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RGENT! URGENT!

긴급 상황 발생이다. 택시 모뎀에 두 번씩이나 강조하여 띄우는 데는 그 만큼 긴박함이 따르는 일이 아닌가. 이른 아침부터 긴장이 곤두서는 일이었다.

Passport delivery?

바쁜 출근 시간에 사람을 태우는 일도 아니고 손님 집에 두고 온 여권을 찾아 급히 달려가 전해 주는 일? 그것도 멀리 떨어진 국제선 공항 청사에서 발 동동 구르며 기다리고 있을 얼굴도 모른 이에게 전달해 주는 일이라니…

시간은 아침 6시 40분. Northcote에서 모터웨이(고속도로)에 들어서기 바로 전 택시 call을 받고 방향을 되돌려 Chatswood 손님 집으로 가는데 그만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 모터웨이로 향하는 Onewa 로드에 끝도 없이 빽빽하게 줄을 잇는 출근차들로 주차장을 방불케 하는 정체현상이 눈에 들어오는 게 아닌가.

서둘러 손님 집에 가서 여권을 받아 갖고 나온다 해도 어떻게 저 정체의 꼬리에서 벗어나 모터웨이로 진입을 하나. 시간 싸움하는 경우라 심히 염려가 됐다. 손님 집에 다다르니 잠옷 바람으로 그의 아내가 나와 여권을 건네주면서 늦지 않게 전해 달라며 간곡히 부탁했다.

어둠도 걷히기 전 왜 이리도 정체가 심할까? Onewa Rd 맨 꼭대기까지 이어진 차량 행렬 꽁무니에 붙어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데 회사에서 긴급 전화가 왔다. 현 위치가 어디냐고? Northcote Onewa Rd라 하니 아직도 거기냐고 성화다. 차가 밀린다 하니 손님한테 또 전화를 받았다며 최대로 빨리 움직여 보란다.

어련히 알아서 하려는 내 맘도 타지만, 기다리는 손님도, 중간에서 연결 관리하는 사무실 콘트롤러도 몸이 타기는 마찬가지다. 국내선이라면 혹시 놓치더라도 뒤이어 있는 다음 비행기를 타면 되지만 국제선은 그게 불가능하지 않은가. 7시를 넘어서면서 버스 전용 차선제가 시행되다 보니 두 줄로 가던 길을 한 줄로 가게 돼 그야말로 더디기가 마치 굼벵이 기어가는 듯 했다.

염려는 확실한 현실로 나타나고 오히려 손님보다 더 발을 동동 구르는 입장이 돼 버렸으니 아침부터 이 얼마나 속이 타는 일인가. 어쨌든 급한 불이 내게 안겨졌으니 그 불을 끄던가 아니면 내가 타던가…

아! 이럴 땐 어떡한다? 특별 케이스는 없을까? 하늘로 날수만 있다면… 급기야 비상수단을 쓰게 됐다. ‘용서 하소서, 제가 죄를 짓고 있나이다…’ 헤드라이트를 하이빔으로 켜고 비상 깜빡이에 좌측 버스 전용 차선에 들어섰다. 교통 규칙을 넘어 서고 있었다. 평상시 나 역시도 고운 시선을 주지 않았던 버스 전용차선 무법자가 돼 버리다니?

버스 전용 차선 위반하면 1백50달러 벌과금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차선 단속원 만나면 보여주려고 창문 유리를 내리고 한 손에 여권을 들고서 버스 차선을 홀로 타고 내려갔다. 정체된 차선에서 교통법규 위반하는 얌체 택시를 바라보는 듯한 시선이 뜨거워 얼굴이 화끈거리기까지 했다.

‘손님도 안 태운 빈 택시가 돈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저만 혼자 빨리 가려 하다니…’ 뒷덜미로 막 비난의 화살이 쏟아지는 듯 했다. 좋은 아침에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다. ‘남이 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라더니 이게 바로 그 짝이 아닌가. 그렇다면 나 역시 맑은 물을 구정물로 만드는 한 마리 미꾸라지?

