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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개혁과 가톨릭언론 -<가톨릭뉴스 지금여기>를 중심으로10주년 저널리즘 세미나 1 - 한상봉 발표, 김유철 토론

<가톨릭뉴스 지금여기>는 '한국 교회를 있는 그대로 쓴다'는 저널리즘의 원칙으로 교회쇄신을 지향해 왔습니다. 창립 10주년을 맞아 내일 더욱 충실한 언론이 되기 위해 저널리즘 공개 세미나를 열고 있습니다.

첫 세미나는 7월 25일(수)에 전 주필이자 편집국장이었던 한상봉 씨의 발표, 김유철 씨의 토론과 독자들의 활발한 질의응답이 있었습니다. 가톨릭언론이 가야 할 길을 함께 고민하면서 깊이 있는 토론을 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발제문과 논평문, 그리고 논평에 대한 답변 등 3가지를 아래와 같이 더 많은 독자와 나누고자 합니다. -편집자 

 

제1회 저널리즘 공개 세미나에 참석한 애독자들. ⓒ김수나 기자

발제 : 교회개혁과 가톨릭언론 -<가톨릭뉴스 지금여기>를 중심으로

한상봉(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장, 도로시데이영성센터 코디네이터

 

1. 목소리 없는 자의 목소리

그리스도교 신앙은 요체는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계셨다는 강생신학에 기초한다. 왜 요한 복음의 저자는 ‘하느님=말씀’이라는 공식을 사용하였을까? 창세기에서는 하느님께서 말씀으로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전하고, 모세가 그 하느님을 알아본 것도 불타는 떨기나무 아래서 그분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 말씀의 요체가 “가서 이집트에서 고통받는 히브리 노예들을 구출하라”는 명령이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당신이 말씀으로 창조하신 백성들이 울부짖었기 때문이고, 그 탄식을 보고 듣고 느끼신 분께서 행동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백성들에게 목소리가 없을 리 없지만, 정작 그 소리를 경청할 사람이 없다면 그 소리는 없는 것과 다름없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직접 발언하셨고, 이후에는 예언자들을 통해 당신의 음성을 들려 주셨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발언’과 ‘경청’ 사이에 놓여 있는 신앙이다. 우리가 ‘기도’라고 부르는 것조차 하느님과 나누는 발언과 경청의 상호작용이다. 예수님조차 고난과 죽임의 시간에는 말이 별로 없으셨다. 그 역시 그 시대의 가난한 민중들처럼 ‘목소리를 빼앗긴’ 사람처럼 보였다. 예수님의 부활 역시 살해당한 말씀이 다시 목소리를 회복하여 “마리아야!” 하고 발음하기 시작한 사건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신앙은 목소리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경배하고, 목소리를 잃어버린, 또는 침묵을 강요당하는 백성들을 위해 발언하신 예수님의 발언을 되풀이함으로써, 백성들이 다시 발음하게 만드는 신앙이다.

 

2. 제도권 한국교회의 언론

한국교회에서 살해당한 하느님의 목소리, 목소리 없는 백성들의 목소리를 되찾기 위한 움직임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한국교회는 <가톨릭청년>, <경향잡지>, <가톨릭신문>, <매일신문>, <평화방송/신문>이 있었지만, 제도권 언론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 주었다. 정치권력의 추세를 따라서 일제에 식민정책에 동조하거나, 군사독재정권과 밀착했다. 그곳에 예언자는 없고, 관료적 성직주의가 밀실에서 속닥거렸다. 교회권력은 늘 정치권력과 자신을 대조하며 흉내 내기에 바빴고, 정치권력보다 그다지 참신해 보이지 않았고, 다른 목소리도 가지지 못했다.

그나마 제도권의 늪에서 봉긋이 솟아올라, ‘시대의 징표’를 읽었던 발언/매체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김수환 추기경이 마산교구장 시절에 창간한 <사목>이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성과를 알리고, 그분이 서울교구장 시절에 교구 홍보국에서 발행한 <새벽>이 그것이다. 이게 가능했던 것은 물론 생각 있는 교구장 주교와 함세웅 신부와 같은 의식 있는 사제가 홍보국장으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연장선에서 창간한 <평화신문>이 몇 해 안 가서 창간정신을 배신했던 경험이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나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르겠다.

