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생명' 50주년, 실수 고치자

(토머스 리스)

50년 전에, 교황 바오로 6세는 한 회칙을 발표했다. 이 ‘인간생명’(Humanae Vitae) 회칙은 모든 인공피임 수단은 비윤리적이라고 선언함으로써 가톨릭교회를 철저히 뒤흔들었다. ‘인간생명’이 충격이었던 까닭은, 당시 1960년에 사후피임약이 나와 쉽게 쓸 수 있던 상황에서 바오로 6세가 신자들이 산아제한을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줄 것으로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회칙은 그 뒤로 계속해서 논란이 되고 있는데, 대다수 신자들이 이 회칙을 무시하고 있는 가운데 교계제도는, 프란치스코 교황을 포함해, 이 회칙을 지지하고 있다.

‘인간생명’이 1968년 7월 25일에 발표됐을 때, 가톨릭 윤리신학자들의 반응은 압도적으로 부정적이었다. 이들은 이 회칙 안의 많은 부분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인공 피임을 전체 금지한 것은 이들이 지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거의 모든 다른 그리스도교 종파가 피임을 승인하고 있으며 이 문제에 관해 연구하도록 (바오로 6세) 교황이 만든 위원회가 더 열린 자세를 권고했음을 지적했다.

신학자들의 반대는 내부에서만 있지 않았다. 신학자들은 학술 논문, (신문의) 칼럼, 기자회견, 그리고 청원 서명 등을 통해 아주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가톨릭과 세속 언론 모두 이 분쟁을 깊이 있게 보도했다. 성을 둘러싼 가톨릭교회 안의 논쟁은 좋은 기삿거리였다.

이 회칙에 동의하지 않은 이들은 신학자들뿐이 아니었다. 일부 추기경과 주교들은 이 회칙이 무오류의 가르침이 아니며 각 개인은 자신의 양심을 따라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교황과 거리를 뒀다. 독일 주교들은 “쾨니히스타인 선언”(Declaration of Konigstein)을 발표하여 피임법을 쓸 것인가 말 것인가를 평신도들 개인의 양심에 맡겼다.

전 세계의 많은 평신도는 각자의 양심을 따랐다. 여론조사들을 보면 가톨릭 신자의 압도적 다수는 모든 인공피임은 비윤리적이라는 교계제도의 이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2016년에, (미국 여론조사기관인) 퓨리서치센터의 조사에 따르면 미국 가톨릭신자의 8퍼센트만 피임은 윤리적으로 나쁘다는 데 동의했다. 가톨릭 신자 부부들은 독신 남성들(성직자들)보다 자신들이 상황을 더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가르침 때문에 얼마나 많은 신자가 교회를 떠났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더 많은 이들이 남아서, 미사에 가고, 그러면서 이 가르침을 간단히 무시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윤리적, 교리적 가르침에 관해 성직자들에게 따랐던 가톨릭인들로서 이는 놀랄 만한 변화였다. 이로부터 “뷔페 가톨릭 신자”(cafeteria Catholics)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자기가 받아들이고 싶은 가르침만 골라드는 신자를 말한다.

교계제도 안의 일부는 반대하는 신학자들이 대중을 미혹시킨다고 비난했다. 공개적 논쟁 때문에 양심을 선택하기가 더 쉬워진 이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가톨릭 부부 절대 다수는 각자의 판단으로 결정하고 있었다. 사실, 연구들을 보면, 이미 1950년대부터 갈수록 많은 신자들이 피임수단을 쓰고 있었다.

‘인간생명’은 교계제도의 권위를 평신도(의 지지로) 강화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약화시켰다. 평신도들의 생각에, 교회가 이 문제에 이렇게 잘못할 수 있다면, 다른 영역에서 교회를 신뢰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니, ‘인간생명’은 그저 성에 관한 논란이 아니었다. 금세 교회 권위에 관한 논란이 되었다.

