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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렵고 매력적인 성경, 그리고 예수 그 사람이강길 (파비아노, 40)

   
 

이 글과 눈발이 무슨 관련이라도 있는 것일까? 지난번 원영 누님을 만나러 가던 날처럼 오늘도 눈발이 날린다. 아직 진눈깨비에 지나지 않지만, 바람마저 부는 게 심상치 않다. 미아삼거리역에서 내려 12번 마을버스를 탔다. 종점이라는데... ‘종점(終點)’이란 말이 또한 심상치 않다. 예전에 나도 4호선 전철 역 종점에 살았던 적이 있었다. 당고개역. 남부역 쪽으로 나오면 늘 불암산(佛巖山)이 마주보고 있었다. 바위가 많아서 듬성듬성 바위로 하얗게 빛나던 산이다. 마을버스도 없던 시절, 상계4동 그 판자촌 언덕을 오르자면 다리가 꽤 아팠다. 10평 남짓한 늘 수도꼭지에서 녹물이 나오곤 하던 집에서 5년을 살았다. 이사하고 처음 가족들이 그 집에 찾아오던 날, 땀 흘려 가며 언덕을 오르는 식구들에게 “여기, 공기 참 좋지?” 물었다. 아마 산동네를 찾아가는 가족들의 구죽죽한 분위기를 돌려볼 심산이었을 것이다. 그때, 엄마가 한방 날렸다. “공기만 먹고 사냐?” 그 당시 당고개는 서울의 막장이라 부를 만큼 버스 종점도 하나 있고, 조금씩 빌라들이 들어서던 차였다. 갑자기 산중턱의 불암산 굿당터가 선연히 떠오른다. 복사꽃이 바닥에 한가득 깔리던 그곳에서 담배를 피우곤 했다. 아련한 그리움이다.

생애의 막장, 종점의 인상

12번 종점은 미아리 아파트촌이었다. 새로 뉴타운 아파트 부지를 개발하는 굉음이 아랫녘에서 분진과 함께 날아와 목을 메이게 한다. 눈발이 아니었다면, 삭막했을 종점이다. 아직 철거되지 않은 집들이 아파트 숲 가운데 공터처럼 남아 있다. 주책맞게 12번 종점에서 예수의 열 두 제자들이 생각난다. 그들은 예수가 죽고나서 어떤 심경이었을까? 성경에선 사흘 뒤에 부활하여 제자들에게 나타났다고 전하지만,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그만한 신앙이 아직 내게는 없는 것이다. 분진처럼 날아드는 모랫바람을 견디며 말 많은 세상을 버티게 해준 힘은 도대체 어디서 왔을까? 시름을 안고 가던 엠마오의 두 제자가 서럽고 안쓰럽다. 아마 저녁식탁에서 그들은 빵을 떼며 그분을 생각하고 울었을 것이다. 살아생전보다 더 생생하게 현존하는 예수를 두고, 자신들이 그분이 하시던 일을 마저 하리라 다짐했을 것이다. 그 길만이 그분을 죽어도 죽지 않게 하는 일이라 여겼을 것이다. 연모하는 정이 쌓이면 사람은 뭐든지 한다. 그게 생명을 얻어누리게 하는 사랑의 거룩한 장난이다.
 

   
 


그의 웃음이 착했다

‘강직성척추염’이란다. 8평짜리 그의 임대아파트에서 만난 이강길(파비아노, 40)은 신발공장에 다니면서 가톨릭노동청년회 활동을 할 때, 자꾸 어깨가 따끔따끔 아프고 몸이 더 안 좋아졌다. 그때 황상근 신부님이 소개해줘서 봉천동 요셉의원에서 진단을 받았는데, 바로 그 병이란다. 물렁뼈가 천천히 굳어서 대나무처럼 단단해지는 병이다. 약물 치료를 해서 나을 수 있는 병도 아니고, 스트레칭을 하면 굳는 속도를 조금 느리게 할 수는 있지만 병증을 멈추게 할 수는 없다. “청소 엄청 했어요” 내가 그이의 방에 들어섰을 때 구부정한 모습으로 던진 첫 말이다. “이런 집엔 손님이 자주 와야 해요. 여기저기 폐품이 쌓이고 책도 쓰레기처럼 쌓이거든요. 이럴 때 한번씩 치워줘야지.” 오디오 엠프 위에 놓인 프란치스코상 밑에 먼지가 제법 두툼하다. 그의 눈길이 내 손끝을 따라잡으며 비시시 웃는다. “그런 데는 건들면 안 돼요. 또 쌓이니까 풀썩이지 말고 가만히 두어야지.” 그의 웃음이 착했다.