 

3. 비제도권 한국교회의 언론

제도권 교회의 언론과 다른 목소리를 담아내기 위해서는 평신도들의 자율적인 독립언론이 필요했다. 서울대교구에서 발행하던 <새벽>과 쌍을 이루던 천주교사회운동협의회의 기관지 <평화의 일꾼>이 모델이겠다. 그 뒤 평신도 그룹에서 <공동선>이 창간되었다. 당시 대부분의 진보적 가톨릭운동은 ‘교회쇄신’과 ‘사회복음화’를 슬로건으로 채택하고 있었는데, 그 깊이와 넓이를 확보하기 위해 격월간으로 발행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잡지 형식의 매체가 가톨릭운동을 직접적으로 뒷받침할 수는 없었다.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재정 압박이었겠지만, ‘잡지’라는 형식적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당시 교회와 신자들의 의식과 일상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가톨릭신문>과 <평화신문>이었다. 보수화된 교회에 균열을 내고, 그 허위의식을 대중적으로 전달하고, 가톨릭운동을 실질적으로 지원하려면 제도권 교회에서 독립적인 매체가 필요했다. 교회 안에 이른바 ‘대안언론’이 전무한 가운데, 2009년 창간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는 이른바 천주교 사회운동 활동가들뿐 아니라 의식 있는 신자들의 폭발적 반응이 있었다. 당시에 독자들은 ‘가뭄에 단비’라고 평했다.

 

4.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의 창립과 발전

언론사를 운영하려면, 세 가지 요소가 확보되어야 한다. 재정, 콘텐츠와 인력이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이하 지금여기)는 우리신학연구소가 산파 역할을 자임하고 나서는 바람에 현실이 될 수 있었다. 우리신학연구소가 공간을 제공하고, 몇몇 은인들과 더불어 초기 운영비를 제공하였다. 새로운 언론은 처음부터 종이신문이 아니라 인터넷에 기반하는 언론을 하기로 결정했다. 인터넷언론의 가장 큰 장점은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 운영할 수 있다는 점이고, 이미 한국사회가 인터넷 기반 사회로 진입하였기 때문이다. 아직 SNS가 발달하지 않은 상태에서 창립 당시에 인터넷 환경은 카페와 블로그가 활성화되어 있었다. 그래서 몇 가지 이유에서 정식 창간에 앞서, 포털사이트 다음에 카페를 개설하고, <가톨릭인터넷언론-지금여기>라는 이름으로 언론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1) 상품을 보여 주지 않고 고객들에게 돈부터 먼저 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마찬가지로 후원자를 모으려면, 먼저 언론활동을 통해 ‘대안언론’의 필요와 효용을 독자들에게 설득해야 한다. 여러분이 지금 보고 있는 이런 교회언론이 꼭 필요하다고 느끼신다면 후원해 달라고 청하는 전략이다. (2) 여기서 결정적인 것은 기사의 품질(콘텐츠)이다. 교회개혁과 교회의 사회참여에 대한 절박한 요청을 담아내고, 언론이 독자들과 동반하고 있다는 확신을 심어 줄 수 있어야 한다. 기성언론에서 훈련된 기자들을 데려올 수 없는 상태에서 이 기간은 본격 언론을 준비하는 편집자/기자들의 훈련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3) 기자 영입은 재정상황과 직결되는 문제라서, 처음에는 편집국장과 자원기자단(무보수)의 협력으로 운영하였다. 기사는 역량이 닿는 선에서 게재하고, 콘텐츠의 품질은 기사뿐 아니라 교회언론의 필요성에 동의하는 자원 필자들의 칼럼에 의존하게 된다. 따라서 이 기간은 좋은 필진을 확보하는 기회였다.

2009년 용산참사와 노무현 대통령 사망과 광우병 쇠고기 파동 등이 연이어 발생하면서 그만큼 교회의 사회참여 움직임도 빨라졌다. 이처럼 민감한 사회적 사안을 바라보는 제도권 교회의 소극적 대응에 대한 신자들의 불만도 따라서 증폭되었다. 이 사안들에 대해 이른바 ‘교계언론’의 침묵과 부실한 대응에 대한 반감이 커지면서 <지금여기>의 효용성은 더욱 커졌다. 처음엔 인터넷 카페 수준의 과도기 언론이었지만 ‘목소리 없는 교회의 목소리’ 역할을 하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았고, 그만큼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를 정식 창간할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지금여기>의 성장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이명박 정권의 전횡과 정진석 추기경의 완강한 보수적 태도였다. 당시 4대강 사업과 두물머리 투쟁이 이어지면서 대부분의 국책사업에 저항했던 교회의 사회참여 흐름이 <지금여기>에 거름을 주고, 사명감을 고취시켰다.

