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톤월 40주년의 교훈... 그리스도교, 동성애를 신의 창조질서를 거스른 것으로 간주해 정죄

▲ 스톤월 바

올 6월 28일은 동성애 권리 찾기 운동의 기폭제가 된 스톤월 저항사건 40주년이 되는 날이다. 스톤월 사건은 1969년 6월 28일 새벽, 미국경찰이 뉴욕 그리니치빌리지에 소재한 동성애자들의 단골 술집 '스톤월 인'(STONEWALL INN)을 불법적으로 기습해 동성애자들을 체포하려하자 동성애자들이 술병 등을 던지며 강력 저항, 충돌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스톤월은 전형적 젠더 기준에 순응하지 않았던 게이, 레즈비언, 트렌스 젠더, 양성애자들의 안전한 공간으로 알려진 곳이었으나 경찰의 과잉단속이 벌어지자 동성애자는 물론 인근의 시민들까지 가세하며 격렬하게 저항했다. 2천여 명이 넘는 동성애자들과 시민들은 4백 명이 넘는 경찰과 대치했고 이 시위는 거의 1주일간 이어졌다.

스톤월 저항사건은 현대 동성애 해방운동의 시작이 되었고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의 주요도시의 동성애자들은 6월의 마지막 주를 "긍지의 주(Pride Weekend)"로 기념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전국 성소수자단체들이 지난 19∼21일 대구에서 모여 '스톤월 항쟁' 40주년을 기념하는 대규모 축제를 개최했다. 서울외 지역에서 성소수자축제가 열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참가자들은 20일 오후 대구 도심인 동성로에서 남녀 성소수자와 일반인 등 30여 명이 거리행진에 나서 시민들에게 성소수자들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홍보물을 나눠주기로 했다.

이처럼 동성애자들이 권리투쟁에 나서고 미국에서는 대선에서 오바마를 당선시키는데 일조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동성애자들은 직장에서 해고당하거나 잠재적 범죄자로 간주되고 있다. 언론 역시 동성애자 문제에 대해서는 본질에 접근하기보다 흥미위주로 다루고 사건을 침소봉대하는 등 왜곡이 심하다.

특히 근본주의 개신교의 본고장인 미국 남부에서는 지금도 수많은 동성애자들이 혐오범죄로 살해당하고 가톨릭세가 강한 브라질에서는 거의 이틀에 한 번 꼴로 동성애자들이 죽임을 당한다는 보고도 있다. 근본주의 개신교 세력이나 가톨릭이 동성애에 대해 극단적으로 반대하는 이유는 금욕주의와 가부장적 유산이 강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초기 그리스도교, 성적 욕망을 원죄로 간주하고 섹스는 자녀 생산 수단으로만 인정

초기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 전역에 확산되고 제도화하는 과정에서 성적 욕망에 대한 부정적 인식 확산, 여성과 동성애에 대한 선긋기가 이루어졌다. 그 중에 동성애가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다. 이러한 경향은 예수의 재림을 고대했던 초대공동체의 금식, 소박한 삶과 엄격한 윤리도덕을 강조했던 바울의 신학이 뿌리를 내리고 교회 내에 가부장적 질서가 확립되면서 강화되었다.

그리스도교가 유대교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성의 문제에 있어서는 그리스도교와 유대교가 큰 차이를 보였다. 기원전 5세기 바빌론에서 귀환한 후 유대인들은 가나안 땅을 차지한 이방인들에 맞서기 위해 창세기에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내용을 추가할 정도로 출산을 장려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출산을 못하는 여자는 버림받았고 출산을 위해선 일부다처제나 첩을 두는 것을 용인했다. 아브라함이 자손이 없자 신이 하갈이라는 종을 통해 이스마엘을 얻는 것은 잘 알려진 예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임박한 종말을 예언한 예수가 가정보다는 신앙을 우선했다고 판단한 사도 바울은 스스로 독신생활을 하면서 엄격한 금욕주의를 강조하며 결혼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가졌다. 초기 그리스도교 지도자들 역시 포교의 어려움 때문에 결혼을 옹호했지만 성의 문제에 있어서는 여전히 엄격한 입장을 취했다.

특히 동성애는 가장 큰 공격 대상이었다. 가부장적 입장을 가진 교회지도자들은 동성애는 그리스, 로마의 유산 중에서 여성화된 남성의 성행위이자 남성적 우월적 지위와 사회적 성역할인 젠더의 문제에 악영향을 준다고 보았다. 이들은 동성애자들이 자신의 육체적 충동을 억제할 줄 모른다는 점에서 여성과 흡사한 존재로 여겼고 남녀의 차이를 부정하고 신의 창조질서를 거스른 자들로 간주했다.

