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8일자 1025호 <평화신문>과 2654호 <가톨릭신문> 모니터링

얼마 전 국내에서 사진전을 열었던 <매그넘>이란 단체가 선정한 ‘세상을 바꾼 사진들’을 본 적이 있다. ‘웹서핑’덕분이다. 인터넷을 이용한 일 중 가장 흥미로운 일은 이른바 ‘웹서핑’이다. 어느 사이트를 방문하더라도 검색기능이 잘 되어있는 곳을 사람들은 즐겨 찾는다. 일일이 백과사전을 뒤지거나 수많은 자료집을 찾아야 할 일을 ‘웹서핑’을 통해 손쉽게 할 수 있을 때의 편리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보도사진의 백미들을 한 번 검색해 보시라. 그런 사진들 앞에 무슨 부연설명이 필요할 것인가?

언론, 특히 종이신문에서의 사진 하나는 수백 단어로 작성되어진 기사보다 더 호소력과 전달력이 뛰어나다. 그러기에 거의 모든 신문사가 사진팀을 당당한 부서의 하나로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교계신문의 사진 활용도는 어느 정도일까? 문제는 중요한 대목에서 사진이 영양가가 없거나 혹은 아예 빠진다는 것이다. 디지털카메라의 보급으로 특별한 기술 없이도 전 국민이 사진작가가 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러기에 신문사의 기자들도 ‘똑딱이’ 카메라 하나쯤은 지니고 다니며 바로 현장 채증(?)이 가능하다. 그리고 신문사의 사정에 따라 제휴사로부터 기사나 사진을 제공받으며 정보를 공유하고 있다.

한 주간의 소식을 모아서 전하는 현재의 교계신문들로서는 지면을 채우는 수많은 -때로는 얼마 안 되는- 아이템을 가지고 일선 취재기자와 편집국이 머리를 맞대고 있는 실정일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 중에 때로는 사진을 물고 나와야 기사가 더 눈에 띄는 기사가 있을 것이고, 사진이 없이도 충분한 전달이 될 일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사진으로 할 일을 글로 채우는 일이다. 신문사는 진심으로 독자들에게 기자의 취재가 효과적으로 전해질 것을 원하기라도 하는지 의아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철거대상자들이 무참히 죽어간 용산참사 현장에서 미사가 중단되고 성직자들이 거듭된 폭행과 공권력에 시달리고 있다. 그 일에 대해 서울대교구와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가 성명서를 발표했다. <평화신문>은 이를 비롯한 시국과 관련된 보도를 6면과 20면을 이용하여 서울대교구 김운회주교의 성명서 발표와 ‘제1차 전국사제단 시국기도회’및 ‘서울 빈민사목위 공식 항의 성명 발표’와 ‘가톨릭신학교 교수 신부 시국선언문 발표’ 등 네 꼭지를 전했다. 관련사진은 시국기도회 때 초를 봉헌하는 수녀의 모습을 실었다. <가톨릭신문>은 6면에 ‘부당한 공권력 집행 중단하라’는 기사를 사진 없이 전했고, 기사를 작성했던 기자가 22면 ‘기자수첩’에서 한 번 더 풀어썼다. 이런 사건을 전할 사진은 어디로 사라진 것인가? 20여 년 전 연세대 앞에서 찍은 이한열의 사진 한 장이 세상을 바꾸었었다.

이른바 “텍스트보다 비주얼이 강하다”는 말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 한마디로 기사본문보다 시각에 의한 보도사진의 중요성을 이야기할 때 하는 말이다. 언론종사자들이 이 말을 모를 리가 있을 것인가? 단지 그 실천에 있어서 무언가의 가치판단이 자꾸만 머뭇거리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부당한 공권력’이니 ‘사제 폭행’ 혹은 ‘미사 중단’이란 활자대신에 사진 한 장을 넣어보라. 기사가 확 달라 보일 것이다.

순간의 기록이라는 보도사진을 아끼지 말일이다. 에밀 졸라는 '우리는 어떤 것이 사진으로 찍힌 것을 보기 전에는 그것을 정말로 보았다고 주장할 수 없다'라고도 이야기했다. 응집력 있는 사진한 장이 독자들에게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행여나 길바닥에 쓰러지고, 멱살 잡힌 사제들의 모습을 본 교우들이 흥분할 것이라고 미리 판단하지 마라. 우리는 예수의 사형도구였던 십자가를 감동 없이 바라보는 내공의 소유자들이 아닌가? ‘약발’있는 사진 한 장이 세상을 바꾼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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