 

5. 변화된 교회언론 환경

2013년 프란치스코 (개혁)교황의 등장은 한국교회 언론환경에 변화를 불러왔다. 서울대교구 소유의 <평화방송/신문>은 교구의 리더의 성격상 편집방향에서 두드러진 변화를 보이지 않았지만, 오히려 대구대교구 소유의 <가톨릭신문>은 일정하게 편집방향의 변화를 보였다. <가톨릭신문>이 교황의 교회개혁 의지와 사회개혁 의지를 일정하나마 담보하면서 “우리 언론이 달라졌어요” 하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즉, 교계언론이 교황의 의지에 편승하면서 예전에는 <지금여기>에서만 볼 수 있었던 기사를 교계언론에서도 들을 수 있었다.

아울러 대안언론 진영에서 <가톨릭프레스>가 창간되면서, 문제는 더 복잡해졌다. <가톨릭프레스>는 ‘성역 없는 취재’를 강조하며, 교회개혁과 관련된 사안에서 돌직구를 날리면서 교회개혁을 갈망하는 신자들에게 ‘사이다’를 선보였다. <가톨릭프레스>의 등장은 교회개혁을 위해 다소 반가운 일일 테지만, <지금여기>에 자기 정체성과 역할에 대한 긴장감을 가져온 것도 사실이다.

 

6. 논란의 지점들

변화된 언론 환경에서 <지금여기>는 편집진의 교체에 따라서, 내부에서 천주교 제단체와 연대하자는 ‘운동적 성격’과 언론은 언론활동으로 ‘독자적으로’ 말한다는 ‘언론적 성격’에 강조점을 두는 의견 사이에서 미묘한 갈등이 발생하였고, 결국 언론적 성격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가닥이 잡혔다. 물론 정답은 ‘언론 본연의 사명을 다하는 것이 결국 운동적 목표를 성취하는 것’이겠다. 그러나 이 차이는 미세한 편집상 차이를 보여 주었다. 언론은 취재 중심의 기사 생산이 주 업무인 것은 맞다. 그러나 언론은 ‘세상과 교회에 대한 선도적 역할’ 역시 지니고 있다. 결국 이러한 역할은 팩트에 기반한 평론적 성격의 칼럼이 좌우한다. 기성 종이신문에서 ‘사설’에 해당하는 부분일 텐데, 언론사의 고유 입장을 칼럼니스트들의 글을 통해 개진하고 독자들을 설득해야 할 의무 역시 언론은 지니고 있다.

결국 <지금여기>는 취재 중심의 기사생산에서 성과를 보였지만, 명확한 자기 입장을 적시에 표명하지 못함으로써 ‘입장의 모호함’이라는 혐의를 받고 있다. 반면에 <가톨릭프레스>는 나름대로 입장의 선명함을 보여 줌으로써 교회개혁을 갈망하는 이들에게 호응을 얻고 있지만, 기사생산에 취약하며, 입장을 뒷받침하는 설득력 있는 근거를 마련하지 못한 채 ‘선언적’ 언론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7. 문제 해결을 위한 질문들

① 지금은 SNS 발달로 1인 미디어 시대다. 대중들은 특정 사안에 대한 정보를, 비록 그것이 교회 내 사안이더라도, 굳이 기성언론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쉽게 취득할 수 있다. 이들은 정보 공유에 머물지 않고, 나름대로 각 사안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 있다. 통상 아주 짧은 멘트로 입장을 표명하지만, 게 중에는 나름대로 논리 정연하게 논거를 통해 제 입장을 밝힌다. 즉, 1인 미디어들도 정보와 견해를 동시에 표명한다. 그렇다면, 교계신문과 대안언론이라는 <지금여기> 또는 <가톨릭프레스>는 이런 환경에서 어떤 존재 이유가 있는지 설명해야 한다. 존재 이유도 없이 언론을 유지하는 것은 에너지 낭비일 뿐이기 때문이다. 과연 ‘언론’을 표명하고 있는 매체들은 무엇으로 사는가?

② 현재 대부분의 대중들은 언론사 홈페이지를 찾지 않는다. 신문기사들을 포털사이트가 선별해 주듯이, 대중들은 자신의 SNS로 유입되는 선별된 기사를 읽는다. 그래서 신문사들은 ‘기사 제목의 선정성’에 목을 매고 있는 형국이다. 모바일을 통해 기사를 읽는 독자들에게 기사는 길면 안 되고, 짧고 명료하고 뜨거운 이슈를 다루어야 한다. 그러므로 언론은 ‘자기 대중’이라고 부를 만한 대상독자들을 선명하게 구별하고, 그 전략적 대상 독자들의 관심사에 빠르고 직접적으로 응답해야 한다. 응답하되, 정보 나열에 그치면 안 되고, 계몽적인 기사는 치명적이다. 현재 <지금여기>의 취약성은 이슈를 선점하거나, 이슈를 던지지 못하고 있다는 진부함이 아닐까?