작년 가을이었던가? 우연히 알게 된 ‘어둠속에 갇힌 불꽃’이라는 다음 카페가 있었는데, 그 카페지기였던 정중규 형님이 수도원 들어간다면서 여러 명의 카페 운영자를 천거하였다. 그중에 나도 걸려서 운영자 첫모임에 갔었는데, 거기서 강길이를 만났다. 거기서 그는 ‘꼴통’으로 통했다. 그의 닉네임이다. 나는 기억도 없는데, “어! 상봉이 형.”하고 그가 보자마자 내 이름을 불러주었다. 십수년 전에 내가 노동사목을 할 때 나를 만나 적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 당시 그는 가톨릭노동청년회 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먼저 알아주니 반갑고도 당혹스러웠다. 또박또박 이름도 정확히 외고 있는 그에게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그 뒤로 강길이는 인터넷언론을 하면서도 인터넷을 잘 모르는 나를 위해 몇 차례 사무실에 방문해 주었다. 내 방에 올 때마다 그는 반주(飯酒)로 술을 먹었다. 낮술을 먹고 밤늦도록 끝없는 이야기를 토해 놓고 가곤 했다. 어디서 그렇게 엉킨 실타래 풀듯이 꼬물꼬물한 말이 쉽게 나올 수 있을까? 이날도 집에 들어가기 전에 슈퍼에 들러 맥주 페트 한 병과 소주를 샀다. 집에 감자탕이 있으니 안주는 그만이라고 한다. 우린 오늘도 대낮부터 술판을 벌여놓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리버리 돈키호테, 파비아노

   
 
강길이는 호적에 69년생으로 되어 있지만, 정확한 나이는 모른다. 가정법원에서 전주 이씨로 성씨(姓氏)를 지어주었단다. 그는 고아였고, 정작 부모가 누구인지 전혀 모른다. 지금은 수녀회 이름이 바뀌었다는데, 파티마성모수녀원에서 운영하는 '보이스타운(Boy's town)'에서 자랐다. 당시 서울 잠원동에 있던 ‘성심원’을 그 때는 그렇게 불렀다. 아마 미군들의 원조로 운영했던 보육원이었던 모양인데, 지금은 용인 수지에 자리잡고 있다. 그곳에서 ‘파비아노’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던 강길이는 고등학교 졸업하기 직전에 성심원을 나왔다. 수녀 어머니가 안양 박달동에 있던 밧데리 가게에 취직을 시켜준 것이다. 그 후로 신발공장에도 다니고 보일러공으로 최근 4년전까지 일했다.

   
 
강길이는 ‘어리버리 돈키호테’라는 인터넷 블로그를 운영하는데, 그야말로 무지하게 많은 노래가 담겨 있다. 특별히 성음악과 클래식에 밝은 이강길이다. 벌이가 없으니 의존할 수 있는 것은 인터넷밖에 없다. 국내외 인터넷 사이트를 뒤져가며 입맛에 맞는 곡을 선정하고 편집해서 다시 인터넷에 올려놓는다. 그는 제법 큰 엠프를 갖고 있었는데, 우리는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감상하는 시간도 가졌다. 없는 살림에 클래식 마니아인 그에게 인터넷은 그야말로 거저 얻을 수 있는 광맥(鑛脈)이었던 것이다. 그의 이력에 비추어 어떻게 그가 클래식에 심취할 수 있었을까, 궁금했다.

밧데리 가게의 구석방에서 잠을 청할 때 어린 그는 얼마나 외로웠을까. 특히 명절에는 아무도, 정말 아무도 곁에 없었다. 찾아오는 이 하나 없는 컴컴한 골방에서 기름때에 절은 이불을 끌어다 덮으며 그는 많이 울었다. 그렇게 울먹이다 보면, 입에서 저도 모르게 새어 나왔던 것이 성심원에서 듣던 음악이었다. 그레고리안 성가였을까? 성심원에서는 아버지 신부님(이우철 시몬 신부)의 지시로 날마다 오후 2시만 되면 클래식 음악을 들어야 했고, 때마다 ‘교황찬가’ 등 성음악을 합창으로 배워야 했다. 당시 성심원은 미군부대의 도움을 많이 받았던 모양이다. 장군들이 타고 온 외제승용차들을 실컷 구경한 것도 그 시절이었다. 나라에서도 지원금이 나와서, 200여 명이 넘는 아이들은 악기 다루는 법도 배우면서 ‘교양있게’ 사는 법을 훈육받았다. 성심원 시절엔 형들에게 맞기도 많이 하였는데, 그렇게 서러운 날도 없지 않았는데, 밧데리가게 골방에서 그는 울먹이며 그때 배웠던 곡조를 떠올리며 위로받았다.

