 <지금여기> 저널리즘의 어젠다를 목록화 하는 작업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독자층을 발굴하기 위한 고민이 10주년을 계기로 깊어지면 좋겠다. 교회에 약이 되고 세상에 밥이 되는 <지금여기>의 목소리가 더 깊어지고, 넓어지기 위해서 말이다. 헌데 이 저널리즘의 어젠다 목록 작업은 <지금여기>가 저널리즘을 통해 추구하는 교회상을 구현할 주체들을 만들어가는 과정과 긴밀히 연결되어야 한다. 종합일간지나 인터넷 신문사들이 다양한 강좌 형식의 학교를 운영하고, 특강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마련하는 것은 해당 언론이 추구하는 저널리즘의 어젠다를 확장하고, 언론사의 든든한 지원자 그룹을 만들어가기 위한 적극적인 저널리즘 운동의 일환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여기>가 10주년을 맞아 준비하는 재정강화와 명료한 저널리즘에 대한 고민은 이에 대한 고민을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해법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실질적인 10주년 준비와 도약를 위해 활발하게 토론하고 지혜를 모을 시간이다.

주1. 제도권과 비제도권의 갈등은 한국천주교회의 공식 승인을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를 둘러싸고 이른바 ‘공인-비공인’ 논쟁으로 불거졌다. 이는 1989년 문규현 신부의 방북을 계기로 공식화되고 가열되었는데 당시 주교단은 교회법 제300조와 312조를 들어 주교단의 공식 승인을 받지 않은,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비롯하여 몇몇 평신도 단체들은 ‘가톨릭’ 또는 ‘천주교’라는 용어를 단체이름에 쓸 수 없다고 몇 번이나 강조하고 나섰다. 당시 주교단이 문제 삼은 ‘비공인’ 단체는 신심, 친목 단체가 아니라, 사회정의를 위해 투신하고 있는 단체가 대부분이었다. 문정현, “제도교회를 비추는 거울 : 한국천주교회의 공인 – 비공인 논쟁에 대한 성찰”, <공동선> 통권 제11호, 1995. 참조.

주2. 박영대, “요즘 성당에서 수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2010.9.17.

(오른쪽) 김지환 전 편집위원장이 토론하고 있다. ⓒ달군

토론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가톨릭시민주의의 방주 또는 보루

김지환(파블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전 편집위원장

 

1. 지난 10년+α 힘겨운 역사에 대한 회고

<지금여기>는 2007년 이명박의 대통령으로 당선, 반동의 시기를 눈앞에 둔 시점에서 태동했다. 이전부터 많은 이가 가톨릭 대안 언론의 필요성을 논의했고, 과연 가능할지 설왕설래했다. 예수살이공동체에서는 가톨릭 대안 언론에 대한 심포지엄이 있었고, 이후 그다지 많은 시간이 지나지 않아 <지금여기>는 다음 카페에서 첫걸음을 했다. ‘지금여기’란 이름을 짓고, 상근자는 편집국장 하나에 외인부대 같은 객원 기자 겸 편집위원이 의기투합해 이끌어 갔다. 우리가 갈 길이 가톨릭 오마이뉴스냐 가톨릭 프레시안이냐는 논의를 비롯해 과연 우리의 독자는 어디에 있을까까지 치열한 논의가 있었다. 어떤 때는 맨땅에 헤딩하는 심경으로 접근할 때도 있고,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그러면서 과연 얼마나 갈까 조마조마할 때도 있었지만, 정식으로 문을 연 지 이제 10년을 바라본다.

지난 두 차례의 저널리즘 세미나는 <지금여기>의 방향성과 가톨릭 저널리즘을 짚어 보는 매우 의미 있는 자리였다. 매우 정교하고 깊은 고민이 담긴 발표자의 논의에 비해 다소 거칠고 무식한 발상에서 경험주의적 오류에 빠질 가능성이 높은 토론문이라는 점에 양해를 먼저 구한다. 사실 그러한 아량을 기대하기에 이 토론에 응했다. 그럼에도 <지금여기>의 미래를 향한 중요한 실마리를 이끌어내는 데 작은 기여를 했으면 바란다.