③ 언론은 사관인가, 예언자인가? 아니면 사관이며 예언자인가? 물론 정답은 팩트(사관)에 기반한 예언자겠다. 그럼 그게 어떻게 가능한가? 사관은 정확히 기록하면 된다. 정직이 생명이다. 그래서 좀 훈련하기 쉬운 편이다. 그런데, 예언자는 비전이 있어야 한다. 무릇 교회언론이라면, 교회언론의 편집자와 기자들은 자기 안에서 사회적 비전과 종교적 비전이 통합되어야 한다. 여기서 알짜는 종교적 비전이다. 종교적 비전은 신앙과 신학을 사회 안에서 녹여내어야 얻을 수 있다. 언론을 통해 세상도 바꾸고 교회도 바꾸자는 게 교회언론이라면, 교회언론 기자들은 세상 안에서 신학을 통해 갈등하는 자신의 신앙을 풀어내야 한다. 그래야 복음에 기반한 사회적 비전을 구체적 개인/신앙인들에게 설득할 수 있다.

④ 그러면 묻자. 교회언론 편집자와 기자들은 신앙이 있는가? 스스로 수행하는 예언자인가? 신학적 고민이 있는가? 교회언어에 대한 감각을 얼마나 지니고 있는가? 교회언론이 상대하는 사회의 구조와 논리를 이해하는 만큼 교회의 구조와 논리를 이해하고 있는가? 아니라면 지금 그걸 알려고 공부라도 하고 있는가? 복음이 요청하는 상식과 세상이 강요하는 상식은 비슷하지만, 또 그만큼 다르다. 그러니 기존의 상식만으로는 교회를 이해할 수 없다. 교회가 뭐 이래? 하며 언짢아 하거나, 보수적 교회 인사를 다짜고짜 공격한다고 교회쇄신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언론활동은 마스터베이션이 아니다. 변화를 이끌어내려면 지혜가 필요하고, 적절한 언어 선택이 필요하고, 때로 겸손하게 물러나고 때로 정곡을 찔러야 한다. 충분히 교회를 사랑하고, 그래서 교회 현실에 대한 짜증이 아니라 충분히 슬퍼할 줄 알아야 한다.

⑤ 이 문제를 교회언론 안에서 충분히 해결하지 못할 때 ‘대안언론’이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지금여기>는 관료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다. 기자들은 그저 직장생활을 하는 것이고, 관성에 따라 움직일 수 있다. 교회 문제로 들어가는 입구는 보여 주지만, 교회개혁을 위한 출구를 보여 주지 않는 언론은 그저 ‘사건의 기록자/사관’으로 만족하게 된다. 어떤 사건은 들추어내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경우가 있지만, 교회의 사안은 대부분 속뜻을 알아야, 문제의 구조를 알아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엉뚱한 상식적 결론에 이르고 만다. 그럴 때, 독자들은 감동하지 않는다. 이들이 반응하기를 그칠 때, 언론은 이미 스스로 언론임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⑥ 경험적으로 말하기 싫지만, 경험적으로 말하자면, 돈은 큰 문제가 아니다. 복음서에서 말하지 않던가? 믿음이 남았다면 들어 보라. 하느님께서는 들꽃들이 길쌈을 하지 않아도 화려하게 입혀 주시고, 들판의 새들도 먹여 주신다고. 하물며 ‘하느님의 일’을 하려는데, 그 일꾼들에게 그분께서 알아서 그 입에 밥을 넣어 주시지 않겠는가? 그분은 필요한 만큼 우리에게 주신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버리지 않았다면, 그분은 우리 일상의 요구를 들어주실 것이다. 사관에게 밥을 주시고, 예언자에게 영을 주시는 분에 대한 믿음으로 밥의 힘과 영의 힘으로 ‘언론을 하자’.

⑦ 위기는 기회이다. <지금여기>는 초창기에 비해서 표면상 엄청난 성장을 하였다. 인터넷상으로나, 교회 안에서나 <지금여기>는 유사 기성언론처럼 인정받고 있다. 기사생산의 안정성과 질 높은 칼럼을 확보했다. 사실상 다른 단체에 비교해 볼 때, 재정적으로 후원자 수가 적다고 할 수도 없다. 우리가 무슨 영화를 보자고 언론을 하는 게 아니라면, 재정 상태야 적으면 적은 대로, 많으면 많은 대로 운영하면 된다. 성찰과 고민의 중심은 늘 “왜 이걸 하는가?”이다. 내가 <지금여기>에 남아 있는 이유가 선명해지는 날, <지금여기>의 운명이 갈릴 것이라 믿는다.

