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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죽박죽 어수선한 오늘이지만, 모든 것이 아름답다![살아 있는 노래랑 아이들이랑 - 4]

"엄마, 가을은 언제 끝나? 빨리 겨울이 오면 좋겠다."

다울이가 이토록 겨울을 기다리는 까닭은 뭘까? 바로 일하는 게 힘들어서다. 한동안(요 며칠은 더욱) 가을걷이 정점에 다다라 다울이까지 최전선에서 활약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게 아주 죽을 맛인 모양이다. 도서관에서 빌려다 놓은 책을 얼른 읽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인데 다울이의 천적이라고 할 수 있는 다울 아빠가 쉴 틈 없이 다울이를 불러 대니 말이다.

"다울아, 고구마 손질해라!"

"다 했으면 울타리콩 따서 까라."

"다울아, 땅콩 따자!"

"이리 와서 완두콩 심어라!"

"다울아, 굼벵이 잡아다 닭 갖다 줘라."

....

그렇다. 다울이마저 이렇게나 바쁜 '전력질주'의 시간이다. 나 또한 애들 낮잠 잘 때 갖는 나만의 달콤한 휴식마저 반납하고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다. 고구마 줄기, 피마자 잎, 고춧잎 같은 거 데쳐서 말리고, 탱자 따서 씻고 썰어서 설탕에 재워 두고, 호박 썰어서 말리고, 아침저녁으로 이것저것 널고 거두고, 따 놓은 감 손질하고, 개밥 끓여서 주고, 땅콩 캐고, 고구마 분류해서 쟁이고, 시래기 삶고, 그러는 틈틈이 밥 준비하고, 빨래 널고, 간식거리 만들고.... 정말이지 눈 뜨는 게 무서울 정도로 일거리가 한꺼번에 쏟아져 있어서 뭐부터 해야 할지 치밀한 계산을 하고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된다. 더 급한 일 덜 급한 일 나누어서 더 급한 일부터 차근차근 해 나가야 하고, 더구나 나 혼자 힘으로는 어림도 없다. 다울이는 물론 다랑이 다나한테까지 도와 달라고 손을 내민다. (솔직히 손을 내민다기보다 훅 맡겨 버리는 수준이다. 안 바쁠 땐 못 미더워서라도 '내가 하고 말지' 하는데 바쁘니까 할 수 없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눈 질끈 감고 맡기기!)

"다나야,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콩이랑 팥 좀 주워 줄래? 저쪽에 바가지 있으니까 거기다 넣어."

"다랑아, 바깥 아궁이에 불 좀 봐. 집게 줄 테니까 나무 떨어지면 집어서 넣고 냄비에서 김 나오면 엄마한테 알려 줘!"

그렇게 하루에도 몇 번씩 아이들한테 도움을 청하다가, 문득 이번 가을이 지난해 가을과는 또 사뭇 달라졌다는 걸 알게 됐다. 뭐랄까, 아이들과 나 사이에 '동지애'가 깊어진 느낌이랄까? 일을 같이 해야만 나눌 수 있는 속 깊은 정과 마음의 마주침을 전보다 진하게 경험하고 있달까? 그걸 생생히 느끼게 하는 장면 두 컷!

농번기에 반짝 운영되는 우리집 어린이집. 다나 전담교사 박다랑. ⓒ정청라

장면 1

다울 아빠가 풋팥(덜 여문 팥) 한 바구니를 부엌 바닥에 쏟아 놓고 나갔다. 다울이에게 떨어진 작업 명령은 오늘 내로 이 팥을 다 까라는 것! 다울이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한숨을 푹푹 쉬다가 다랑이한테 도와 달라 소리치고 안 도와준다고 원망하다가 마침내 자포자기 심정으로 팥을 깠다. 안쓰러워서 내가 곁에서 도와주니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엄마랑 까니까 팥 껍질이 금방 수북해졌어. 혼자 할 때보다 힘도 덜 들고...."

"그래, 원래 일은 같이 해야 더 쉽고 재밌어. 그나저나 너 발 저리겠다. 방에 들어가서 좀 쉬어. 그동안 엄마가 하고 있을게."

"그럼 엄마도 쉬어. 나 혼자 쉬면 미안하잖아."

"엄만 괜찮다니까."

"아니야, 엄마 혼자 하면 힘들 텐데.... 근데 엄마! 일을 같이 하니까 엄마랑 나랑 우정이 생긴 것 같지 않아?"

