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 구영주] "나는 일본군 성노예였다", 얀 루프 오헤른, 삼천리, 2018

인간이 겪는 수많은 고통 중에 전쟁만큼이나 오랜 시간 인간의 영혼과 육체를 폐허로 만드는 고통이 또 있을까.... 이 책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군의 만행으로 일어난 이른바 ‘위안부’ 문제를 다룬 실화다. 위안부 문제는 우리 정부에서도 꾸준히 문제 제기를 하며 논의가 되는 역사적 문제지만 여전히 일본의 정치지도자들은 외면하는 사안이다. 특히 한국과 일본의 갈등은 골이 깊고 문재인 정부는 지난해 12월 한일 위안부 합의를 수용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발표함으로써 역사문제가 다시 불거졌다.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난 전쟁이라 이제 생존자들이 많이 사라져 가고 있는 중에, 네덜란드 출신의 한 여성의 목소리가 책으로 나왔다.

책의 저자인 얀 루프 오헤른은 전쟁 중 스마랑에 설치된 일본군 위안소인 ‘칠해정’에서 강간과 폭행을 당한 생존자다.

그녀는 1923년 1월 18일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 자바에서 네덜란드 이민자 4세로 태어났다. 다섯 남매 중 셋째였다. 부모님은 자상했고 지성인이었으며 예술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가톨릭 전통 가정에서 자라 가톨릭 학교와 대학을 다녔다. 그녀의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기도와 성경, 미사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깊고 강하게 심어 주었다. 그녀는 미사에 특별한 의미를 뒀고 독실한 신앙을 가슴에 품게 되었다. 어려서 갖게 된 이 신앙이 훗날 자신이 큰 어려움을 겪을 때 얼마나 든든한 힘이 되었는지를 고백한다. 신앙 깊은 그녀는 수녀가 되고 싶다는 열망을 가슴에 자연스레 품게 되었고 신부님들과 신학과 성경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클래식을 들으며 잠들던 평온한 유년을 보냈다.

1942년 그녀는 가톨릭 사범대학을 다니던 중 전쟁을 맞았다. 그녀는 열아홉 살, 여동생 핀은 열한 살, 막내 셀레스트는 일곱 살이었다. 전쟁에서 네덜란드가 지고 자바 섬을 점령한 일본군에 의해 암바라와 포로수용소에 감금되었다. 그 뒤로 그녀는 수천 명의 네덜란드 여성들과 어린아이들과 함께 3년 반 동안 포로 생활을 해야 했다. 암바라와에는 여성과 어린이를 위한 수용소가 일곱 개 마련되어 있었다. 어린아이들과 여성들은 자신에게 일어날 일들에 대한 두려움으로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 여동생들은 6호 캠프에 있었다. 작은 곤충과 바퀴벌레, 이가 득실거리던 곳이었다. 물도 귀하고 오물이 가득한 최악의 위생 상태와 열악한 환경 속에서 그녀는 나이 드신 어머니를 포함해 자신까지 4명의 가족들을 돌보며 밤마다 함께 모여 기도하며 포로생활을 견뎠다. 

수용소 안에는 수녀들과 나이가 많이 든 노인 사제들도 있었다. 고된 노동도 서로 도우며 언제나 즐겁게 하는 수녀들은 수용소를 떠받치고 있는 기둥이었다. 그토록 고통스럽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그들은 평화로운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나이 든 사제들은 수용소 사람들에게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깊은 위로가 되어 주었다. 그들은 빵과 포도주가 없어 성찬식을 드릴 수 없는 것에 깊이 상심했다. 그녀는 함께 있던 신부님께 수녀가 되고 싶다는 소명의식을 밝히고 영적 안내를 받는다. 그때 어둠과도 같던 수용소 안에서도 새로운 행복과 영혼의 평안을 경험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나는 일본군 성노예였다", 얀 루프 오헤른, (최재인), 삼천리, 2018. (표지 제공 = 삼천리)