제1회 저널리즘 공개 세미나에 (왼쪽부터) 김유철 씨와 한상봉 씨가 각각 토론과 발표를 맡았다. ⓒ김수나 기자

 

토론 : 교회언론, 현 시대의 담론

김유철(시인. 경남민주언론시민연합 대표)

 

들어가며

교회에 약이 되고, 세상에 밥이 되는 언론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이하, 지금여기)의 창립 10주년을 앞두고 스스로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고 또한 나아갈 길을 찾는 세미나에 불러 주신 주최 측에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발제자이신 <지금여기> 초대 편집장과 주필을 지낸 한상봉 님의 심도 깊은 진단과 문제제기에 대하여 존경심에서 우러나오는 박수를 보냅니다.

익히 아는 바와 같이 발제자는 사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교회의 여러 액션단체에서 활동하였으며 다년 간에 걸쳐 교회언론의 일선에서 발제문 제목처럼 ‘교회개혁과 가톨릭언론’을 고민하면서 그 지향점을 제시하였고 또 현재도 <가톨릭일꾼>의 편집장으로서 아나키스트 신앙인의 몫을 묵묵히 해 나가고 있는 산 증인이기도 합니다.

<지금여기>는 ‘한국 교회를 있는 그대로 쓴다는 저널리즘의 원칙은 교회쇄신을 지향하는 저희의 창간정신이자 기사를 쓰는 토대입니다. 10주년을 맞아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내일 더욱 충실한 언론이 되기 위해 저널리즘 공개 세미나를 엽니다.’라고 이번 세미나의 목적을 밝혔습니다. 주최 측이 밝힌 이 짧은 두 문장의 안에는 ‘한국교회․ 저널리즘․ 교회쇄신․ 창간정신’ 등과 같은 고민스런 화두가 가득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발제자가 준비한 내용인 ‘교회개혁과 가톨릭언론’은 아마도 한국천주교회를 관심 있게 바라본 사람이면 누구나 핵심이라고 말할 현 시대의 담론이기도 합니다. 발제자는 주어진 주제이자 자신이 정한 주제를 먼저 목소리 없는 목소리로서 시작하여, 제도권과 비제도권 한국교회의 언론 모습을 일별하고, 이어 <지금여기>의 창립과 발전을 요약한 후, 변화된 교회언론 환경을 제시함과 동시에 <지금여기>가 처해 있는 논란의 지점들을 제시하고 결론이기보다는 문제해결을 위한 질문들로 발제를 마무리하였습니다.

본 토론자는 발제자의 독창성 있고 심도 있는 연구에도 불구하고 토론자로서 논평과 함께 몇 가지 질문을 하려 합니다.

 

질문들

첫째, 발제자는 발제의 시작에 있어서 ‘그리스도 신앙은 발언과 경청 사이에 놓여 있는 신앙’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신학적이기도 하고 의미심장한 말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여 목소리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발언’이라고 한다면, 누구도 들어주지 못하는 그 발언을 들어주는 하느님의 행위를 ‘경청’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언론의 역할은 어디쯤이라고 생각하는지요?

둘째, 2장 제도권 한국교회의 언론을 시작하면서 발제자는 “한국교회에서 살해당한 하느님의 목소리”라고 말하며 그 어둔 그림자로서 <가톨릭청년>부터 <평화신문/방송>에 이르기까지 일제의 식민정책 동조, 군사독재정권 밀착과 함께 관료적 성직주의 등을 제시했습니다. 어리석은 질문이지만 왜 그런 일이 시작되었고 여전히 견고한 성을 쌓고 있다고 보는지요?

셋째, <평화의 일꾼>, <공동선> 등 비제도권 교회언론이 1980-90년대 선보이면서 모두 ‘교회쇄신’과 ‘사회복음화’를 슬로건으로 채택하였고, 발제자는 누구보다 그 일선에서 활동하였습니다. 흔히 불가능한 일을 바위에 계란 치기라고 말하지만 과연 비제도권 언론이 가능한 일을 하고 있다고 보는지요? 아니면 영원한 슬로건으로 남을 가능성이 더 큰 것이 현실인지요? 토론자로서 한 가지 제안 삼아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교회쇄신’이 아니라 ‘교단쇄신’이 훨씬 실천적이고 시급한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그에 대한 의견도 밝혀 주십시오.