1968년 7월 25일 바오로 6세 교황은 그의 가장 유명한 회칙인 '인간생명'을 발표했다. (사진 출처 = 바티칸시티)

폴란드의 카롤 보이티와 추기경은 산아제한의 문제를 연구한 이 위원회의 위원이었다. 나중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되는 이 사람은 교회 가르침을 바꾸자는 쪽에 다수가 찬성한 이 위원회의 마지막 회의에 빠졌다. 그 결과, 당시에는 산아제한에 관한 그의 입장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지금 우리는 그가 소수 입장을 지지했으며 바오로 6세 교황에게 편지를 직접 써 보내 인공 산아제한을 금지하는 교회 입장 유지를 지지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만약 그가 산아제한을 반대하는 것이 널리 알려진 상태였다면 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을까? 확실한 것은, 교회 입장을 바꾸기를 지지했던 추기경으로서 그에게 투표했던 이라면 누구나 나중에 후회했다는 점이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인간생명’을 둘러싼 논쟁이 성에 관한 만큼이나 권위에 관한 것이기도 함을 이해했다. 신학자들과 주교들이 교황 가르침에 반대하자 그는 괘씸해 했다. (당시 공산국가이던 폴란드의) 박해받는 교회의 소산으로서, 그는 교회일치의 중요성을 이해했다. 일단 교황으로 선출되자(1978), 그는 이 회칙에 반대 목소리를 높였던 윤리신학자들을 대상으로 엄한 심문을 시작했다. 이 일에는 라칭거 추기경의 솜씨 있는 보좌를 받았다. 요한 바오로 2세는 라칭거 추기경을 1981년에 교황청 신앙교리성 장관에 임명했다. 라칭거 추기경은 2005년에 베네딕토 16세 교황으로 선출되어 요한 바오로 2세의 뒤를 이었다. (편집자 주- 그는 2013년에 근대 들어 처음으로 생전에 교황직에서 사임했다. 그 뒤를 이은 이가 지금의 프란치스코 교황이다.)

당시에 저런 심문을 받은 신학자 대부분은 평사제이거나 수도회 소속이었으므로,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들이 한 순명 서약을 이용해서 그들을 통제 아래 둘 수 있었다. 그들은 신학교와 대학의 교수직에서 제거됐고, 성을 주제로 한 글을 쓰지 못하도록 금지됐으며, ‘인간생명’을 받아들인다고 공언하라는 말을 들었다. (그 결과) 사제 양성은 교황 권위를 강조하고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개혁들보다는 규율을 더 따르던 이들의 손에 들어갔다.

마찬가지로, ‘인간생명’(에 대한 인정 여부)은 주교 임명을 위한 리트머스 시험지가 되었다. 교황 권위에 대한 충성 여부가 주교 후보에게서 확인할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어, 사목적 자질과 지성보다 더 중시됐다.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황으로 재위한 거의 30년 동안, 교계제도를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개혁들을 실행함에 거의 창조성이나 상상력을 갖지 못한 조직으로 재조해 버렸다. 교계제도와 주교들은 (스스로 창조적으로 상상력 있게 움직이기보다는) 로마가 지도해 주기만을 바라며 규율을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오늘날 교계제도 안의 많은 이들은 ‘인간생명’이 피임은 성(sex)을 출산과 분리시키게 되고 그에 따라 혼인에 대한 불충실과 여성에 대한 비존중, 성(gender) 정체성 혼동으로 이어진다고 확신했던 것은 예언적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그간의 논란은 ‘인간생명’ 회칙 전체를 놓고 벌어진 적이 전혀 없었다. 그보다는, 모든 인공 피임을 다 금지한 데 대한 논란이었다. 피임을 했기 때문에 앞의 모든 문제들이 생겨났다고 말하는 것은 터무니없으며, 삶의 어느 한 지점에서 피임수단들을 썼던 선한 사람들 모두를 모욕하는 것이다.

교회는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교회가 쉽게 자기가 잘못이었다고 인정하기는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교회는 그런 일을 별로 잘 하지 못한다. 교회가 할 수도 있는 것은, 낙태는 훨씬 더 큰 악이고, 그러니 낙태를 하고 싶은 유혹이 들지 모르는 사람은 산아제한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교회는 또한 피임도구를 팔거나 공공 자금으로 지원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률을 지지하기를 그만둬야 한다. 이런 것은 지난 50년에 걸친 실수를 되돌리는 작은 발걸음이 될 것이다.

(토머스 리스 신부는 예수회 소속으로 <RNS>의 칼럼니스트이며 “바티칸 내부: 가톨릭교회의 정치학과 조직”의 저자다.)

기사 원문: https://www.ncronline.org/news/opinion/signs-times/humanae-vitae-sex-and-authority-catholic-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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