가톨릭노동청년회 만나다

강길이가 가톨릭노동청년회를 알게 된 것은 신발공장을 서울로 옮기게 되면서 대림동에 살게 되었을 무렵이었다. 다시 성당에 다니고 싶어서 구로3동 성당엘 갔고, 거기서 가톨릭노동청년회를 알게 되었다. 예전에 성심원으로 자원봉사를 왔던 형과 누나들과 계속 인연인 닿아서 신발공장 다니면서도 계속 만날 수 있었는데, 그네들은 당시 민중문화운동연구회 소속이었고, 세상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책도 많이 탐독했다. 이미 그는 의식화되어 있었던 것일까? 그는 빠르게 노동청년회에 흡수되었고, 노동운동을 하고 싶다는 갈증이 솟아났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 ‘산업디자인포장개발원’에서 운영하는 박스공장이었다. 그런데 들어가 보니 이미 노동조합도 있었고, 어린 나이에 몸도 안 좋은데 무거운 박스를 나르며 고생만 진탕하고 나와서, 나중에는 보일러공으로 이곳저곳에서 일을 하였다. 그는 물이 흐르는 배관이라면 용접이고 뭐고 다루지 못하는 게 없다. 암 유발한다는 유리솜 박는 일도 했다.
 

   
 
여의도에 있는 삼성에서 일하다 ‘재수 없이 거만한’ 간부들과 대판 싸우고 그만 둔 뒤로는 취직이 되지 않았다. 강길이의 몸에 병증이 심해진 탓이다. 꾸부정한 몸을 사회에선 받아주지 않았다. 면접을 보러 가면, 그들은 항상 “잠바 좀 벗어봐!” “일어서 봐, 앉아봐!” “목소리가 왜 그래?” 하였다. 그때마다 무엇보다 그는 ‘쪽 팔렸다.’ 자격증만 7개나 되지만, “난 자격이 충분해”라고 생각했지만, 면접에서 번번히 떨어졌다. 이력서를 300통 정도 썼다고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사회에 나와서 스무 해 정도 노동으로 생계를 도왔다. 그에게도 흰색 와이셔츠가 어울리던 건강한 청년 노동자 시절이 있었다. IMF때에는 ‘실업극복국민운동본부(SNSE)’에서 일한 적도 있었다. “다른 사람들 도와 줄 수 있어서 좋더군요. 노동청년회에서 훈련되었는지 잘 들어주는 법과 말을 이끌어내는 데 익숙해서 사람들이 좋아했지요."

그들을 감싸안고 같이 걱정해 주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조셉 카르딘 추기경은 노동자 계급 출신으로 성공의 길에 오른 인물이다. 독일과 프랑스, 영국에서 일을 하면서 공부를 해야할 정도로 환경이 불우했는데 그는 이러한 출신환경을 잊지 않고 평생을 노동자들의 열악한 근무환경을 향상시키는데 바쳤다.

『근로자들은 금보다도 더 가치가 높다』라는 그의 말은 자신의 사명을 잘 표현한 말이다. 1906년 신부서품을 받은 카르딘 신부는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1912년에는 브뤼셀 근교 레이큰 교구의 보좌신부로 임명되었다. 그는 「청소년 클럽」을 맡아 지도 관리한 것은 물론, 소셜클럽을 직장에서의 문제점들을 토론할 수 있는 스터디그룹으로 만들기도 했다. 또 젊은 사람들을 위해 바느질수공자 산업조합을 설립하기도 했다. 그가 해야할 일은 점점 처우가 나빠지는 근로조건을 개선하고, 그리스도교적 가치관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적의를 바꾸는 것이었다.

카르딘 신부는 노동자들을 조직적으로 통합해내고 이들을 변화시켰고  생활 곳곳에 크리스천의 개념을 집어넣도록 만들었다. 1925년, 카르딘 신부에 의해 교육받은 청년들은 「가톨릭노동청년회」 운동을 시작했다. 이 운동은 수십년 동안 영향력있고 빠르게 퍼져나갔으며 교황 비오 11세로부터 『교회는 노동자들이 필요하고 노동자들은 교회를 필요로 한다』는 등 지지를 받았다.

