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아 캄페시나 김정열, "농업, 농민은 공적 존재"

올해 9월 28일 제네바에서 열린 제39차 유엔인권이사회는 ‘농민과 농촌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권리에 관한 유엔 선언’(이하 유엔 농민권리선언)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 결의안은 제안된 지 17년 만에 통과됐으며, 올해 12월 18일 유엔총회 채택만 남았다.

이날 통과된 결의안은 서문과 28개 조항에서 “농민과 농촌노동자의 정의, 국가의 일반적 의무, 평등, 차별금지, 발전에 대한 권리, 천연자원에 대한 권리, 사법 접근권, 적절한 먹거리에 대한 권리, 종자에 대한 권리, 생물다양성에 대한 권리” 등 농민과 농촌지역민은 누구이며, 이들의 권리는 무엇인지 밝히고 있다.

이 선언문은 전 세계적 소농 중심의 농민단체인 '비아 캄페시나'가 2000년 제안해 17년 만에 열매를 보게 됐다. '비아 캄페시나'는 ‘농민의 길’이라는 뜻으로, 1993년 WTO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서기 위해 시작됐으며, 이번 선언문을 제안하며 “농민들의 권리를 한층 더 지켜 주고, 식량주권, 기후변화와의 싸움, 생물다양성 보호 강화, 농민들의 종자권 보장, 농산물의 적절한 가격 보장과 농업 노동자 권리 보장, 여성농민 권리와 모든 종교, 사회, 정치, 문화적 차별 금지”를 목적으로 삼았다.

“농민과 농촌에 사는 사람들이 전 세계 인류 발전과 생물다양성 보존 및 증진을 위해 공헌해 왔다. 그럼에도 현재 농민과 농촌노동자가 빈곤, 기아, 영양실조, 기후변화로 고통받고 있고, 매년 땅과 공동체에서 강제로 추방당하는 숫자가 늘어나며, 농민과 농촌노동자가 의존해왔던 천연자원 및 자연자원의 지속적 이용이 어려워지며 그들의 기본적 권리행사마저 거부당하고 있다. 농민과 농촌지역민이 위험한 착취조건에 처해 있기 때문에 이 선언문을 제정하고자 한다.”

유엔 농민권리 선언의 의의를 밝힌 서문이다.

선언문은 현재 여러 형태로 농촌에서 사는 농민과 농촌노동자, 지역민이 더 이상 인간다운 삶조차 불가능하다고 진단하고 이를 위해 농민과 농촌노동자의 인권 보호를 더 강화하는 것은 물론, 어머니 대지인 생태계의 자연적 능력을 존중하고 자연과 조화를 이뤄 지속가능한 농업을 실천하려는 농민과 농촌노동자의 노력을 지지한다고 밝힌다.

29일 국회에서 열린 "농민의 권리와 유엔 농민권리선언" 토론회. 이 자리에서 김정열 대표는 농민 권리선언의 의미가 무엇인지 발표했다. ⓒ정현진 기자

현재 세계적 농업 문제의 골자는 농민과 다국적농업기업 간 갈등 그리고 이에 대한 국가의 역할이다. 국제 사회는 이미 지속가능한 개발과 발전은 기아와 빈곤을 해결해야 하며, 이는 곧 농민과 농촌의 권리에 관한 문제라고 인식한다.

국제사회가 유독 일부 집단처럼 보이는 “농민과 농촌지역민”의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고 나선 것은 농민과 농촌지역민의 권리가 단지 그들만의 것이 아니며, 이들의 권리가 모든 인류의 삶과 생명에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를 확인한 것이다.