넷째, <지금여기>의 창립을 발제자와 토론자는 함께 했습니다. 2007년 9월 포털사이트 daum에서 카페 형태로 시작부터 2009년 11월까지 ‘미디어 흘겨 보기’란 매주 칼럼을 통해 교회의 두 기관지 <평화신문>과 <가톨릭신문>을 민낯을 모니터한 경험이 있습니다. 발제자의 지적한 대로 언론사 세 가지 요소 재정, 콘텐츠, 인력 중 어느 것 하나 완비되지 못했지만 ‘가뭄에 단비’가 되어 독자들의 갈증을 해소시킨 점 또한 인정합니다. 또한 <지금여기>가 ‘목소리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되어 세간의 주목받았고, 그 역할의 효용성이 더 커졌다고 했지만 이른바 사회운동권적인 신자 외에 일반 평신도들에게는 얼마나 알려졌고, ‘교회에 약, 세상의 밥’이라는 영향력을 발휘했다고 보는지요?

다섯째, 발제자는 프란치스코 교종의 등장 이후 교회언론 환경의 변화가 일어났고 무엇보다 대구교구가 발행하는 <가톨릭신문>의 편집방향이 바뀌었다고 했는데 토론자가 갖는 큰 의문 중의 하나는 발행인인 대구교구는 정작 바뀌지 않았고, 어떤 의미에서는 더욱더 문제를 내포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요? 아울러 <가톨릭프레스>의 창간과 급진성(?) 보도에 대하여 한국교회가 당혹감을 느끼는 게 아니라 <지금여기>의 정체성과 입지점에 대한 재고려 등의 의견은 너무 경쟁적으로 보는 관점은 아닐지요?

여섯째, 발제자는 2014년 8월 <지금여기>의 편집진 교체에 따른 ‘언론적 성격’ 강화가 현재의 ‘입장의 모호함’을 가져왔다고 보며 ‘팩트에 기반한 평론적 성격의 칼럼’으로서 ‘운동적 성격’을 보완해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했습니다. 토론자 역시 그 견해에 동의하면서도 ‘언론적 성격’ 역시 더욱 그에 충실(!)하다면 가능하다고 보는데 그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마무리하며

‘교회개혁’이든, ‘교단개혁’이든 우리가 말하는 ‘개혁’은 무언가를 새롭게 하자는 의미가 아니라 정도正道로 가자는 말이고 마치 그것은 돌아온 탕자와 같이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는 메타노이아-회개-의 다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발제자가 머리말에서 말한 ‘발언’에 대한 ‘경청’을 토론자로서는 ‘관음觀音’이란 의미로 해석하고 싶습니다. 어쩌면 교회언론은 세상의 소리를 있는 그대로 전해 주고, 울리고, 스스로 변화시키는 자리매김으로 가야 할 것입니다. 마치 그것은 영화 아바타에 나온 나비족의 인사법인 “I SEE YOU"와 같은 바라봄이기도 합니다.

또한 발제자가 제기한 의견들 외에도 다양한 직능과 특별히 청소년과 청년들에 대한 관심이 <지금여기>에 더 많은 비중으로 함께했으면 합니다. 또한 해외 교회의 움직임과 지역교구의 움직임에 대한 관심과 분석이 창간 10년을 넘어가는 <지금여기>에서 이루어지길 청하고 싶습니다.

오래전이지만 2009년도에 언론 역사상 보기 드문 장면이 연출되었습니다. 진보매체인 <한겨레>와 보수매체인 <조선일보>가 동시에 같은 주제로, 같은 반성을 사설에 실었습니다. 당시 이명박 대통령의 기자회견에서 기자들이 청와대의 요청을 받아들여 단 하나의 질문도 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그 일을 치욕으로 생각하고, ‘침묵의 카르텔’(<한겨레>)과 ‘부끄러운 언론’(<조선일보>)이라고 불렀습니다. 교회언론 역시 ‘침묵의 카르텔’로부터의 탈출과 자기비판의 용기가 생기기를 바랍니다.

보도의 초점은 취재대상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언론이 정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합니다. 스스로 정한 자기검열에서 풀려나는 것이 교회언론의 정체성 회복이자 교단의 부서지지 않는 성역에 대한 언론의 희생이며 마주봄입니다.