그러다가도 공항에서 애타게 기다릴 손님과 그의 아내를 생각하니 그냥 지나칠 수 밖에 없었다. 벌금을 물고라도 가야 된다는 생각에 한참을 쭉쭉 내려갔다. 아니나 다를까 멀찍이 전용 차선이 끝나는 곳에서 숨어 단속하던 차선 단속원이 손짓으로 불렀다. 아이구 올 것이 왔구나 생각하고 단속원 앞에 순종하는 죄인이 돼 다가갔다.

미리 준비한 여권을 보여주며 긴급상황이라 설명하는 순간 모발폰이 울렸다. 공항에서 눈이 빠져라 기다리던 손님 전화였다. 아직도 Onewa Rd 인데 버스 전용 차선 단속원에게 걸렸다고 했더니 빨리 바꿔달래서 엉겁결에 단속원 손에 모발폰을 넘겨주며 받아보라고 했다. 단속원은 처음엔 무시하고 딱지를 끊으려다 말고 마지못해 전화를 받아 들었다. 잠깐 통화를 하더니만 정황을 듣고서 모발폰을 불쑥 내게 건네주면서 빨리 가보라고 길을 열어줬다. 제대로 걸려서 한 건 하려던 참이었는데 그 상황을 넘어서야 한다는 마음의 법이 교통 법규를 뒤로 제쳐놓게 한 모양이었다. 중요한 국제회의 차 떠나는 급한 손님 일을 인정해서 선처를 해준 것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쉬며 하버브리지를 타고 건너오는데 아침의 싸한 기운이 온 폐부 깊숙이 밀려 들어왔다. 조금 전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에 달아오른 얼굴은 물론 굳어 버린 듯한 뒷덜미에 두근거린 가슴까지 바다 바람에 탁 트였다. ‘세상에 우연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간절한 마음이 모여 한곳으로 향하면 납덩이처럼 굳은 마음도 따스하게 녹여 주는 듯싶다. 일이 잘 되도록 떨어진 두 곳을 하나로 연결시켜주는 인연의 다리가 바로 우연이 아닌가.

차선 단속원에게 딱 걸렸을 때, 어쩜 그 순간에 꼭 맞게 손님이 전화를 해서 그 간절한 마음이 직접 전달되게 하는가. 그리고 그 간절한 심정을 하나도 땅 바닥에 떨어뜨리지 않고 받아들이게 하는가… 이런 일을 겪을 때 마다 보이지 않는 절대자의 어떤 손길을 새삼 느끼게 된다. 우리의 선한 양심 안에 계시는 그분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다가갈 때 그분은 우리의 막힌 곳을 다 열어주신다.

나만을 위해 남에게 불편을 끼친다면야 이기적인 행동이다. 그러나 어려운 상황에 있는 다른 이와 한 마음이 되어 눈앞의 어려움을 감내하며 주변의 오해에 주눅들지 않고 묵묵히 나아가면 ‘우연’이라는 선물로 그 분은 꼭 필요한 때에 우리 앞에 나타나신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사람 사는 맛을 온 몸으로 느끼게 된다.

하버브리지를 건너자 공항까지 다행히도 길이 잘 뚫려 상쾌한 마음으로 달려서 곧 공항청사에 다다랐다. 초등학교 운동회 때 8백m 계주를 하던 운동장이 펼쳐져 보이는 듯 했다. 멀리 뒤처진 위치에서 바통을 받은 채 있는 힘껏 달리다 넘어지며 내팽개쳐진 바통을 주워 들고 마지막 주자에게 바통을 탁 넘겨주듯이 그 손님 손에 여권을 넘겨줬다. 준비 자세로 기다리던 손님은 여권 바통을 이어 받자마자 쏜살같이 공항 청사로 돌진해 들어갔다. 운동장에서 지켜보던 학생들하며 관중석의 선생님들과 학부모님들이 모두 일어나 하나가 되어 외치는 함성과 박수소리가 온 학교에, 아니 공항 청사에 울려 퍼졌다.

우리 사는 이 세상에서 천국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는지. 택시 운전을 하면서 이렇게 때론 궁창의 늪에 빠져 힘겹게 허우적대다가도 하늘을 나는 독수리가 돼 탁 트인 세상을 바라볼 수 있으니… 지금 바로 여기에 그분이 함께 하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삶이 있는 게 아닐까.

/백동흠 2008-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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