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숙 수녀] 8월 19일(연중 제20주일) 요한 6,51-58

익숙한 세계 속에서 예수의 말과 행동은 끊임없이 충돌과 불화를 낳았다. 예수를 따랐던 많은 사람들이 떠나가고 또 돌아왔다. 예수는 낡은 것, 폐기해야 할 것과 새로운 것,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할 것 사이에서 늘 논란의 대상이고 중심이었다. 

오늘 예수의 가르침을 두고 벌이는 ‘말다툼'(요한 6,52) 역시 그러하다. 유대인들에게서 문제는 ‘살과 피’가 지닌 진의에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로 인해 자신들이 고수한 신념체계가 뒤흔들리고 있다는 사실, 듣도 보도 못한 일들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충격적 사실이 더 크고 두려웠다. 사람들은 ‘그’를 따를 것인지 아니면 떠날 것인지, 그와 운명을 함께 할 것인지 배척할 것인지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 요한복음 전체를 통해 드러나는 예수의 길은 한마디로 ‘소요’였다. 요한복음 1장의 서문은 얼핏 웅장하고 장엄하게 시작하지만 중간 중간 예수가 걸어 나갈 운명의 서막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그분께서 세상에 왔고, 세상이 그분을 통해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다"(1,9-10), 아니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1,11)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고, 그 빛이 어둠 속에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1,4-5)

그렇게 깨닫지 못한 ‘어둠’은, 요한이 언급하고 있는 이 ‘어둠’은 ‘악마적’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어둠은 요한의 묵시록에서 세계를 파괴하는 ‘붉은 용'(묵시 12,3-18)으로 나타나는데 꼬리 하나만으로도 ‘하늘의 별을 삼분의 일이나 휩쓸어 버리는’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다. 그러니 요한이 언급한 ‘어두움’의 이미지는 단순히 관념적 상징물이 아니다. 그는 이 어둠이 민족과 교회와 세계를 위협하고 파괴해 버리리라는 것을 목전에서 바라보았다.

현대의 인류는 과거 인류와 비교하면 거의 전지전능에 가깝다. 손가락 하나만으로 생사여탈을 쥐락펴락할 수 있다. 아우슈비츠 문턱에서만 벌어진 일이 아니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김정은과 트럼프는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농담(?)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그들은 서로 자신들의 책상 위에 ‘핵 버튼’이 있어서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상대 나라 날려 버리는 건 식은 죽 먹기라고 으름장을 놨다. 확실히 ‘붉은 용’의 비전은 오랜 상상 속의 존재가 아니라 실제 우리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생물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요한의 묵시록은 여전히 유효하다. 우린 이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무엇이 ‘빛’이고 무엇이 ‘어둠’인지, 무엇이 하느님의 힘이고 우상의 속임수인지, 그래서 파국과 구원의 길이 어떻게 다른지를 구별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며 살고 있다.

이탈리아의 작가이자 화학자인 프리모 레비,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이기도 한 그는 자신의 시집, "살아남은 자의 아픔"에서 ‘천국과 지옥’에 갈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밝혀 놓았다. 아마도 이 시를 읽는 사람은 약간의 해학과 풍자가 섞인 이 시가 너무 사실적이라는 데 놀랄 수 있고, 자신이 어떤 범주에 들어가 있는지 호기심 반 눈여겨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레비는 작가들을 위한 또 다른 시 한 편에서도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던지는데 이 한마디가 ‘천국과 지옥’, 아니 "살아남은 자의 아픔" 전체를 건드린다. 이것은 마치 천국과 지옥이 어떻게 결판나게 되었는지, 지옥으로 가는 자들이 왜 ‘유죄’인지를 보여 주는 최종 판결문처럼 들린다.

 

누가 지옥으로 가야 되는지 말해 주겠다.
미국 언론인들과 정치인들, 회계사들과 재정관들
종교인들, 기업 경영인들과 대부분의 의사들
수학선생들과 고양이들
그리고 쓸데없이 아침 일찍 일어나는 사람들.
천국으로 가야 할 사람들도 말해 주겠다.
아이들을 비롯한 구두닦이 소년들과 연인들
어부들과 철도노동자들, 와인감별사들과 병사들
러시아인들과 발명가들, 말들과 닭들
그리고 새벽 출근전차에서 하품하며 조는 사람들. (레비, ‘천국과 지옥’)

그리고 그대 작가들이여,
글을 쓸 땐 부디 ‘의심하지 않는 죄’를 짓지 말라.
이 세상에 당연한 건 아무것도 없으니... (레비, ‘의심하지 않는 죄’)

 

박제된 새는 아름다우나 날지 못한다. (이미지 출처 = Wikimedia Commons)

이천 년 전 대놓고 예수를 떠나게 만들었던 ‘살과 피(요한 6,53-58)’의 논쟁도 ‘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살아 있는 빵'(6,51)의 주제도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겐 더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듯하다. 적어도 그리스도교 내부에서 예수는 어느덧 누구로부터 반대 받는 표적이 되긴커녕 온 교회의 지극한 존엄이자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성체신심 역시 신앙의 최고 정점에 오른 지 이미 오래다. 그런데 이 당연한 신앙적 진리가 영 불편하다. 굳이 간디를 내세우지 않더라도, 많은 세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는 존경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교회 안팎에서 벌어지는 논쟁도 예수를 떠나게 만드는 것도 더는 예수의 “몸과 피”가 아니다. 오히려 논란의 중심에 “교회”가 들어왔다. 예수를 가리는 것들, 그분 ‘몸과 피’의 순환을 막는 것들은 무엇인가? 혹시 살아 움직일 수 없도록 박제시킨 우리 신앙이 되려 우릴 역습해 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럴 때 레비의 말을 그대로 인용해 봄 직하다. 비록 이것이 평화로운 교회에 파문을 일으키는 행위가 된다 할지라도 말이다. 지옥행 목록에 ‘종교인’들이 내걸리는 창피한 일만큼은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그대 신앙인들이여, ‘의심하지 않는 죄’를 짓지 말라. 어떤 신앙행위도 당연한 건 아무것도 없으니.”

강신숙 수녀

성가소비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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