교회, 아니 예수에게서 힘을 얻다

강길이는 지금 4년째 생활보호대상자로 살고 있다. 한 달에 39만원씩 돈이 나온다. 그게 적은 돈이 아니다. 그는 이 때문에 결코 주눅들지 않는다. 왜냐고? 그리스도인이므로. 나름 살아갈 이유를 갖고 있으므로. 그는 모태와 같았던 가톨릭교회를 별로 달가와하지 않았지만, 가톨릭노동청년회를 창설했던 까르딘 추기경을 통해서 만난 예수를 좋아했다. 그는 제도 교회의 그 모든 형식적 담론과 허황된 신앙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래도 한달에 한번은 미사참례를 한다. 보문동 노동사목회관에서 열리는 미사에 참석하는 것이다. 그에게 살아있지 않은 신앙, 예수랑 별로 상관없는 신앙은 이미 신앙도 종교도 아닌 것이다. 그는 이제야 까르딘을 이해할 것 같다고 말한다. 까르딘의 생각을 “교회가 하지 못하는 것을 현장에서 우리가 하는 것”이라고 요약했다. 신부나 제도가 아니라 ‘내가 교회’라고 여겼다. 내가 그리스도라는 것, 내가 ‘작은 그리스도’라는 각성이 그에게 힘을 주는 것 같다.

“내가 그분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수는 없더라도 어떤 확신만 있으면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어요. 까르딘이 그랬잖아요. 여러분은 다 성인이 될 수 있고, 현대사회에서는 성인이 더 필요하다고 말이죠.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이게 크리스챤의 믿음이지요. 신앙적 갈증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라고 생각하고 살아야 하는 거죠.” 그에겐 그리스도를 믿는 것보다 그리스도처럼 사는 게 더 중요했다. 그래서 예수처럼 잔치를 좋아하는 것일까? 얼마 전에 “왜 대낮부터 술을 마시냐?”고 물어보았을 때, 그가 답했다. “형! 나 항상 술 마시는 것 아냐. 오랜만에 형을 만났으니 잔치를 열어야지. 그러니 축하주를 한 잔 하는 거지.” 주변에서 모든 사물이 제 삶을 경축하고 있었다. 그날도 그랬다. “형, 오늘 눈 오는데 술 한 잔 해야지.” 모든 날을 축하할만한 날로 바꾸어버리는 재주를 그는 갖고 있었다. 그래서 주변에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꼬인다.
 

   
 

   
 

   
 

강길이는 결국 성인(聖人)이 되는 게 우리들의 사명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모든 게 분명해졌다고 한다. 어떤 말을 듣고 기쁨과 환희를 느꼈는데, 그 말이 성경에서 전하는 예수의 말씀일 때, 우리는 그걸 남에게 전할 의무가 있다고 그는 믿었다. 그걸 전철 속의 전도사들처럼 말로 전하는 게 아니라 말씀대로 살아서 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말을 듣고 있는데, 갑자기 캐나다 영화로 기억되는 <몬트리올 예수>가 떠올랐다. 영화에선, 연극에서 예수 역을 맡았던 배우가 극중 인물에 몰두한 나머지 예수와 자신을 동일시하여, 예수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행동하기 시작한다. 그러자 사람들은 다들 그가 미쳤다고 여겼던 것이다. 아마 처음에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를 바라보던 세상의 시선도 그러했으리라. 까르딘이 감흥을 주고 예수가 했던 말을 알아들었을 때 그는 “어떻게 해야할까?” 고민했다. 결국 예수는 그렇게 살다 그렇게 죽었는데, 그렇다면 우리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이다.

성경은 참 두려운 책이다

강길이는 모든 걸 배우고 다 알아야 그리스도처럼 살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했다. 먼저 깨달은 만큼 살고, 그렇게 살다 보면 그분을 더 잘 알게 된다고 했다. 헨리 나웬과 장 바니에는 장애인들과 공동체 안에서 살면서 자신이 인생이 바뀌어졌음을, 그분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음을 고백하지 않았느냐고 했다. 그들 때문에 자신이 만들어졌다고. “읽었으면 실천해야 하니까, 성경은 참 두려운 책이더라고.” 책만 읽는다고 되는 게 아니다. 그렇게 살아야 하니 힘들다. 그만한 비중으로 내게도 성경 말씀이 다가오고 있는 것일까, 잠시 멈칫하며 생각해본다.