 

2.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의 태동과 존재 이유를 다시 묻는다

발표문을 잘 읽었다 오늘 발표는 발표자가 말했듯이 “2019년의 교회와 사회 상황에 걸맞은 <지금여기>의 비전 찾기”로 요약된다. 먼저 경동현 박사는 “대항 공론장은 주류 공론장에 저항하는 개념으로, 상대적으로 사회적으로 무시되거나 소외된 계층과 그 담론들을 끌어내고 재생산하는 공간으로 정의될 수 있다”며, 한국사회와 교회의 현실 안에서 공공성 회복을 위한 방안을 논할 때 대항공론장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했다. 가톨릭의 역사에서 수도원 운동이 대항 공론장 역할을 수행하면서 공동체적 이상을 계승했으나 교회 전체를 변화하는 데 역부족이었다고 한다. 토론자는 여기서 Catholic이 아닌 catholics로서 가톨릭 교회를 이야기하고 싶다. 교회 안의 풍성하고 다양한 전통으로서 catholics가 Catholic을 지탱시켜 왔다고 믿는다. 일종의 소금의 역할이랄까. 교회가 세상의 소금이 되지는 못했지만, 수도원 운동을 비롯한 전통은 교회 안의 충분한 소금이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지금여기>의 존재 이유는 제도 안에서 싸움, 제도 안에서 ‘목소리 없는 자의 목소리’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경 박사가 말했듯이 ‘대항 공론장’에 대한 갈망으로 <지금여기>는 태어났다. 기존 가톨릭 언론이 제도교회의 기관지 역할로 전락한 현실에서, 교회의 쇄신과 개혁을 갈망하는 가톨릭 제 세력은 자신의 목소리를 대변해 주는 일종의 ‘대항 기관지’를 갈망한 면도 있다. 오늘 발표에서 핵심적으로 거론되는 공론장에 대한 획기적 이론을 내놓은 하버마스가 제기한 ‘모더니티 프로젝트’라는 관점에서 <지금여기>를 생각해 본다. 토론자는 여전히 봉건적 틀에 갇힌 가톨릭 교회에서는 요원해 보이지만, 가톨릭 시민주의의 방주 또는 보루의 역할을 대전제로 상정하고 싶기 때문이다.

 

3. <가톨릭뉴스 지금여기>는 언론인가, 가톨릭 운동의 연속인가?

그 통합의 지점을 찾아서

경 박사는 발표를 통해 <지금여기>에서 수차례 논의되었던 <지금여기>의 성격(언론인가, 운동의 연속 또는 구심인가)에 대한 긴장관계를 깊게 고민해 왔음을 잘 알 수 있다. 초창기에는 대안언론 또는 독립언론이라는 명칭을 썼지만, 이제는 가톨릭 언론이라고 칭한다.

경 박사는 “교회 언론 운동으로의 <지금여기>가 지향하는 비전과 기자 개개인의 비전이 얼마나 유기적으로 통합되었는가와 관련이 깊어 보인다”고 했고, “한국 사회와 교회 안에서 교회의 쇄신과 관련해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논의를 촉발할 이슈의 목록들은 무엇일지 목록화 하는 작업”의 필요성을 이야기한다. 아울러 “<지금여기>의 어젠다들을 교회 내 공공의 영역에 포함시키기 위한 공론화 노력이 다양한 형식의 기사와 칼럼, 사설 등의 형식으로 나와야” 한다고 말하며, “향후 탈교회적 성격의 평신도 운동이 재등장하기는 어려워 보이는 상황에서 <지금여기>는 어떻게 교회쇄신의 이슈들을 어젠다화 할 것인가?” 묻는다. 이런 부분은 오늘 여기 오신 청중과 함께 고민해 봐야 할 중요한 문제라 생각하며, 이 자리에서 같이 이야기해 보자.

