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티에레스 신부] 9월 2일(연중 제22주일) 마르 7,1-8.14-15.21-23

만일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다른 이들에 대한 사랑스러운 태도로 표현되지 않는다면 내용이 없는 셈이다.

깨끗한 손들

예수님과 바리사이파 간의 논쟁은 형식과 외형에 치중하는 종교와 하느님나라의 실제적이며 내적인 요구들을 놓고 벌어진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러한 종교 규칙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기 시작하고, 바리사이들은 그들이 백성들의 전통이라고 여기는 테두리 바깥으로 예수님을 쫓아내는 기회를 붙잡으려고 한다.(마르 7,1-5) 주님은 이사야 예언자가 대변하는 참다운 전통 그 자체에 의존함으로써 그들에게 응답한다. 이처럼, 예수님은 위대한 예언자의 관점을 계승하는 인물로 그분 자신을 분명히 나타낸다. 그 전통은, 바로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이 말이나 단순히 상식적인 태도가 아니라 마음의 회심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형식적인 태도들의 요구는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바리사이들이 참다운 요구들을 회피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것이다.(7,7-8) 예수님은 단지 바리사이들을 꾸짖는 것으로 끝내지 않는다. 그분은 군중들에게 큰 소리로 말한다. 모든 사람들은 바리사이들이 선포하고 있는 안이하고도 위선적인 종교의 실상을 알아야 한다고 한다.(7,14-15) 불결하다는 것은 단지 손을 씻지 않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다. 오히려 불결함은 다른 이들에게 해를 가하고, 다른 사람들의 요청을 잊어버리고 우리 자신들이 “깨끗하다”고 믿는 것으로부터 온다.

보살핌 (이미지 출처 = Unsplash)

이러한 주님의 호소는 아직도 온전히 유효하다. 복음은 바리사이주의가 모든 믿는 사람들이 대면해야 할 위험이라고 지적한다. 우리 역시 바리사이주의를 우리들 사이에서 그리고 우리들 안에서 보고 있다. 복음의 농도를 묽게 만드는 한 가지 방법은 복음을 단순히 외적 측면에서만 바라보게 하는 일련의 형식적 규칙들로 변질시키는 것이다. 복음을 그렇게 만들거나 그렇게 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판단하기에 이 규칙들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경멸한다. 가난한 이들도 자주 그들 자신을 “죄인들”이라고 여기는데, 그들은 예수님께서 이사야의 말씀에 동의하여 “사람의 규정”(7,7)이라고 했던 것도 따를 수 없는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규범들은 공격적이고 연민이 부족한 그리스도인들을 만들어낸다. 페기 시인이 말하곤 했던 것처럼, 손이 없기 때문에 손이 깨끗한 그런 사람들을 양성시키는 것이다.

순수한 종교

참다운 깨끗함이란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에 옮기는 것에 있다.(신명 4,1; 야고 1,22) - 사랑의 말씀, 모든 것들이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하느님의 선물이다.(야고 1,17) 참다운 순결은 우리에게 이웃을 향한 구체적인 행동을 요구한다. 고아와 과부를 보살피는 것이다.(1,27) 가난, 착취, 무관심의 희생자들을 방문하는 것, 정의롭고 인간적인 질서를 선택하고 죽음, “실종”과 고통을 일으키는 모든 것에 저항하는 것이다. 고아와 과부를 보살피고 가난한 이들의 구체적 요구를 잊지 않고 보살피며 생명을 바치는 사람들은 우리를 모든 형식주의로부터 멀리 벗어나게 해 준다.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신부
1928년 페루 리마 출생. 의대를 졸업한 뒤에 사제로 살기로 결단했다. 사제가 된 뒤에는 리마 가톨릭대학에서 신학과 사회과학을 가르치면서 리마 빈민지역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목을 했다. 대표적인 해방신학자로 빈민의 관점에서 복음을 증거해 왔다. 주요 저술로는 "해방신학"(1971)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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