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숙 수녀] 8월 5일(연중 제18주일) 탈출 16,2-4.12-15; 요한 6,24-35

오늘부터 격주 목요일마다 1년간 성가소비녀회 강신숙 수녀의 강론이 연재됩니다. 강론을 맡아 주신 강신숙 수녀에게 감사드립니다. -편집자

 

예멘 소녀 살와(19)는 제주도로 오기 전 이미 여러 곳을 전전하며 떠돈 난민소녀다. 다음은 그녀가 인터뷰 중에 떠올린 가장 행복했던, 예멘 남쪽 바닷가 외갓집에서의 추억이다.

“....이모랑 같이 지내던 시간이 다 즐거웠어요. 가끔 아침 7시에 바다에 같이 가서 장을 봐 오기도 했고요. 저녁이면 바다에서 갓 잡은 신선한 생선에 소금과 향신료를 뿌려서 구워 먹었어요. 그걸 마지막으로 먹은 게 벌써 5년 전인데 전 지금도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어요. 우리는 어디든 함께 다녔어요. 공원이며 시장이며 레스토랑이며 가게며…. 이모 옆에 찰싹 붙어 앉아 있는 게 참 좋았어요. 늘 같이 놀고 음악도 같이 들었어요. 지붕 위에 올라가서 국수를 먹기도 하고, 날이 더울 때는 가끔 지붕 위에서 같이 잠들기도 했어요. 수시로 단전이 되었는데 그럴 땐 밤하늘의 별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죠. 그러면 외삼촌이 따뜻한 우유를 데워서 줬어요. 그 모든 날들이 정말 그리워요."(2018. 7. 22. <한겨레>)

살와가 회상한 이 ‘최고의 행복’이란 것에 마음이 저릿해졌다. 우리에겐 너무 소박한 일상이, 아니 그냥 마음만 먹으면 이룰 수 있는 일들이 그녀에겐 생애 최고의 순간이었다니.

제주도에 도착한 살와와 그의 동족들이 지금 난민 판정대 앞에 서 있다. 그들에겐 각오한 일이었겠으나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는 여전히 낯설고 두렵다. 그래서인지 그 반응은 방어적이다못해 거의 적의에 가깝다. 우리뿐만 아니다. 지금도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어오는 난민들에게 세계인들은 점점 더 강퍅해지고 있다. 난민들은 어느새 천덕꾸러기, ‘공공의 적’들이 되었다. 유럽 대부분의 국가가 빗장을 걸어 잠그는 법을 통과시키고 있으며, 극우정당들이 난민추방을 앞세워 세를 키우고 있다. 우린 ‘살와’의 최고 행복이란 것들, 우리에겐 그저 하찮은 일상일 수 있는 것들, “푸른 바다, 저녁 밤하늘, 마을의 골목길, 바람, 공기, 숲, 따뜻한 우유 한 잔”조차 나눌 마음이 없다. 우리가 내다 버린 것들, 기억에도 남아 있지 않은 그 하찮은 것들이 그들에겐 얼마나 눈물겹고 절실한 일이던가.

우리에겐 그저 하찮은 일상일 수 있는 것들조차 나눌 마음이 없다. (이미지 출처 = Unsplash)

오늘 탈출기에서 만나를 먹게 된 이스라엘이야말로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죽기 살기로 탈출한 난민 중의 난민들이었다. 그들이 겪은 광야의 절박함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극한 처지였다. 이스라엘은 아사의 위기에서 하느님께 울부짖었다. 폭력과 착취로 점철되었던 노예의 삶이 그나마 나았다고 울부짖었다. 적어도 굶어 죽지는 않았을 거라고 절망했다. 그런데 그때 그곳에서 대지를 뒤덮은 쌀가루(?), 하얀 고수씨를 만났다. 그것은 기적, 신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극적이고 감동적인 기적이었다. 한 살배기, 두 살배기들이 더는 굶주림을 겪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다. 만나는 그렇게 찾아왔다. 자녀를 먹이고 가족이 살아갈 수 있는 최고의 음식으로 왔다. 그때, 이스라엘은 자신을 돌보는 신이 누구인가를 비로소 똑똑히 알아보게 되었다. 그렇게 목숨을 연명하고 나서야 그들은 약속의 땅으로 진일보할 수 있었다. 만나로 인해 남은 인생의 여정을 설계할 수 있게 되었고, 희망은 그 뒤로 이어지는 수만 가지 꿈의 파노라마로 채색되었다. 만나는, 예수의 몸인 성체는 그렇게 광야 한복판에서 이스라엘이, 오늘날의 난민들이, 우리의 살와가 꿈꾸며 살아가는 원천이었다.

예수는 목자 잃은 양들처럼 자신의 주변에 몰려든 군중들에게 ‘빵의 기적’을 베풀었다. 여기서 ‘목자 잃은 양들’이라는 표현은 물 없고 거친 광야를 떠돌던 이스라엘 백성과 겹쳐진다. 양떼에게서 목자를 잃는다는 것은 곧 사지로 내몰렸다는 뜻이다. 예수가 바라본 이스라엘은 그랬다. 목자를 잃고 떠도는 양떼를 바라보는 예수의 심정은 가벼운 한 끼의 식사 해결에 있지 않다. ‘빵의 기적’은 공장에서 토해져 나오는 상품의 기적, 물질적 풍요 따위가 아니다. 군중은 예수의 진심을 벗어나 ‘이런 능력’에 혹했다. ‘빵의 기적’은 목숨을 구하는 것과 같은 무게를 지닌다. 예수는 양들의 궁극적 안녕을 위한 방법으로 그렇게 자신을 내어 놓았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요한 6,35)이다.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모두가 생명을 얻는 것"(6,39)이다. 이것은 목자가 양떼를 위해 할 수 있는 최고의 선언이며, 예수가 이 땅에서 하고자 한 결정적 미션이었다.

그것은 바꾸어 말하면 이런 것이다. 아무도 죽어서는 안 된다. 태어난 모든 생명은 수명껏 세상의 아름다움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아무도 울타리 밖으로 쫓겨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며, 멸시나 조롱을 받아서도 안 된다. 이제 내가 너희를 그렇게 해 주겠다. “모두들 내 그늘로 들어오라....” 성체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이토록 사람을 사랑하고 품어 안으셨던 예수를 기억하고 회상하는 일이다. 그분처럼 아주 작은 행위나마 나 역시 낯선 사람들을 내 울타리 안으로 포용하고 함께 살아가겠다는 고백이다.

결론은 그렇다. 예수가 살아 있는 빵임을 믿고 고백하는 일은 말처럼 그리 간단치 않다는 것. 오늘 우리가 모신 성체는 우리를 이 첨예한 사건의 경계로 밀어낸다는 것. 그리고 우리의 안전망을 부수고, 담을 뛰어넘는 저 위험한 사람들을 받아들일지, 아니면 다시 사지로 내몰 것인지의 결단을 촉구한다는 것이다. 지금껏 거룩한 미사 중에 모셨던 성체의 내막은 사실상 나의 모든 안전 지축을 뒤흔드는 일이다.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모두가 생명을 얻는 것”, 그일에 동참하라는 준엄한 명령인 것이다.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서 성찬례가 올려지고 있다. 나 또한 매일 그 거룩한 예식에 참예한다. 그런데 오늘은 정말 솔직히 내 자신에게 물어봐야겠다. 예수를 찾아나선 일이 무슨 기대 때문이었는지.

강신숙 수녀

성가소비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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