닫힌 사회가 열린 사회가 되며, 획일적 관점은 다양한 관점이 되고, 경직된 조직은 유연한 조직이 되고, 타율에 의한 통제는 자율에 의한 행동이 되며, 한곳으로 모이는 권력은 분산되고 다점화되는 것을 우리는 사회의 진화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런 진화에 있어서 현대인들은 언론의 소임을 중요한 요소로 꼽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창간 10주년의 <지금여기>가 소중한 존재이며 10주년 잔치에 앞서 자신의 발자취를 돌아보고 새 길을 여는 성숙하고 겸손한 모습에 박수를 보냅니다.

발제자가 발제문의 끝에 말한 ‘충분히 교회를 사랑하고, 충분히 슬퍼하는’ 언론으로서 독자들이 함께 하는 <가톨릭뉴스 지금여기>가 되길 바라면서 부족한 토론의견을 마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김유철 토론문에 대한 답변(한상봉)

1. 교회언론의 역할: 신앙이 발언과 경청의 상호작용이라면, 언론 역시 대중/현장의 상황을 경청하고/보고 듣고 느끼며 복음의 빛에 비추어 다시 응답/발언해야 합니다. 이 말은 물론 원론적인 말입니다. 다만 여기서 기억해야 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히브리 노예들을 해방하라고 발언하기에 앞서, 히브리 노예들이 고통받는 모습을 보고 듣고 느끼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언론의 대상은 ‘교회가 구원을 위한 보편적 성사’인 것처럼, 신자뿐 아니라 모든 고통받는 이들에게로 향해야 합니다. 초기 <지금여기>에서 기륭전자 투쟁을 상세히 보도한 이유는, 그 투쟁에 가톨릭교회/성직자나 수도자, 천주교 단체가 참여한 바 없으나 그들이 고통받는 (넓은 의미의) 하느님 백성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지금여기>의 편집원칙은 일반정치사회적 사안에 대해서는 직접 취재하지 않지만, 가난한/고통받는 삶의 현장이라면 어디든 <지금여기>의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2. 한국교회의 정치적 입장: 한국사회의 민주화 진전에 따라서 한국교회의 특정한 정치적 입장은 '해체'된 상태라고 봅니다. 즉, 제도권 교회는 정치적 입장이 없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낙태법 폐지’ 문제나 최근에 발생한 ‘성체훼손’ 사건처럼 교회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사안이 아니라면, 무관심하다는 뜻입니다. 이는 사실상 해당 사회의 복음화를 위한 교도권 행사의 포기라고 봅니다. 교회에서는 복음화를 ‘복음화율’이라는 표현이 상징하는 것처럼, ‘비신자의 신자화’라는 좁은 의미로만 사용하고 싶어합니다. 물론 정의평화위원회 등의 활동을 통해 사회참여에 나서고 있지만, 이는 특정 사목 집단의 관심사일 뿐, 전체 교회의 관심대상으로 설정하지 않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3. 교회언론의 과업 수행 능력: 교회쇄신과 사회복음화는 교회가 예언직을 수행하고, 자신을 복음에 비추어 늘 갱신해야 한다는 점에서 ‘가능성’ ‘불가능성’과 상관없이 지속적으로 추구해야 할 과제입니다. 교회언론 역시 교회와 마찬가지 사명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능성 여부와 상관없이 수행해야 합니다. 여기서 비제도권 언론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인지 묻는다면, 오히려 제도권 언론보다 수행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제도권 교회를 감시하고 견제할 수 있는 것은 비제도권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동안 <지금여기> 역시 그런 역할을 일정하게 수행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제 경험으로 보면, 교권세력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사실상 ‘비판적 언론’밖에 없습니다.

교단쇄신과 교회쇄신 사이: 저는 교단쇄신과 교회쇄신을 구분해서 사용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단은 교회의 제도적 틀에 지나지 않아서, 교회쇄신이 교단쇄신을 위한 유리한 압력/분위기를 만들어 주고, 교단이 쇄신되면 당연히 교회는 쇄신되는 것이지요. 다만 교단쇄신은 결국 현실교회 안에서 불가피하게 성직자 집단의 동의와 결단이 필요하기 때문에, 상대적 국외자인 교회언론의 엄정하고 비판적인 견인이 필요할 테고, 교회쇄신은 특별히 경계에서 주춤거리고 있는/분명한 입장을 지니지 못한 대중을 상대로 자율적인 언론이 얼마든지 하기 나름이라고 생각합니다.

