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티에레스 신부] 9월 9일(연중 제23주일) 마르 7,31-37

갈릴래아에서 온 떠돌이 설교가 예수님은 그분의 백성들이 사는 경계선을 넘어 이교도들의 땅에 기쁜 소식을 전한다.(마르 7,24.31)

말 못하는 사람들의 혀가 노래할 것이다

마르코 복음서의 윗 구절은 우리에게 쉽사리 비유적 차원의 해석을 허락한다. 즉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시고, 그분에 관하여 적절한 말을 할 수 있도록 해 주신다는 해석이다. 이러한 해석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데에 꽤 타당하고 유익한 의미로 다가온다. 그러나, 마르코 복음서의 이 구절들이 지니고 있는 본래 사실 그대로의 의미를 잊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귀먹은 이들과 말 못하는 사람들이 들을 수 있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복음서는 아람어인 에파타(마르 7,34)란 단어를 그대로 보존하는데, 이것은 복음서의 저자가 기억하고, 치유를 목격했던 사람들을 놀라게 한 사건들을(7,37) 인용하고 있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회적 현실과 뒤섞여 있는 신체의 현실을 다루고 있다. 실상, 그 당시 사고방식에서 보면 귀먹음과 말 못함은(아마 태생부터) 징벌로 여겨졌던 고통들 중의 하나였다. 이런 현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은 죄인들이나 혹은 죄인들의 자녀들로 여겨졌다.(요한 복음 9장의 태생소경의 이야기를 참고하기) 귀를 열어 주고 막혔던 혀를 뚫어 줌으로써,(7,32-35) 예수님은 그에게 건강을 회복시켜 주었고 그 사람은 더 이상 아프지 않다. 또한 동시에 예수님은 그를 사회 속에 다시 통합시켜 주었다. 그에게 종교상의 권리를 되돌려 주고, 그는 더 이상 사회의 소외된 위치에 있지 않다.

말씀에 열려 있는 사람들의 공동체는 신체적으로 사회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하여 연대를 표현해야 한다. 소외와 착취처럼, 굶주림과 질병 역시 생명을 원하시는 하느님의 뜻과 양립될 수 없다. 이사야서의 구절이 또한 우리에게 상기시키듯이, 기쁜 소식은 생명 그 자체다.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이사 35,5-6)

말 못하던 이가 노래할 것이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아무런 역성을 들지 말기

생명의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대단한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야고보는 그의 교회체험으로부터 우리에게 말한다. 그는 자세한 내용을 동반한 “가정(추측)”(야고 2,2)을 제시하는데, 이는 자신의 경험에서 오는 것임을 증명하고 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에는 “꼴찌가 첫째가 될 것이다”라고 말하는 존재를 따르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의 기준을 유지하며, 사회에서 첫 번째 자리를 가진 사람들에게 교회 안에도 첫 번째 자리를 준다. 왜냐하면 그들은 권력가요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야고 2,2-3) 또한 이와 반대로,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 더럽고 냄새 나는 옷을 입은 사람들을 멸시한다. 이런 태도는 주님이 요구하시는 것과 완전히 반대되는 태도다.

야고보 서간은 특히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에 민감하다. 이처럼, 차별을 두는 사람들을 “악한 생각”(야고 2,4)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비난한다. 야고보의 단순하지만 요구적 구절들은 우리에게 계속 도전하고 있다. 우리들은 명성, 경제 사회적 지위 그리고 화려한 옷들에 계속 무게를 두고 가난한 사람들을 부인하는 소리를 내고 있는가? 만일 우리가 가진 사람들을 편애한다면, 생명의 하느님나라를 보여 주는 징표인 교회를 세울 수 없다.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신부
1928년 페루 리마 출생. 의대를 졸업한 뒤에 사제로 살기로 결단했다. 사제가 된 뒤에는 리마 가톨릭대학에서 신학과 사회과학을 가르치면서 리마 빈민지역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목을 했다. 대표적인 해방신학자로 빈민의 관점에서 복음을 증거해 왔다. 주요 저술로는 "해방신학"(1971)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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