그는 아프고 가난한 이들을 보면 슬픈 게 아니라 화가 난다고 했다. 진짜 깊은 슬픔을 느낄 때는 나만이, 죽을 때까지 갖고 가야 하는 것이라 했다. 혼자라는 것. 일가붙이가 없다는 것. 이럴 때 결혼하고 싶은 생각도 든다고. 예수가 왜 고아와 과부들을 두둔하셨는지 알 것 같다고 말한다. 이럴 때 정말 그리스도교 신앙이 크게 다가온다고 그는 말한다. 한번은 잠을 자다가 윗니가 모두 빠지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주변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아버지나 직계존속이 죽는 꿈이라고 했다. 그 순간에 자신은 얼굴도 이름도 아무 것도 모르지만, 제 피붙이 중에 누가 어디선가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날은 하루 종일 마음을 종잡을 수 없고 깊숙이 가라앉아 있었다고 한다. 한때 내 대학동창이자, 가톨릭노동청년회에서 간사 일을 맡아보았던 병훈이가 강길이에게 같이 살자고 제안했던 적이 있었던 모양이다. 아직도 고맙게 생각하는 제안이었지만 그는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아 거절하였다.
 

   
 

그리스도를 위한 투신, 그리고 죽음

강길이에게 가장 큰 감명을 준 책 중의 하나는 페니 러녹스가 쓴 <민중의 외침>이라는 두꺼운 책이었다. 붉은 표지의 이 책은 라틴아메리카 대륙의 군부독재 아래서 해방운동에 투신했던 선교사들과 그리스도인들의 투쟁과 죽음의 기록이다. 그 책을 보면서 정말 그리스도교적인 삶이 가능하구나, 생각했다. 그게 지금도 유효하구나, 생각했다. 이런 책들은 자기 같은 사람에게 사는 데 용기를 준다고 했다. 그는 말한다. “그리스도인이란 자기를 버리는 사람이고, 자기를 보는 게 아니라 세상을 위해 헌신 봉사하는 사람이다. 그게 까르딘의 의도이고 복음의 요청이다.”

그는 백수라 해도 엄청 바쁘다. 저처럼 8평 10평 임대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에게 일주일에 세 차례 국어 영어 수학을 가르쳐 준다. 가방끈이 짧지만 식견이 넓고, 컴퓨터 분야만큼은 나름대로 자랑할 만하다. 지금은 가톨릭노동장년회에 참여하고 있으며, 뭐든 주어진 일을 사명으로 여기고 마다하지 않는다. 최근엔 의식은 멀쩡하지만 전신마비에 걸린 장애인 택시기사의 돌봄이가 되어 필요할 때마다 달려간다. 광장동까지 가서 하루고 이틀이고 그 집에 머물며 그 사람 수발을 든다. 똥 오줌을 처리할 때마다 곤욕스럽지만, ‘십자가’로 여기고 받아들이려 안간힘을 쓴다. 우리는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한다고 그는 믿는다. 장애인이라도 생각이 빤해서 더 힘들다. 온갖 수치심을 다 느낄 수 있는, 그걸 표현할 수 있지만 몸을 못 움직이는 사람의 뒤치다꺼리란 힘들다. 강길이는 그 집에 가면 텔레비전을 보면서 뭐든 물어본다. 대학 나와서 유학 준비하다 사고로 이 지경이 된 그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는 온갖 지식을 늘어놓으며 그 순간 잠시 행복하다. 뭐든지 물어봐 주는 게 그 사람에겐 고맙다. 존재가 살아나는 것이다.

저녁 무렵에 이강길 파비아노의 아파트를 나섰는데, 아랫녘 철거된 뉴타운 예정지구에는 눈이 소복하니 쌓였다. 골목에는 인적이 없는데 보안등이 깜박거린다. 사람 없는 마을에도 눈이 내리는가! 예전엔 왁자지껄 했을 동네가 적막하게 누워 있었다. 곧 포클레인이 들이닥쳐 몇달 뒤엔 아파트 건축공사가 한창이겠지.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지만, 여전히 그들은 우리 곁에 있을 것이다. 그 가난한 얼굴을 볼 수 있는 자, 복을 받아라. 아멘.

/한상봉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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