4. 교회언론의 영향력/대상 확대 문제: <지금여기> 초창기에는 주로 천주교사회운동 종사자들의 지지와 지원, 호응에 힘입은 바가 컸지만, 사실상 용산참사 이후 지금까지 드러난 바와 같이 기존의 천주교 사회운동 종사자들은 소수자로 남고, 대부분의 시국미사 등 집회 참가자와 <지금여기> 후원자들은 대부분 ‘기성 운동권’과 인연이 별로 없는 분들이 대다수였습니다. 이미 가톨릭운동의 중심이 대중에게로 넘어갔다고 보는 게 옳습니다. 특히 ‘운동권’ 류의 집단은 비교적 사회복음화에 중점을 두는 데 반해, ‘비운동권’ 류의 집단은 사회복음화와 교회쇄신에 대한 갈망이 때로는 중첩적으로, 때로는 별도의 관심으로 나타납니다. 다시 말해, 교회문제에 대한 심각성 때문에 교회언론에 관심을 표명하는 이들이 상당히 늘어났다는 것입니다. 결국 교회 관행에 대한 개인적 불만 수준에서, 언론을 매개로 집단적 비판으로 향상될 가능성이 얼마든지 열려 있다고 봅니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언론의 영향력은 그동안 적지 않았으며, 향후 언론의 기능은 더욱 증폭될 수 있다고 봅니다. 언론이 이러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모이는 터미널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5. 교회언론의 특성에 관하여: <가톨릭신문>의 향방은 대구교구의 향방과 얽혀 있는 게 사실입니다. 대구교구는 역사적으로 경상도 천주교회의 맹주로서, 보수의 아성이었고, 정의평화위원회마저 가동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교황이 착좌하기 이전부터 교구장 교체에 따른 유동적 시기에 정의평화위원회가 출범되는 등 몇 가지 의미 있는 변화가 일어났으며, 때마침 개혁교황의 등장으로 비교적 진보적인 흐름이 강화될 수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 제도 순응적인 <가톨릭신문> 역시 사회성 짙은 기사를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다만 여전히 교회개혁의 측면은 깊이 다루지 못했습니다. 이후 교구의 체제 정비 과정에서 진보적 흐름이 통제되고, 한국사회 변화에 따른 교구내 비리 문제가 불거지면서 교구는 더욱 방어적 태도를 취하고 있으며, <가톨릭신문> 역시 퇴행적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가톨릭프레스>에 관하여: 저는 교회 안에 다양한 언론이 존재하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가톨릭프레스> 역시 교회발전을 위해 일정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제도권 교회와의 소통의 가능성을 파괴하는 방식으로 언론활동을 전개하는 데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점에서 <지금여기>가 그나마 소통과 견제의 전략을 포기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것은 경쟁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쇄신을 위한 전략적 차원에서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효과적인지 진단해 보는 것입니다. 진보적인 신자층이 흠결 많은 교회라 해도 그 안에 머물며 안으로부터 개혁을 포기하지 않는 것처럼, 교회언론 역시 탈교회를 독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위험합니다. 불구인 어머니도 어머니입니다. 나랑 생각이 달라도 어머니를 버릴 수 없듯이, 그 어머니가 있었기에 나의 신앙도 있는 것이라는 확신에서 뿌리를 두어야 ‘사랑 어린 비판’이 가능하고, 그래야 교회의 복음적 회심에 가능성이 열립니다. 아무리 교회가 문제투성이라 해도, 교회는 비판의 대상이 될지언정 ‘혐오’의 대상으로 삼으면 안 됩니다.

6. 언론적 성격에 관하여: 편의상 언론적 성격과 운동적 성격으로 나누어 이야기하였지만, 사실상 언론은 모두 ‘운동적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즉, 언론마다 저마다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이 다르고, 독자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설득하려고 노력한다는 뜻입니다. 사실 모든 역사 서술이 그러하듯이, 중립적 언론은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애매한 중립’에 머물지 말자는 취지로 말씀드린 것입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10주년 맞이 저널리즘 공개 세미나 일정은 아래와 같습니다. 많은 분의 관심과 참여를 기다립니다.

2회 9월 12일(수) 저녁 7시
- 박준영 (편집국장, 전 <아시아가톨릭뉴스> 한국지국장)

3회 11월 28일(수) 저녁 7시
- 경동현 (편집위원장, 전 우리신학연구소장)

4회 2019년 1월 23일(수) 저녁 7시
- 정현진 (취재팀장)

5회 3월 23일(토) 3시 대중강연과 기념미사
- 강연자 : 김지영 (전 <경향신문> 편집인, 전 가톨릭언론인협의회장)
- 주제: 저널리즘과 가톨릭 언론의 미래(가제)

1-4회 장소 : 서울시 종로구 계동2길 26 2층 씨알재단
5회 장소 : 추후 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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