<지금여기>는 창간 이래 제도교회의 감시자 역할을 해 왔다. 교회 기관에서 일하는 한 지인은 교회에서는 <지금여기>를 본다고 했으며, 어떤 부분에서는 사실 확인이 정확하지 않았다는 지적도 해 주었다. 확실히 교회 입장을 그냥 받아쓰던 기관지 언론만 있는 상황에서 <지금여기>는 매우 긍정적인 기능을 했다. 이는 알게 모르게 제도교회의 언론에도 영향을 끼쳤으리라 생각한다.

<지금여기>는 그동안 지난한 성장통을 겪으면서 이제 교회 언론의 한 축으로 성장했다. 이처럼 언론으로서 틀을 다부지게 갖추었지만, 일부에서는 예전만큼 우리의 목소리를 담아내지 못한다는 불만도 있다. 얼마 전에는 한 지인에게서 <지금여기>가 교회 안의 아주 중요한 사안을 그냥 넘겼다는 소리를 들었다. <지금여기>라면 꼭 다루었으리라 믿었던 내용을 간과함으로써, 뉴스 가치 선정에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는 것이다. 그 아이템은 <가톨릭 프레스>에서는 잘 다루었다. 이런 사례는 몇 건 더 있는데, 혹자는 <지금여기>가 제도교회의 눈치를 보는 게 아닌가 의혹을 제기하기도 한다. 사실 참으로 어려운 문제다. 이런 불만은 정당할 수 있으나, 편집국의 여러 상황과 뉴스가치와 아이템 선정 기준 등을 고려할 때 분명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지금여기>는 매우 복잡하고 특수한 이해관계에서 태어났다. 여기서 “작은 것이 아름답다”에서 슈마허가 말한 ‘적정 기술’을 차용해 ‘적정 언론’이라는 표현을 써 보겠다. <지금여기>는 교회라는 세계에서 감시견 역할을 하는 언론 본연의 기능은 물론 가톨릭 제 운동의 구심으로서 앞서 말한 대항 기관지 성격 등 수많은 욕구를 최적화해야 하는 ‘적정 언론’이기 때문에, 많은 어려움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예전에 토론자의 집에서 집들이 겸 편집회의를 한 적이 있다. 용산참사가 있던 해였는데, 그 자리에서 <지금여기>와 영향력 있는 교회 운동 단체와 가벼운 충돌이랄까 갈등관계를 이야기했다. <지금여기>가 대항 기관지적 욕구가 스며 있다 해도 언론 본연의 기능을 고려할 때, 제도교회는 물론이건 <지금여기>를 지지하는 제 단체 또한 성역이 될 수는 없는 법이다. 토론자는 분명 <지금여기>의 생명력과 존재 근거는 당파성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또 어떻게 언론으로서 공정성을 담보할 것인가? 이 지점은 <지금여기>가 풀어가야 할 매우 중요한 과제라 생각하는데, 경 박사가 발표한 <지금여기>의 비전과 저널리즘 의제 설정도 맥을 같이한다고 생각한다. 편집위원회는 편집국과 함께 이런 문제를 같이 풀어 보자는 차원에서 존재하지만, 현재 동력을 많이 상실했다.

언론을 어떻게 볼 것인가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정말 사람마다 제각각이다. 토론자는 <지금여기>를 ‘적정 언론’으로 상정하고, 충분히 당파적 성격을 갖기 바란다. 여러 운동 단체가 <지금여기>가 당파성을 띠기를 바랄 것이라 생각한다. 여러 운동 단체는 <지금여기>가 자신의 요구를 충분히 수용하지 못한다고 불만을 가질 수 있다. 여기에는 편집국의 방향성이나 기자 수의 부족 등 역량의 한계를 따져 봐야 한다. 한편 제 운동 단체의 게으름도 생각해 봐야 한다. 어떤 사안에 대한 취재 요청도 있겠으나 칼럼을 비롯한 기고글을 통해 목소리를 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언론과 운동의 긴장관계이든 통합의 관점이든 이 문제는 끊임없이 제기될 것이라 본다. 이와 관련해 편집국은 데스크 칼럼 등을 통해 <지금여기>가 지향하는 방향을 선명하게 드러낼 필요가 있다.