동성애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확산시킨 것은 교회의 아버지로 불린 인물들이었다. 순교자로 유명한 폴리캅과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탁월한 신학자였던 오리게니스, 삼위일체설을 확립한 아타나시우스 같은 인물들은 동성애는 하느님으로부터 정죄 받은 행위라고 비난했다.

그 중 엄격한 금욕주의자였던 오리게네스는 성적 욕망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마태오복음 19장 12절의 "모태로부터 그렇게 태어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들어서 된 고자도 있고, 또 하늘나라 때문에 스스로 고자가 된 사람도 있다.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받아들여라"라는 예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성기를 절단하기도 했다.

313년 밀라노칙령으로 그리스됴교를 공인하고 제국을 통일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예수의 신성과 삼위일체, 마리아의 위격과 같은 교리논쟁으로 교회내부에서 물리적 충돌이 빚어지는 등 분쟁이 커지고 제국이 분열될 위기에 처하자 교회지도자들에게 교리의 통일을 명령했다. 교리가 통일되면서 교회제도나 생활에 대한 정비를 하면서 동성애는 죄악의 하나로 간주되었고 동성애자 혐의가 있는 자는 세례도 주지 않았고 설교를 듣는 일까지 금지했다.

그 중 콘스탄티노플의 초대주교로 황금의 입으로 불렸던 대설교가 크리소스톰은 성적 욕망을 원죄로 간주해서 결혼을 자녀생산과 난봉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만 한정하기도 했다. 기독교가 탄압받던 종교에서 지배종교가 되면서 그동안의 핍박을 다른 종교에 전가시키면서 이교도의 풍습으로 간주하던 동성애를 금지한 것이다.

그러나 다른 이교풍습에 대해서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유독 동성애를 배척한 것은 모순일 수밖에 없었다. 당시 그리스도교와 경쟁하다가 사라질 운명에 처했던 태양신 미트라교의 축제일인 12월 25일을 성탄절로 만들고 아스다롯 같은 중동의 여신숭배전통을 받아들여 마리아숭배사상을 만든 것은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가 공인된 이후 동성애에 대해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인물은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이다. 그는 성의 본질은 자녀생산 외에 육체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은 정죄 받을 악이라고 간주했다. 어거스틴은 젊은 시절 마니교에 9년간 몸담고 있으면서 한 여성과 교제로 아들까지 두고 돈과 명예, 성을 탐닉한 인물이었다.

어거스틴은 회심 이후 약간의 성적 쾌락도 악마의 행위로 간주했다. 어거스틴은 성욕을 억압하는 이들은 선한 자로, 성욕을 표현하는 이들은 악한 자로 규정했다. 심지어 그는 신이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성욕을 느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해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의 귀를 통해 임신을 도왔다고 해석하기도 했다.

중세교회, 동성애를 정치·종교적 탄압목적으로 활용하기도

어거스틴의 영향을 받은 가톨릭교회는 중세의 수도원운동과 독신주의를 정당화했다. 자녀를 얻을 수 없는 성적행위는 신이 아닌 자아에 대한 사랑으로 규정하면서 동성애는 커다란 죄악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동성애에 대한 교회의 원칙은 정해졌으나 성직자나 수도사들 사이에 동성애가 그치지 않자 가톨릭교회는 567년 투르공의회에서 수도사들이 침대에서 잠을 자서는 안 되고 등불을 밤새도록 켜두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693년 톨레도 공의회에서는 동성애자가 성직자일 경우 직위를 박탈하고 종신유배의 형벌에 처할 것을 결정을 내렸는데 일반인에 대한 제재사항도 상세하게 발표했다. 예를 들어 해당자의 나이나 성행위의 종류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었는데 예를 들어 키스, 상호수음, 대퇴부 성교, 구강성교, 항문성교에 대해 차등을 두어 형량을 결정했는데 입맞춤의 경우 20세 미만인 자의 단순 입맞춤은 6일, 짙은 입맞춤은 8일, 사정 또는 포옹이 수반된 키스는 10일의 단식에 처해졌다.

