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티에레스 신부] 9월 30일(연중 제26주일) 마르 9,38-48

예수님의 메시지는 이 세상에서 우리들만이 그분을 대변하는 사람들이라는 느낌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준다.

어떠한 분파주의도 없이

마르코 복음서의 구절은 예수님께 가까운 그룹이, 비록 사회에서는 소외되었지만 그분을 따르고 있었던 사람들에 반대하는, 좀 더 넓은 맥락 속에 자리 잡고 있다.(마르 9,33-37) 제자들은 그들이 예수님의 사명을 받은 유일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동하면서 그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다른 사람들을(9,38) 막아 보려고 한다. 주님께서는 그분의 추종자들 그룹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이러한 적절치 못한 나쁜 의도를 거부한다. 그분의 은총과 권능은 가장 가까운 제자들의 범위를 넘어 존재한다.(9,29)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분별을 위한 미래의 지침을 그들에게 준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9,40) 이러한 포괄적 기준은 그들이 예수님 메시지의 단독 소유자들이라고 느끼는 제자들의 경향에 도전을 제기한다. 이러한 도전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들에게 오고 있다. 예수님이 간파했던 제자들에 대한 이러한 유감은 교회에 속하지 않거나 교회 안에서도 우리 자신의 그룹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대해서도 계속된다.

누구든지 생명을 주는 사람은 (물 한 잔을 주어도, 마르 9,41) 보상을 받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데 있어 핵심은 우리가 사랑을 살아갈 때에 발견된다는 사실이 강조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유일한 추종자들이 되려는 제자들의 야심은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그룹에 속하는 “위대한 사람들”(9,42)과 대조되는 “이 작은 사람들”을 쫓아버릴 수 있는 걸림돌이 된다. 마르코 복음 구절은 예수님 메시지의 절대적 소유자들이라고 느끼는 사람들의 자기중심적 태도를 거부한다. 아무것도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에 한계를 그을 수 없다. 또한 복음 말씀은 그들 자신만이 복음 말씀의 유일한 해석자들이라고 선언하는 공동체의 모든 분파 그룹들도 거부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편협한 마음을 해방시킨다.

물 한 잔. (이미지 출처 = Pixnio)

생명으로 들어가기

마르코 복음서의 이어지는 구절들은 생명과 하느님나라를 동격에 놓는 흥미로운 특징이 나타난다.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은(마르 9,43) 하느님나라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9,47) 이것은 생명과 하느님나라의 위상에 대해 정확하고도 명료한 표현 방식이다.

제1독서의 구절은 마르코의 메시지에 나타나는 몇 가지 지침들을 강조하여 보여 준다. 모세의 조수인 여호수아는 다른 사람들이 예언하는 것을 금지해야 하지 않느냐고 모세에게 묻는다. 그러나 모세는 정반대로, 모든 주님의 백성들은 예언자가 되어야 한다고, 다시 말하자면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한이 있어서는 안 된다. 여호수아의 질투심은 제자들의 시기심과 똑같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영”,(민수 11,29) 다시 말하자면 생명을 받는 것이다.

야고보는 생명을 선포하지만 부자들처럼 자신들의 이기심 때문에 가난한 이들에 대한 부당한 처우와 억압 그리고 죽음을 가져오는 “반대 예언자들”의 모습을 보여 준다. “살육의 날”(야고 5,5)이란 표현은 심판 날을 의미하는데 - 가난한 사람들을 특별한 방식으로 사랑하시고 모든 사람을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생명의 증인으로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심판을 뜻한다.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신부
1928년 페루 리마 출생. 의대를 졸업한 뒤에 사제로 살기로 결단했다. 사제가 된 뒤에는 리마 가톨릭대학에서 신학과 사회과학을 가르치면서 리마 빈민지역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목을 했다. 대표적인 해방신학자로 빈민의 관점에서 복음을 증거해 왔다. 주요 저술로는 "해방신학"(1971)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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