프랑스 ‘시민을 위한 사회영향연구소’ 보고서 “누가 농민의 몫을 빼앗아 가는가”에 따르면, 전 세계 농업은 아직도 소농에 의존한다. 세계 인구 1/3이 농촌에 살고 있고, 전 세계 25억 명이 농업으로 생계를 잇는다. 그러나 이들을 지배하는 것은 다국적농업기업이다. 신젠타, 아벤티스, 몬샌토, 다우, 바이엘, 듀폰, 바스프 등 7개 기업은 종자와 농화학 분야를 장악하고 있고, 아처, 대니얼스미들랜드, 벙기, 카길, 루이드레퓌스는 전 세계 곡물 무역 90퍼센트를 차지한다. 최근 다국적 유통업체는 농산물 유통까지 쥐고 있다.

다국적 기업에서 각국의 농민과 생산업체, 유통업체, 소비자까지 이르는 현재 흐름은 결국 소농과 농업노동자의 생계 불안, 환경 파괴, 안전하지 못한 먹거리 문제를 일으키고, 생태적으로 환경 오염, 물 부족, 생물 다양성 감소 등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이 되고 있다.

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 봉강분회원이자 현재 '비아 캄페시나' 동남동아시아 지역 대표인 김정열 씨는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와 인터뷰에서 “현재 (전 세계) 농업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초국적 기업으로부터 농민들을 지켜 내는 것과 식량주권”이라며, “이는 농민이라는 집단만의 권리가 아니며, 결국 모든 사람들을 위한 권리”라고 말했다.

그는 “종자와 농토, 물, 그것을 통해 농사를 짓는 농민은 기본적으로 공적 자원”이라며, “권리선언의 의의는 농민의 노동권과 생활권 등 기본적 인권 보장의 문제도 있지만 공적으로 지켜야 할 가치가 무엇인가, 공공자원을 사적 기업이 소유하는 것이 맞는지 다시 묻고 그것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이른바 농업과 농민 가치에 대한 패러다임 전환”이라고 말했다.

전 세계 농민들의 구호. "자유 무역이 농민을 죽인다!" (사진 제공 = 김정열)

김 대표는 29일 ‘농민의 권리와 유엔 농민권리선언’을 주제로 열린 토론회에서 유엔 농민권리선언의 문장이 담고 있는 의미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그는 선언문은 “역사적, 운동적, 철학적으로 중요한 개념들이 국제 사회에서 공식적으로 쓰였다”며, “‘농민’은 하나의 경제 집단이 아닌 ‘역사적 존재’임을 공식화하고, 이들의 권리는 각 농민의 개인적 권리가 아니라 집단적이고 공동체적 이익이라고 확인했다. 또 ‘식량주권’이 농민의 권리임을 인정했다”고 설명했다.

또 선언문은 생태계를 ‘어머니인 지구 또는 어머니 대지’(Mother Earth)라는 영성적 의미로 해석했다며, “지구와 인간, 인간과 땅, 지구 생태계 속에서 농민과 농촌이 갖는 지위와 역할, 중요성으로의 관점까지 확장시킬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유엔 농민권리선언이 비단 농민의 개별적이고 경제적 이익을 넘어선다는 것, 생태계 보전과 이를 통한 모든 이의 권리 보장을 지향하며, 공적가치의 사유화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교회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회칙 ‘찬미받으소서’에는 농민과 농촌, 농업, 먹거리 안전, 생태계 보존에 대한 명확한 현실 지적과 요청이 담겨 있다. 생태적 회심을 요청한다는 면에서 농민권리선언과 ‘찬미받으소서’는 일정부분 맥락을 함께한다.

‘찬미받으소서’에 앞서 교황 바오로 6세는 국제연합 식량농업기구에 “산업문명의 역효과에 따른 생태적 재난”을 경고하고, “가장 뛰어난 과학의 발전, 가장 놀라운 기술 능력, 가장 엄청난 경제 성장은 참다운 사회적, 도덕적 발전과 함께 이뤄지지 않는다면 결국 인간을 대적하게 될 것이며, 인간 행위의 근본적 변화가 긴급하게 필요하다”고 호소한 바 있다.