20세 이상일 때는 입맞춤의 형태에 구별 없이 단식형과 함께 교회출석을 금지했고 수음은 20~40일, 대퇴부 성교는 2년, 구강성교는 4년, 항문 성교는 7년의 참회를 선고받았다. 동성애외의 성행위에 대해서도 규칙을 정했는데 여성 상위 체위는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다는 자연의 법칙에 역행했다는 이유로 3년간의 참회 고행에 처해졌고 이외에 구강성교 체위와 후배위 체위도 음란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3년간의 참회 고행에 처해졌다.

교회가 백성들의 은밀한 성생활까지 깊숙이 간섭하면서 죄의식을 심어준 것은 농노제에 의한 장원경제가 정착되면서 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중세중반까지 교회권력이 세속권력 위에 있지 않았고 동성애에 대해 관대했던 게르만이나 노르만 문화가 뒤섞였던 시기였기 때문에 중벌에 처해진 경우가 드물었는데 교황권이 강력해지기 시작한 12세기부터 상황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1179년 라테란공의회 때는 동성애에 대해 높은 수준의 처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종교재판소를 통한 압박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가톨릭 역사상 최고의 신학자로 꼽히는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는 이성을 중시하는 자연 신학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동성애는 자연법칙에 위배되는 행위로 출산과 관계없는 성이라는 전통적인 입장을 고수했다. 스콜라 철학자들은 동성애 탄압에 대한 이론적인 토대를 제공하면서 동성애자들과 교황권에 도전하는 카타리파 같은 신흥종교세력을 이단으로 정죄하는 역할을 했다.

스콜라학자들은 성서의 소돔과 고모라가 동성애 같은 성적 방종으로 하느님의 심판을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이들이 자연 질서를 어긴 것을 물론 신을 모독하는 행위를 저지르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당시 형벌은 지역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당시 형벌은 점점 강해지는 추세였는데 공식으로는 화형에 처하는 것으로 되어있었고 상황에 따라 익사형, 교수형, 참수형 등으로 징벌했다. 살인죄를 저지른 것도 아님에도 가혹하게 처벌했던 것은 그 당시 세속권력과 교회권력에 도전하는 세력에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서 였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프리메이슨의 원조로 알려진 템플기사단이 1307년 동성애와 이단혐의로 지도부가 몰살당하고 조직이 강제로 해체된 사건이었다. 이들은 1307년 10월, 13일의 금요일에 프랑스 전역에서 체포당했는데 혐의 내용은 일상적으로 신을 부정했을 뿐 아니라 신입기사들이 입회식에서 십자가에 세 번 침을 뱉고 항문성교를 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혐의는 실제 기사단 내에 널리 퍼졌을 수 있는 동성애를 과장했거나 기사입문식에서 새로 입단하는 기사가 선배 기사의 척추 아래 부분에 입을 맞추어야 하는 의례를 왜곡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창과 방패를 든 두 명의 기사가 몸을 붙이고 함께 말에 올라있는 템플기사단의 상징도 동성애를 옹호했다는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템플기사단이 몰락한 것은 동성애나 이단 때문이 아니라 그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었던 프랑스의 필립4세의 음모에 의한 것이었다.

기사단은 원래 1차 십자군 전쟁 이후 성지와 순례자를 보호하고 소수의 병력으로 이슬람군대에 용감하게 맞서 신의 군대라는 칭호를 받고 교황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으면서 유럽각국의 귀족들에게 많은 돈과 토지를 기부 받았다. 십자군 전쟁이 실패로 끝난 후 기사단은 프랑스로 철수했는데 그들의 땅과 재산을 노린 필립4세는 아비뇽에 잡혀온 교황의 동의를 얻어 동성애와 이단혐의로 기사단장 자크 드 몰레를 비롯한 지도부와 수천 명에 달하는 추종세력들이 체포해 일부는 화형에 처하고 조직을 강제로 해체했다.

이들의 무고함은 2001년 교황청의 비밀재판기록이 공개되면서 세상에 알려졌고, 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코드>로 더욱 관심을 끌기도 했다. 그리고 동성애에 반발이 확산되었던 것은 흑사병의 영향도 크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성직자들은 동성애와 대재앙을 동일시했고 일부 지역에서는 흑사병으로 인구가 급감하자 베네치아 같은 도시는 동성애가 생식 행위가 아니라며 금지명령을 내렸다.

