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숙 수녀] 9월 2일(연중 제22주일) 신명 4,1-2.6-8; 마르 7,1-8.14-15.21-23

강이나 바닷가에 아이가 있으면 안전장치가 필요하다. 누군가는 감시를 해야 하고 위험지대를 알리는 노란 띠를 둘러야 하며, 필요한 규칙을 지키도록 주의를 주어야 한다. 이것은 ‘생명’과 직결된 것이기 때문에 토를 달 필요가 없다. 그러나 아이가 자라면서 수영하는 법을 익히고 위험을 다루는 여러 훈련을 받게 된다면, 그리고 청년이 되어 먼바다로 나아갈 만큼 성장했다면 어린 시절에 적용했던 규정과 세세한 수칙은 버려야 한다. 아이적 필요했던 규정을 어른이 된 뒤에도 계속 적용한다면, 그래서 아이의 성장을 방해하고 가두는 도구가 된다면 더는 규정이 아니라 학대이고 폭력이다.

모든 전통은 태어난 맥락과 시점이 있다. 신명기 역시 그것을 밝히고 회상시킨다. 애초에 하느님 규정과 법규는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를 떠나와서 물 없는 광야, 펄펄 끓는 대지와 밤의 추위, 독사나 질병의 위험으로부터 어린아이들과 식솔들을 지켜내야 했다. 죽음의 광야에서 약속의 땅으로 가는 길에는 누구든 예외 없이 준수하고 지켜야 할 규정들이 있다. 그들은 살아 돌아와서 이 긴 여정을 회고하였다. 하느님이 자신들을 어떻게 어루고 달래며 보살펴 주었는지, 자신들이 겪고 체험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어떤 것이었는지 결코 잊을 수 없었다. 하느님의 법규와 규정은 그런 것이었다. 그것은 한 마디로 해방과 생명을 가져다 주는 ‘지혜와 슬기'(신명 4,6)의 다름 아니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자자손손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기억장치’ 같은 것이었다.(신명 4,1.6) ‘전통’이란 그런 것이다. 전통은 기억되고 퍼올려져야 할 ‘샘’이다. 만일 우리에게 기억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더 이상의 진보는 불가능해질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과거의 모방에만 묶여 있다면 박제된 화석을 껴안고 사는 꼴로 전락할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는 곤혹스런 일과 맞닥트린다.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일’이 유대 지도자들에게 발각된 것이다. 그들이 예수에게 물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마르 7,5) 이 뻔하고 상투적 질문에 예수는 간결하고 정확한 어조로 중심을 건드린다. “너희는 ‘사람의 전통’을 ‘하느님의 계명’으로 둔갑시켜 유통시키는구나. 만들어진 전통, 우상을 참된 진리(교리)인 양 가르치며 헛된 신을 숭배케 하는구나!”(7,6-8)

먼바다를 향해. (이미지 출처 = Unsplash)

‘조상들의 전통’과 관련된 에피소드는 성경 곳곳에 등장한다. 정결례법이든 안식일법이든 이들이 일상에 쳐놓은 세세한 그물에 걸리지 않고 넘어갈 장사가 없다. 이는 ‘손을 씻고 안 씻는’ 그런 문제가 아닌 것이다. ‘전통’은 이유를 막론하고 습득된 것이어서 보통의 사람들이 ‘아니오’라고 반박하기란 쉽지 않다. 더구나 전통이 신적 영역과 관련된 제의나 전례의 영역으로 들어오면 장벽은 무한대로 높아진다. 무기력한 대중은 신의 영역을 관장하는 자들에게 모든 것을 걸고 의존할 수밖에 없다. 제사장과 율법학자 같은 종교인들은 그런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조상의 전통’을 팔아서 무한 권력을 획득했으며, 하늘나라조차 가로막았다. (궁금하신 분들은 예수의 신랄한 비판을 다룬 ‘마태 23,1-36’의 본문을 읽어 보시길 권한다)

그렇다고 예수가 하느님의 규정과 전통을 폄훼한 곳은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그는 ‘율법 한 획도 없애지 않고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고 공언한다. 실제로 예수가 걱정한 것은 전통을 권력의 수단으로 삼은 자들의 ‘거짓과 위선’이었다.(마르 7,6-15) 그들은 무엇보다 전통이 기억하는 생생한 체험과 정신적 가치를 사물화시킨 자들이다. 정신적 가치의 사물화는 인간을 사물적 대상으로 만들고 공동체의 가치를 왜곡시키며, 그 전통을 수중에 넣은 자들을 신격화시킨다. 사실 ‘신의 대리자’가 된다는 이 오랜 전통적 언어는 이미 위험해진 지 오래다. ‘신의 대리자’는 신의 권력과 모호한 경계를 유지하면서 절대적 권좌를 넘나든다. 그러니 이들의 명령은 신의 명령이고, 이들에 대한 복종은 신에 대한 복종이며, 해방적 가치는 노예적 가치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노예적 사회에서 폭력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정당화 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든다. ‘더러운 존재'(7,5)는 더 이상 경건한 집회와 모임에 얼씬할 수 없으며, 평생 수모와 비참을 견뎌야 한다. 이들이 겪었을 정신적, 육체적 고통은 오늘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가혹했다. 그러니 이들의 고통에 눈곱만큼의 연민이나 자비도 없던 지도자들에 대해 예수가 느꼈을 슬픔과 분노의 크기가 어떠했을지 가히 가늠하기조차 어렵다.(마태 23,1-36)

오늘도 ‘전통’은 뜨거운 감자다. 어떤 자들은 전통을 뛰어넘으려 하고 어떤 자들은 전통을 지키는 데 사력을 다한다. 새로운 개혁을 단행할 때마다 발목을 잡는 것이 이 ‘오랜 전통’이고 보면, 전통이 과연 현재 우리 삶에 어떤 활력을 불어넣고 있는지, 애초의 뜨거웠던 기억이 내 삶으로 전달되고는 있는지 한 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예수는 조상들의 전통에 대해 묻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렇게 응수하였다. “여인아, (조상들의 전통인)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드릴 때가 온다. ....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요한 4,21-23)

이제 ‘아이를 위해서’ 쳐 두었던, 시효가 다 된 노란 띠와 감시와 규정은 거둬 내야 한다. 전통은 아이가 더 먼 바다를 항해해 나갈 수 있도록 ‘밀어내는 힘’으로서 존재해야 한다. 전통은 소멸하면서 존재하는 것이지 자신을 지켜내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루카 5,4)게 하는 것, 새로운 비전과 전망에로 나아가게 하는 것, 그것이 전통이 할 일이다.

강신숙 수녀

성가소비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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