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6일 (금) 오후 7시 소사3동 성당에서

인사연(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회원으로 활동하다, 1991년 6월 민중운동 탄압 속에 희생된 故유재관 루카 열사 추모미사가 (사)우리신학연구소 주관으로 2009년 6월 26일(금) 오후 7시 소사3동 성당에서 열릴 예정이다.

▲ 유재관 열사
이 추모미사는 민주화운동 희생자에 대한 명예회복 과정에서 받은 보상금이 출발이 됐다. 이 보상금은 세상을 위해 투신할 평신도 양성에 쓰이길 바라는 가족들의 뜻에 따라 평신도 장학기금으로 구체화되었고 이를 종자돈으로 기금 조성을 계속해 현재 4명의 평신도들이 장학금을 받고 공부를 하는 중이다. 올해 추모미시는 미사에 앞서 생활성가 가수인 김정식(로제리오)씨의 작은 추모음악회도 함께 있을 예정이다. 

유재관 씨는 1984년 학원자율화조치로 수배 해제되어 학회건설에 노력하다가, 사회변혁을 이루기 위해서는 노동자의 역량강화가 절실하고 젊은 지식인으로서 이에 적극 동참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노동현장에 뛰어들었다. 당시 유재관 씨는 구로지역을 거쳐 인천으로 가게 되고, 주로 목재단지 근처에 방을 얻어 동료들과 함께 생활하기 시작했다. 목재 노동자회와 인노회, 인사련의 활동을 했다.  

1991년 6월 사상 유례 없는 금권, 관권선거로 민자당이 압승한 광역선거 이후에 노태우정권은 폭압적인 공안통치를 노골적으로 저지르고 있었다. 인천 동서식품에 1천여명의 경찰을 투입하여 노동자들을 폭력적으로 연행하였고, 안산의 동영 알루미늄에는 4백여명의 경찰을 투입하여 강제해산시켰다. 또한 26일 인하대 총학생회장이 교내에서 불법적으로 강제 연행되었고, 27일에는 인천대에 160여명의 백골단이 투입되어 학생들을 폭력적으로 강제 연행하던 중, 학생들에게 중상을 입히는 만행을 저질렀다.

▲ 유재관 열사의 묘
이러한 엄혹한 시기인 1991년 6월 27일 1시경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에서 정기총회를 준비하던 유재관 씨는 새벽 1시 50분경 인천대 공권력 투입소식을 접했다. 이때 ‘인사련’도 침탈당할 것이라는 판단을 내린 유재관 씨는 자칫 총회자료가 압수당하게 되고 조직에 대한 큰 타격이 입을까 염려되어 자료를 정리하고  급히 사무실을 나오던 중, 3층 유리창을 열고 뛰어내렸으나 실족하여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급히 병원으로 옮기던 중 운명하였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유재관 열사 약력*

1962년 경기도 안성군 서운면에서 아버지 유병수, 어머니 반귀분 의 2남 1녀중 장남으로 출생

1969년 서울 아현국교 입학
1975년 서울 환일중학교 입학
1978년 서울 한성고등학교 입학
1981년 고려대 사학과 입학
1983년 11월 학내시위 주동자로 장기수배
1984년 4월 '학원자율화조치'로 수배해제 및 복학
1985년 고려대학교 졸업 이후 구로공단에서 노동자생활 시작
1986년 방위병으로 근무 후 인천 신흥목재(우아미가구) 입사
1987년 신흥목재 어용노조 민주화투쟁으로 해고
1988년 3월 인천부천민주노동자회 분회원으로 활동
1988년 4월 신명물산(주) 프레스공으로 입사후 '상록수'라는 친목회 결성
1989년 목재노동자회 상근실무자로 활동-"아름드리" 친목회 결성 주도
1990년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 회원으로 가입하여 활동
1991년 6월 인사련 총회준비위원과 4기 노동강좌 담임으로 활동
1991년 6월 27일 공안탄압의 와중에서 총회준비위 회의도중 경찰이 침탈한 다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조직의 문건 등을 끝까지 챙기면서 피신중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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