스페인의 경우는 1492년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세력을 완전히 몰아낸 후 종교정화라는 이유로 유대인들은 물론 동성애들을 추방하거나 화형, 태형에 처했다. 1517년 종교개혁으로 유럽이 신교와 구교 간에 종교전쟁이 격렬하게 진행되면서부터는 구교와 신교 간에 명예전쟁으로 확산되었는데 신교도들은 가톨릭사제들을 비롯한 교황옹호자들을 동성애자들이라고 공격했는데 이들의 주장이 먹혀들어갔던 것은 수도원이 동성들 간에 공동생활을 하는 데다 동성애가 공공연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반발로 가톨릭 진영에서는 1545년 트리엔트 공의회를 소집했는데 여기에서 교황의 권위와 성직자의 우월성을 재확인하는 한편 성직자의 성적 문란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엄격한 독신주의를 강조하고 동성애에 대한 반대 입장을 확고히 했다. 이러한 입장은 예술작품에도 영향을 주었는데 이전까지 신화속의 동성애적 내용을 자유롭게 표현하던 미술작품들에도 영향을 주었다.

식민지 개척시기에는 원주민을 동성애자로 간주해 학살

서구인들이 지리상의 발견이라고 부르는 식민지 개척시기가 도래하자 유럽의 동성애들 외에 아시아와 아메리카 대륙의 동성애자들도 수난을 받기 시작했다. 식민주의자들은 식민지를 건설하고 토착민들을 착취하기 위한 명분으로 동성애를 들먹거렸는데 인디오들은 인육을 먹는 소도미스트로 간주하고 학살했는데 파나마를 건너 태평양을 발견한 것으로 유명한 발보아(1475~15197)같은 이는 원주민을 소돔주의자라면서 사냥개의 먹이로 던져주기도 했다.

16세기 말 청나라에서 활약한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리치(1552~1610)는 복건성이나 운남성 같은 중국남부지역에서 동성애가 심하다고 보고하면서 이 같은 상황은 빈곤과 교육의 부족으로 돌리기도 했다. 동성애자들에 대한 탄압은 계몽주의가 영향력을 끼치기 시작했던 17~18세기 영국과 네덜란드에서도 여전했다. 두 나라는 칼빈주의의 영향을 받은 청교도들이 득세했는데 영국의 경우는 18세기 초 청교도들이 조직한 풍속개혁회라는 단체가 동성애들을 감시하는 운동을 펼쳤고 정부도 이에 호응해 동성애자 수백 명을 체포해 교수형에 처하거나 화형에 처했다.

네덜란드는 1730년대에 동성애자들을 소도미스트로 몰아 형식적인 재판조차 하지 않고 20개 도시에서 무려 50여 건의 화형 또는 교수형의 형식으로 처형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종교적 광기가 낳은 참혹한 결과였다. 19세기 이후에는 국가 권력이 대신 동성애 탄압에 앞장섰지만 교회도 여전히 신자들의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차원의 간섭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특히 혼외정사, 자위행위는 물론이고 공인된 부부 사이에서조차 '체위'가 무슨 말인 줄도 몰라야 했던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재위 1837~1901) 때는 성공회와 함께 주류 종교로 떠오른 감리교의 '복음주의운동'이 소시민계급의 성생활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시대는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농촌이 몰락하고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핵가족이 이상적인 가족형태로 부상하였고 일상생활의 의무가 신성시 되었다. 이와 함께 위생 및 성에 대한 엄격한 통제가 실시되어 자위는 중벌을 받아 마땅한 죄였고 동성애는 1861년까지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를 언도 받았다.

20세기에는 독일의 나치가 가장 악랄한 방법으로 동성애자들을 탄압했다. 부켄발트나 작센하우젠 같은 수용소에서 동성애자들은 유대인이나 정치범과 구별되는 분홍색의 삼각형 표식을 달게 할 정도로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멸시와 적대적 분위기를 만드는 데 일조한 것이 제국교회였다. 히틀러의 통치하에 독일교회는 제국교회로 통합했고 '아리안 민족주의 그리스도교'로 변질되었다. 독일의 어용신학자들은 예수를 유대인에 희생된 아리안으로 묘사했고 나치스의 유대인·동성애자·집시들의 학살을 지지하거나 방조했다.