분명 <지금여기>는 존재 이유와 전체 방향을 검토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이를 위해 세심하게 <지금여기>의 후원 구조와 우리의 독자가 누구인지 살펴보는 일이 중요하겠다. 이는 독자를 위해서도 매우 필요한 사안이다.

 

4. 그렇다면 우리의 독자는 누구인가?

경 박사는 2009년을 전후로 용산참사를 비롯한 사회적 사안 속에서 <지금여기>가 교계 안팎에서 주목을 받았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경 박사가 말했듯이 “<지금여기>의 목소리는 오히려 교계의 지원 없이 탄생한 독립 언론이 자리를 잡아가는 데 큰 힘”이 되었다. 그때 <지금여기>의 후원자도 큰 폭으로 늘었다.

<지금여기> 초창기부터 독자를 찾는 것은 중요한 문제였다. <지금여기>가 만들어진 이후 조금씩 독자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지금여기>에 참여한 비교적 응집력 있던 제 세력이 제1독자일 텐데, 곳곳에 제도교회에 신음하면서 고립감을 느끼다가 ‘물 만난 물고기’처럼 <지금여기>의 탄생을 기뻐했던 독자를 만날 수 있었다. 초기의 독자는 교회쇄신을 갈망했던 수많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거기에 일부 진보적인 개신교 형제자매들도 있는 듯한데, 이는 좀 더 면밀하게 살펴봐야 한다.

최근에는 <지금여기>의 후원자가 급감하고 있다. 경 박사는 이렇게 평가한다. “평신도 중심의 천주교사회운동 침체, 사회교리 확산 노력이 정체된 상황은 평신도 양성에 대한 관점의 부재에서 비롯된 측면이 강하다. 이 상황은 <지금여기>의 후원자 정체 혹은 감소 현상에도 일정한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주체 형성의 관점에서 볼 때 새로운 천주교 사회운동은 사회교리의 세례를 받은 양성된 평신도 그룹 중심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본다. 이 그룹들이 확장될수록 <지금여기>의 독자층도 확장될 터인데, 독자층의 확장을 위한 <지금여기>의 복안은 무엇이어야 할까?” 이 또한 어려운 문제다.

정말 <지금여기>의 방향성 때문에 독자가 감소하는지, 다른 요인 때문에 감소하는지 토론자는 잘 모르겠다. <지금여기>에서 후원 독자 관리를 제대로 하는지, 홍보를 적극적으로 하는지 같은 지엽적인 문제에서 근원적인 문제까지 다각적으로 검토해야 하는데, 이는 이미 운영위원들이 열심히 하리라 생각한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아직도 가톨릭 교회 안에서 <지금여기>를 모르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다. 편집국, 편집위원회, 운영위원회, 열성 독자 등 <지금여기>를 함께 이끌어 가는 각 주체들은 ‘숨은 독자’를 더 찾아야 한다.

