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티에레스 신부] 8월 26일(연중 제21주일) 요한 6,61-70

우리는 풍부하고도 긴 요한 복음 6장 읽기를 마무리하고 있다. 그분 자신을 생명의 빵으로 제시한 뒤, 주님께서는 이것 때문에 반대가 일어날 것이고 결국 당신이 죽게 될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말하기 시작한다.

성령은 생명이시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어렵고 거북하다”는 것을 발견하고,(요한 6,60) 생명을 선포하기 위하여 치루어야 할 값에 두려움을 느낀다. 그들은 감히 그 사실을 주님께 직접 말하지 못한다. 비슷한 상황에 놓인 대부분의 우리들처럼, 제자들도 목소리를 죽이고 그들의 두려움과 반대로 투덜댄다.(6,61) 그러자 주님께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몇몇 추종자들이 듣고 떠나가 버릴 가르침을 주고 있다.

예수님은 생명이며 힘인 영을 성경에서 죽음과 비겁함을 의미하는(6,62) “육”과 대조시킨다. 그분은 영을 몸과 대조시키지 않는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과 몸이 반대라고 생각하는 성향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 철학에서 유래한 몸과 영혼 사이의 구분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예수님은 그분의 말씀이 “영이며 생명”(6,62)이라고 말한다. 그분의 말씀을 믿는 것은 생명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다. 말씀들을 거부하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지, 예수님을 죽음에 넘기는 것이다.(6,64) 이것은 유다가 할 일이다.(요한은 6,71에서 언급한다). 후에, 유다처럼, 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일을 할 것이다. 그들은 비록 그리스도의 제자들 그룹의 한 부분을 형성하지만, 불의, 착취 그리고 다른 이들, 특히 가장 가난한 이들에 대한 부당한 대우를 보고 전혀 도전을 못 느끼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역사의 유다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행위는 예수님과 그분의 가르침에 대한 배반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을 폭로할 것이다.

이스카리옷 유다와 예수. (이미지 출처 = commons.wikimedia.org)

오늘 선택하기

주님의 부담스러운 가르침은 “수많은 그분의 제자들”이 그분을 포기하도록 이끈다.(요한 6,66)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는 여건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느님의 가르침을 실천에 옮기는 데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하느님께 귀를 기울이는 척하는 것보다,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직면하는 것이 더 나은 일이다.

이것이 바로 여호수아가 그의 백성들에게 말한 내용이다; “만일 주님을 섬기는 것이 너희 눈에 거슬리면, 누구를 섬길 것인지 오늘 선택하여라.”(여호 24,15) 하느님을 섬긴다는 것은 하느님의 선택된 사람들, 즉 사람들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과 연대를 맺는 것이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그들을 “이집트 종살이”(여호 24,17)에서 해방시킨 주님을 선택하도록 도전받고 있다. “오늘 선택하라”는 명백하고도 솔직하게, 미루지 말고 선택하라는 것이다. 이런 선택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특히 어려운데, 무죄한 생명들을 파괴시키는 잔인한 폭력의 상황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난과 불의 위에서는 어떤 굳건한 것도 세울 수 없음을 확신해야 한다.

생명의 주님을 섬기는 일은 지극히 어렵고 부담스러운 일이다. 맞닥뜨리는 거대한 과제 혹은 적의 앞에서, 우리는 도망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했던 똑같은 대답을 우리가 예수님께 할 수 있도록 아버지 하느님께 청하자: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 6,69)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신부
1928년 페루 리마 출생. 의대를 졸업한 뒤에 사제로 살기로 결단했다. 사제가 된 뒤에는 리마 가톨릭대학에서 신학과 사회과학을 가르치면서 리마 빈민지역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목을 했다. 대표적인 해방신학자로 빈민의 관점에서 복음을 증거해 왔다. 주요 저술로는 "해방신학"(1971)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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