전후 유럽교회에서는 동성애자에 대한 관용적 분위기가 형성되었지만 가톨릭은 그들의 입장에서 한 치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1976년 발행한 바티칸의 성윤리에 대한 문서에서 이전까지 반대해오던 입장을 재확인 하면서 명확하게 '동성애'를 정죄하였다. 1986년 교리청은 '동성애자 사목을 위하여 가톨릭 주교들에게 보내는 서한'을 발송해 모든 교회는 동성애자들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며 동성애자들이 올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교화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때 교리청장관을 맡고 있는 인물이 현 교황 베네딕트 16세다. 그는 교황에 취임한 후 세속주의와 종교 다원주의, 페미니즘에 반대하면서 동성애, 피임, 사제의 결혼, 여성의 사제 서품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베네딕토 16세는 2008년 성탄절을 앞두고 '동성애 혐오'(homophobia)를 부추기는 듯한 발언으로 거센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교황은 2008년 12월 22일 교황청 성직자들 앞에서 연말 강론을 통해 "전통적 양성관계를 넘어서는 행위는 신의 창조물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인간을 남녀로 나눈 창조의 말씀, 창조의 질서를 존중하라는 것은 낡은 형이상학이 아니다"라며 "인간의 본성을 지키는 것은 '인간 생태학'의 근본"이라고 말했다. 열대 우림을 보호하는 것에 못지않게 인간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미국의 경우는 근본주의 세력이 동성애를 반대했고 신흥교단으로 몰몬교로 알려진 '말일성도 예수그리스도교회'와 '여호와의 증인'도 동성애는 가장 기피하는 죄악 중에 하나로 간주했다. 전후에는 미국남부를 중심으로 하는 근본주의 세력이 동성애 반대운동을 펼치고 있다.

이에 대해 진보적 교단인 성공회는 동성애를 가장 적극적으로 수용해 전 세계 교회의 주목을 받고 있다. 미국 성공회는 2003년 동성애인 진 로빈슨 신부를 뉴햄프셔 교구 주교로 임명하고 일부 교구에서는 동성애자들의 결혼을 인정하는 등 매우 전향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예수는 동성애에 대해 죄로 간주하지 않았다

현재 미국 성공회의 관구장을 맡고 있는 캐서린 제퍼츠 셔리 네바다 주 주교는 "동성애는 죄가 아니며 동성애자들도 신에 의해 동성을 사랑하도록 창조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하느님은 우리에게 서로 다른 재능을 부여했는데 일부는 같은 성의 사람들을 향하도록 명령된 애정을 갖고 이 세상에 왔으며, 일부는 다른 성의 사람을 향하도록 된 애정을 갖고 이 세상에 왔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이처럼 동성애는 낙태, 안락사 문제 등과 함께 아직까지 그리스도교 내부에서 뜨거운 감자로써 논쟁의 중심에 서 있다.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척도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의 창시자인 예수는 동성애에 대해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다. 침묵을 동조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전인수적이라고 비판할 수 있지만 예수가 무한한 사랑과 자비를 설파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는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정결의 정치학"을 폭로하고 민중들에게 신을 한량없이 자비한 존재로 소개하고 성전체제의 절대화와 정결과 불결을 선악으로 나누는 차별의 정치학이 신의 영광을 가로챈 것이라고 비판했다. 신에 대한 예수의 이런 믿음은 사람들로 하여금 편견과 몰이해 속에 살고 있는 이들의 고통에 동참하도록 했다.

예수는 분명히 자신의 정체성을 우주를 포용할 정도로 확장하면서 느낌과 배려로 성전권력과 바리새인들의 냉정하고 무자비함을 대신해 자기 땅으로부터 유배된 자들을 존중하고 어디서나 친절하게 맞이했다. 만약 예수가 40년 전에 스톤월에 있었다면 예수는 분명히 동성애자들과 함께 경찰에 맞서 싸웠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를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그리스도교인들은 여전히 동성애자들을 기피하고 정죄하고 있다. 동성애혐오는 예수가 가장 싫어했던 바리새주의자들의 율법주의와 가부장적 유산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예수의 뜻을 거스르고 있는 셈이다. 만일 그리스도교가 예수를 구세주로 인정한다면 동성애자들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자연스럽게 동성을 사랑하며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동성애로부터 나오는 차이와 다원성은 상호존중을 바탕으로 하는 시대의 당당한 흐름이기 때문이다.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백찬홍 / 한국외대 법학과, 감신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감리교청년회전국연합회와 한국기독청년협의회 상임총무를 지내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 인권위원 및 국제위원, 정의평화를 위한 기독인연대 집행위원, 개혁을위한종교NGO네트워크 기획위원장, 제3시대그리스도연구소 상임위원을 지냈다. 현재는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KoSIF) 및 옴부즈맨포럼 운영위원으로 있다. 지은 책과 논문으로는 <역사.예수.교회>(공저), <미국기독교우파와 이라크전쟁>, <보수교회 극우행보, 어떻게 볼 것인가>, <국기독교의 기복신앙의 현재와 미래>, <기독교운동의 현황과 향후 전망>, <한국기독교와 생활윤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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