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티에레스 신부] 7월 29일(연중 제17주일) 요한 6,1-15

하느님의 말씀은 양분을 주는 빵이지만 빵은 또한 하느님의 말씀이기도 하다.

빵의 말씀

예수님의 자세는 요한 복음에서 징표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징표란 그것이 나타내는 것보다 어떤 더 심오한 것을 말해 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분의 자세는 많은 군중을 불러 모은다.(요한 6,1-2)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있고, 그분은 군중들이 허기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본다. 아마도 지나치게 상식의 차원에서 보면서, 필립보는 그들에게 빵 살 돈이 없다고 말한다. 이백 데나리온으로는(1데나리우스가 노동자의 1일 임금이다. 요한 6,7 참조) 충분치 않다. 안드레아는 한 소년이 가진 것을 보고 주저하며 사람들이 무언가 가지고 있다고, 충분치는 않지만, 말한다. 다섯 개의 빵과 생선 두 마리는 많은 것이 아니다.(6,8-9) 참으로 별것 아니지만, 우리는 우리의 가난이 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통해 일한다. 군중들을 풀 위에 앉도록 하라고 요청한다. 약 오천 명이 둘러앉는다. 사람들을 앉게 한다는 것은(요한은 그들이 앉았다고 세 번 말한다) 그들이 주인의 명령대로 서서 급하게 먹도록 강요되는 하인들이 아니라, 존엄성을 가진 자유인으로 대우받는 것을 뜻한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가진 빵 몇 개를 받는다. 그리고 감사를 드리고 빵을 나눈다.(6,11) 요한은 주님께서 빵을 늘렸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모든 사람에게 충분하게 빵이 나누어진다. 왜냐하면 무한한 사랑이 그런 충만함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이 만족한다.

빵의 말씀. (이미지 출처 = Pixabay)

제1독서에서, 우리들은 엘리야가 똑같은 일을 한 것을 알게 된다. 그도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인에게 요청하고 똑같은 대답을 듣는다. 충분치 않다는 대답이다. 예언자는 되풀이 말한다. 모든 사람이 먹고 남았다. 빵을 나누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말씀이다. 신자유주의 경제 시대인 요즈음, 수많은 사람이 성장하는 체제로부터 제외되고 있다. 사람들은 거기에 참여하지 못하며 혜택도 누리지 못한다. 사람들은 소모품이 된다. 실상, 그들은 경제의 효과적 기능에 장애물이 될 뿐이다. 우리는 가장 기본적인 요구가 모든 사람에게 충족될 수 없으며,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가능할 뿐이라고 말한다. 어떻게 나누어야 하는지 배우라는 초대는 우리로 하여금 아무도 배제하지 않는 사회를 건설하도록 자극을 주어야 한다.

삶은 친교, 일치다

요한에 의하면, 모든 사람이 다 먹고도 남은 음식이 있다. 사랑은 항상 풍요롭다. 남은 것들이 열두 광주리를 채운다. 이것은 의미심장한 숫자다. 열둘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열두 사도들, 전체 백성을 의미한다.(요한 6,12-13) 그러나 사람들은 잘못 이해한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한다.(6,15) 그들은 이해할 시간이 필요하다. 점차, 주님의 징표들은 점점 더 그들에게 명백해질 것이지만, 그동안 예수님은 물러난다. 남은 것은 빵을 나누는 예수님의 사랑의 행위이며 그 사랑의 행위는 우리가 역사를 통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계속하는 사명이다. 풀밭 위에 남은 열두 개의 광주리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행위를 계속하라는 초대를 뜻한다.

바오로는 주님의 메시지의 의미를 명료하게 알려 준다. 예수님을 통하여 나타나는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를 하나의 몸으로, 하나의 희망으로 만들어 준다.(에페 4,1-6) 이것은 몸의 다른 부분들에서 상호적 섬김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들에게 물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는 이 찢겨 나간 세계 속에서 그렇게 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우리가 가진 것이 아무리 작아도, 기꺼이 나눌 마음이 있는가? 빵을 나누는 것, 그것은 생명의 말씀이다.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신부
1928년 페루 리마 출생. 의대를 졸업한 뒤에 사제로 살기로 결단했다. 사제가 된 뒤에는 리마 가톨릭대학에서 신학과 사회과학을 가르치면서 리마 빈민지역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목을 했다. 대표적인 해방신학자로 빈민의 관점에서 복음을 증거해 왔다. 주요 저술로는 "해방신학"(1971)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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