토론자는 개인적으로 <지금여기> 콘텐츠를 퍼트리는 몇 가지 시도를 해 봤다. 페이스북에 올라온 기사를 교회, 환경, 기본소득, 베트남 등 항목에 따라 관련 페이스북 그룹에 공유하는 것이다. 열성 독자를 잘 조직해 이런 방식으로 <지금여기>의 콘텐츠를 널리 퍼뜨려 보면 어떨까 생각해 봤다(지금은 YTN으로 복귀한 노종면 앵커가 국민티비에서 일할 때, 한 토론장에서 강조한 내용이기도 하다). 그런데 SNS는 허수라며, 등한시하는 소리도 들었고 사실 편집위원조차 자기 페이스북에 기사를 올리거나 하지 않는다.(어쩌다 자기가 썼거나 하는 글만 올린다) SNS 기반 홍보전략이 얼마만큼 후원독자를 늘리는 데 기여할지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여기>라는 존재를 널리 알리는 데는 유용하며, 장기적으로 후원독자를 늘리는 데도 긍정적으로 작용하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작은 제안을 해 본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이신 분들부터 <지금여기>의 콘텐츠를 알리는 홍보대사가 되어 주시면 어떨지.

 

5. 조직된 가톨릭 시민주의의 보루

<지금여기>가 당면한 과제는 산적해 있고, 여전히 성장통을 겪는 중이다. 수많은 이해관계와 요구 속에서 어떻게 자리매김할지 고심 중이다. 사실 한 언론이 자리잡는 데 10년이란 시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다. <지금여기>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나 수많은 사람의 요청은 분명 <지금여기>의 자양분이 되리라 믿는다. 수많은 난제를 어떻게 지혜롭게 풀어갈지 실마리를 찾기 위해 이렇게 ‘가톨릭저널리즘’ 세미나를 여는 것이겠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등장은 분명 가톨릭 교회에 희망이었다. 하지만 많은 이는 프란치스코 교황을 자기 식대로 전유한다. 그러다 보니 많은 모순도 발생했다고 생각한다. 이전 교황에는 반교황주의적 견해를 가졌던 이가 어느새 교황주의자로 변하기도 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등장했다고 교회의 적폐가 일순간 사라지지 않는다. 한국교회를 돌아보라. 좀 심하게 말하면 반동적 작가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 담임이 바뀌자 그때야 자기 목소리를 내는 수동적인 아이들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개혁을 향한 중요한 이정표를 제시하지만, 결정적인 개혁의 주체는 교회의 모든 성원이다. 여기에 가톨릭 시민의 탄생과 시민적 각성이 절실하다고 말하고 싶다.

<지금여기>는 아직도 요원한 가톨릭 시민주의의 ‘공론장’으로 작동해야 하며, 그람시가 말했던 가톨릭의 ‘유기적 지식인’이 적극적으로 교회 쇄신을 이끌어가는 중요한 ‘진지’가 되어야 한다. 아직 많이 부족하고 갈 길이 멀지만 <지금여기>는 그 시작이다.

오늘 발표문도 그렇지만, 여기저기서 <지금여기>에 대한 아쉬움의 소리를 많이 듣는다. 토론자도 많이 아쉽고 불만스럽다. 그럼에도 가톨릭의 건강한 미래를 생각하는 이라면, <지금여기>에 더 많은 애정과 힘을 쏟아야 한다. 지난 10여 년간 <지금여기>에 쏟은 여러 자원 그중 축적된 경험과 콘텐츠는 이미 우리의 소중한 자산이다. 약간의 불만이 힘겹게 쌓아온 자산을 외면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생방송 동영상 1부 : https://www.facebook.com/catholicnewshan/videos/356583964916094/

생방송 동영상 2부 : https://www.facebook.com/catholicnewshan/videos/286782815299691/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10주년 맞이 저널리즘 공개 세미나의 다음 일정은 아래와 같습니다. 많은 분의 관심과 참여를 기다립니다.

4회 2019년 1월 23일(수) 저녁 7시
- 정현진 (취재팀장)

5회 2019년 3월 23일(토) 3시 대중강연과 10주년 기념미사
- 강연자 : 김지영 (전 <경향신문> 편집인, 전 가톨릭언론인협의회장)
- 주제: 저널리즘과 가톨릭 언론의 미래(가제)

1-4회 장소 : 서울시 종로구 계동2길 26 2층 씨알재단
5회 장소 : 추후 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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