정말 그렇다. 우린 작업 지시자인 다울 아빠 뒷담화도 곁들여 가며 우정을 나누고 있다.

 

장면 2

한낮에 감 따기 대작전이 펼쳐졌다. 다울 아빠가 감나무 위로 올라가서 감을 따고 다울이와 내가 나락망을 펼쳐 들고 감을 받는다. 그러면 다랑이가 감을 수레에 담고, 다나는 곁에서 노래를 부르며 흥을 돋운다. 이게 전체 그림인데, 처음엔 순조롭지 않았다. 다나가 홍시를 하나 주워 먹으니까 다랑이도 홍시 먹느라 자기 역할을 못 하는 게 아닌가. 감이 떨어지면 받고 옮기고가 민첩하게 진행되어야 하는데 그게 안 되니 망에 감이 쌓이고, 다울이가 감을 옮긴다며 자리를 비운 사이 감이 철퍽 땅바닥에 떨어지고.... 그런 식으로 삐그덕삐그덕 말썽투성이었다.

"다랭아, 너 홍시 그만 먹고 감 옮겨!"

"다나야, 너는 엄마 옆에 있으면 위험하니까 저쪽 옆으로 떨어져 있어."

"다울아, 너는 자리 네 자리 잘 지켜라. 감이 언제 떨어질지 모르니까 정신 똑바로 차려!"

"상아 씨는 감 떨어뜨릴 때 미리 말 좀 해요. 우리가 준비가 됐을 때 떨어뜨리라고요!"

나는 그렇게 목청껏 소리 지르고, 분위기는 사납고.... 그런데 어느새 손발이 척척 맞아떨어지기 시작했다. 감이 떨어지고 감을 받고 감을 옮기고가 능수능란하고 매끄럽게 진행되는 거다. 심지어 우리들 예상과 달리 엉뚱한 방향으로 떨어진 감까지 받아냈을 때는 다같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와아아~ 와하하하하!"

"우리 진짜 대단하다! 꺄오~~~"

다나도 신이 나서 펄쩍펄쩍 뛰어다녔다. 물론 그러다가 넘어져서 우는 바람에 일단 작업은 거기까지 마쳤지만 화려한 팀플레이의 여운이 상당히 오래 남았다. 그리하여 그날 저녁 다울이가 만든 짧은 노래!(함께 힘든 일을 마치고 나서 부르기 좋은 노래란다.)

"모두들 잘했어. 모두들 고마워. 모두들 사랑해."

일 근육을 키우느라 고군분투 중인 다울이의 만화. ⓒ정청라

글을 쓰며 다시 지나간 순간들을 떠올려 보니 나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번진다. 조금만 먼 발치에서 보면 그토록 분주하고 고단했던 순간순간도 어쩜 이렇게 아름다운지... 사진으로 남은 한 장면이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키듯이 말이다. 나는 어느새 나바호족의 노랫말에 곡조를 붙여 만든 '모든 것이 아름답다'라는 노래를 속으로 흥얼거리고 있다. 오늘도 아름다웠으니 내일도 아름답겠지!

 

모든 것이 아름답다

내 앞에 있는 모든 것이 아름답고

내 뒤에 있는 모든 것이 아름답다

내 아래 있는 모든 것이 아름답고

내 위에 있는 모든 것이 아름답다

내 둘레에 있는 모든 것이 아름답다

 

덤. 올해 처음 혼자서(!) 완두콩을 심어 본 다울이의 말

"엄마, 농사일을 하면 사람이 착해질 수밖에 없겠다."

"왜?"

"씨앗을 심을 때 부드럽게 대하게 되잖아. 흙도 부드럽게 덮어 주고.... 그러니까 마음도 부드러워질 것 같아."

 

정청라

인생의 쓴맛 단맛 모르던 20대에 누가 꿈이 뭐냐고 물으면 '좋은 엄마가 되고 싶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막상 엄마가 되고 1년도 채 안 되어 좋은 엄마는커녕 그냥 엄마 되기도 몹시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고 '좋은 엄마'라는 허상을 내려놓았다. 그 뒤로 쭈욱 내려놓고, 내려놓고, 내려놓기의 연속.... 이제는 살아 있는 노래랑 아이들이랑 살아 있음을 만끽하며 아무런 꿈도 없이 그냥 산다. 아이를 기른다는 것은 '스스로 길이 된다는 것'임을 떠올리며 노래로 길을 내면서 말이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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