또 프란치스코 교황은 농업 현실에 대해 ‘찬미받으소서’ 129항에서, 규모의 경제 논리에서 영세농들은 자기 땅을 팔거나 전통적 생산 방식을 포기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며, 영세농들의 다양한 생산방식 개발은 결실을 얻지 못한다면서, “행정당국은 군소 생산업자들과 그들이 생산하는 품종의 다양성을 투명하고 확실하게 지원하는 조치를 취할 의무와 권리가 있다”고 이른다.

그는 종자, 특히 다국적 기업의 종자 소유, 이와 관련된 유전자변형(GMO) 종자에 대해서도 언급하는데, 이는 복잡한 생태계망을 파괴시키며 생산 작물의 다양성을 감소시킨다고 지적하고, “여러 나라에서 곡물 생산과 그 재배에 필요한 여러 상품들의 생산을 독점하는 경향이 증가하고, 번식력 없는 종자가 생산되고 있는 것을 볼 때, 이러한 의존성은 더욱 심각해질 것이며, 결국 농민들은 대규모 생산자에게서 그 종자를 살 수밖에 없게 될 것”이라고 걱정한다.

10월 13일 김정열 대표(가운데)와 비아 캄페시나 회원들은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IMF 연례총회에 맞서 민중대회를 열었다. (사진 제공 = 김정열)

프란치스코 교황이 영세농을 보호하기 위한 행정 당국의 역할을 요청한 것처럼, 김정열 대표 역시 정부의 역할을 강조한다.

그는 농업의 공적 가치를 생각한다면, 자연재해나 기후변화로 생기는 농사 피해도 농민이 개인적으로 책임져야 하는지도 고민이라며, “기본적으로 농민, 농업의 가치를 인정하고 농민이 안정적으로 살아가고 농사를 짓도록 하는 것은 정부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그는 인도네시아는 한국보다 농가소득이 적지만 정부가 종자와 식량주권을 보호하고 있고, 소득의 정도와 농업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은 다른 차원”이라며, “그러나 한국의 종자법을 보면, 자신이 키운 종자를 팔 권리마저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국가가 나서서 농민의 권리 행사를 막는다”고 지적했다.

그는 현재 한국 농민들의 요구는 “농산물 최저가 보장, 밥쌀 수입 중단, 쌀값 1킬로그램당 3000원 보장, 씨앗과 육묘에 대한 권리 보장, 기업의 농업 생산 참여 금지와 경자유전 원칙 확인” 등인데, “농업정책은 패러다임의 변화가 필수적이다. 지원금이나 소득보전, 산업 육성 등이 필요하지만 장기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식량주권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아니”라고 말했다.

김 대표는 “농민 권리를 위한 운동을 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기운이 빠지는 것도 사실”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이번 선언으로 국제사회가 어떤 흐름으로 가고 있는지 알았으면 좋겠다. 분명한 것은 농민만의 권리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살 권리라는 것이다. 이윤을 위해 먹거리를 독점하는 것은 약탈이며, 다수의 사람을 죽이는 일이다. 절대 지속될 수도, 지속되어서도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식량주권에 대해서도 “모든 이들이 공평하게 안전한 먹거리를 먹는 것이고, 그 생산 시스템이 생태적이고 문화적으로 적합해야 한다는 것이 식량주권”인데, 이것을 두고 농민들이 이익을 더 얻기 위해서라고 보는 오해와 잘못된 인식 때문에 농민이 더욱 고립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유엔 농민권리선언이 채택되면, 이 선언으로 국내법과 제도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 논의도 있어야 하지만, 우선 국제 기준에 맞게 농민 권리가 보장되고 있는지 실태조사가 이뤄질 것이라며, “정부 정책뿐 아니라 농민운동의 판도 더 새롭고 확장해서 짤 수 있을 것이다. 농민운동도 산업의 틀을 완전히 탈피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무엇보다 정부가 농민 당사자와 이야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농민들은 정책이나 연설문에서 농민 두 글자가 언급되기를 바라고 있다. 이번 선언문만 봐도, (정부는) 어떻게 17년간 농민과 간담회조차 하지 않는가. 농민을 만나서 이야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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