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첫 직장은 강원도 탄광촌이었던 고한 흑빛 공부방의 선생님이었습니다. 공부방 선생님은 지혜의 깊이나, 높은 학력이 필요하기 보다는, 아이들에게 먼저(先) 산 삶(生)에 있어 배움을 함께 나누는 자리였습니다. 그래서 전 공부방 선생님을 제 이력서 맨 첫머리에 적습니다. 공부방 일을 하며 많은 사람들도 만났습니다. 날만 따뜻해지면 늘 가출하던 일용이와 친구 재석이 - 이 친구들을 저는 ‘철새’라 불렀습니다. 따뜻한 계절이 오면 고한을 떠났다가 추운 계절이 오면 다시 돌아오곤 했던 철새들 -. 동료였던 일남, 선경, 주영 선생님. 그리고 성심회 수녀님들. 모두가 제겐 좋은 친구이자, 선생님들이었습니다.

두 번째 직장은 대전 성남동에 있었던 “가톨릭농민회”였습니다. 농민회에서 실무자로 지내다 보니 그곳에는 정말 선생님들이 많았습니다. 바로 “농민”들이었습니다. 제게 배나무 꽃을 따는 법과 배꽃의 아름다움, 그리고 한산 소곡주의 풍류를 알려주셨던 서천 양만규 회장님. 피와 벼를 구분하고, 논의 잡초 처리법을 알려주셨던 원주 이진선 회장님. 김대건 신부님의 후손으로, 실무자들이 힘들 때 찾아가면 늘 따뜻하게 배려해주시고, 그 마음 씀을 가르쳐 주신 충남 최창규 회장님. 말씀 중에 침이 많이 튀겨, 아는 사람들은 절대 가까이 이야기를 듣지 않았던-그렇지만 노・장(老・壯)사상의 대가셨던-충주의 어른, 김상덕 회장님.

멀리 진도 대교 너머, 가톨릭 농민회 진도 공동체의 산 증인이시며, 입은 다소 걸지만, 속 깊은 글쓰기를 좋아 하시던 고만술 회장님. 노제(路祭)나, 큰 행사에서 특유의 높은 톤으로 축문을 잘 읽어 내려가시던 긴 수염의 청년, 딸딸이 김익호 회장님. 우리밀과 우리 농업에 대한 커다란 애착과 고민을 늘 함께 하셨던 녹두장군의 후예, 이수금 회장님. 그리고 민들레 풀씨처럼 수 천, 수 백 농민 해방의 씨앗을 뿌리고 떠나가신 고(故) 권종대 회장님.

홀로 살집을 지으시며, 도우러간 우리에게 하루일이 끝나면 소나무 등걸을 파내고 소주를 부은 송주(松酒)를 선보이시던 안동의 농민 신부님, 정호경 신부님. 두 해 전 홍콩 WTO 투쟁에 함께 구속되었고, 지역에서 생명농업과 도농 교류, 그리고 학교급식운동에 늘 웃음 속에서 함께 지내다가 마흔 여덟살, 젊은 나이에 얼마전 세상을 뜬 충북 청천의 성렬 형님. 그리고 이분들과 함께, 늘 곁에 계시던 얼굴은 기억나지만 이름은 자꾸 잊어버리는 수많은 가톨릭 농민 형제・자매들을 만났습니다.


<마흔 여덟,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 농민운동가 김성렬 농민>

 수확의 계절, 가을이 오면 이분들이 떠오릅니다.

이 땅의 선생님들이 떠오릅니다. 자신의 삶과 실천으로 가르침을 주시던 선생님들. 이론과 머리와 생각만으로 가르치지 않고, 화려한 말솜씨로 이끌려 하지 않으셨던 분들. 스스로 먼저 묵묵히 행동하시고, 그 땀과 수고로움으로 제 가슴 속에 배움을 자꾸 자꾸 적셔주시던 선생님, 농민들...

그리고 생(生)에 있어 결국 남는 것은 돈도 아니고, 일도 아닌, 바로 '사람'임을 알려주신 선생님들. 그 분들께 배움이 아직도 저를 이 길에 남아 있게 해주었습니다. 하여 나름대로 허튼 짓 안하고, 헛힘 쓰지 않고 지금껏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제 인생의 참 선생님들이십니다...



/맹주형 2007-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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