1944년 2월 26일, 이날은 그런 그녀의 고귀한 꿈이 산산조각 나고 인생을 완전히 바꿔 놓은 날이었다. 그날 일본군들은 막사 앞으로 와 17세 이상의 미혼여성들을 끌고 갔다. 그곳에 있는 모든 여성들은 불길한 느낌에 휩싸였고 그녀 역시 그러했다. 어머니와 여동생들과 생이별을 하고 끌려간 곳이 바로 저자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본군들의 성노예로 처참하리만큼 치욕과 모욕을 견뎌야 하는 ‘칠해정’이었다. 여러 수용소에서 끌려온 수많은 소녀들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밤낮 없이 자행되던 일본 군인들의 잔인한 성폭력을 견뎌야 했다. 저자가 기록해 놓은 그곳의 삶은 여성으로서는 아니, 여성뿐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끔찍한 폭력과 처참하리만큼 생생한 육체적 영적 치욕의 기록이었다. 

필자는 한국에서도 이슈가 되고 있는 한국 위안부 할머니들의 생생한 증언과 다큐멘터리 영상을 통해 일찍이 일본군들이 전쟁 중 전 세계 여성들에게 가한 잔인한 성폭력을 알고 분노하고 있었지만 서양인으로서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최초로 고백한 그녀의 기록은 또 다른 느낌을 주었다. 마음속 깊이 신앙을 간직했던 그녀에게, 수녀로 살고 싶다는 소명을 가졌던 그녀에게 ‘칠해정’의 기억은 죽음과도 같은 시간이었으리라. 밤마다 깊은 두려움과 공포 속에 시편을 부르고 이사야 예언서를 읽으며 믿음을 굳게 다져도 그녀의 현실은 밤낮 없이 때리고 기절시켜 가랑이를 벌리고 밀고 들어오는 짐승 같은 일본군들의 잔악하고 추악한 육체만이 있을 뿐이었다. 24시간 일본군이 보초를 서고 도망가면 그 자리에서 사살하고.... 어느 날 갑자기 끌려가 일본군의 성노예로 살게 된 그녀와 그곳에 있던 모든 여성들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처음 그녀를 찾아왔던 일본 장교에 대한 기록은 끔찍하다. 반항하고 도망가는 그녀에게 칼을 들이대며 죽이겠다고 협박하자, 그녀는 자기 안에 어떤 강력한 힘을 느꼈다고 했다. “미처 알지 못한 강력한 힘이었다. 바로 그리스도께서 내 존재의 모든 것을 가져가신 것 같았다. 그리스도가 힘을 주시고 나를 주관하시는 것 같았다. 나는 일본 군인에게 나를 죽일 순 있겠지만 나는 죽는 것이 무섭지 않으며 결코 굴복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녀는 그 시간의 기록을 쓰면서 여러 번 멈추고 고통스럽게 글을 이어 나간다. 필자도 읽으며 여러 번 소름이 돋아 읽어 내려가기 힘이 들었다.

“그는 내 바로 위에 서서 칼로 내 몸을 가리켰다. (중략) 일본 장교는 안달이 났다. 나를 침대에 던지고 내 옷을 갈기갈기 찢어 누더기로 만들어 버렸다. 나는 옷이 벗겨진 채 침대에 누워 있었고, 그가 칼끝으로 내 몸을 훑어 내렸다. 나는 목과 가슴, 배, 다리를 긋는 차갑고 예리한 쇠의 감촉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벗겨져 알몸이 되었다. 수치심이 일었다. (중략) 정말 역겨웠다. 땀 냄새와 썩은 입 냄새가 났다. 온 힘을 다해 밀쳐 내려고 했다. 발로 차고 할퀴고 했지만 너무 막강한 적이었다. 내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흐르는 가운데, 그는 짐승처럼 나를 겁탈했다. 그가 계속 그러고 있을 것 같았다. 이 가장 치욕적이고 야만적인 강간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떤 순교가 이보다 힘들 수 있을까? 나에게는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런 일이었다. 

내 온 몸이 떨렸다. 나는 쇼크 상태였다. 온 몸이 추워 떨리고 마비될 것 같았다. 얼굴을 베개에 파묻었다. 수치스럽고 더럽혀졌다는 느낌이었다. 내 몸, 나의 순결하고 아름다운 몸, 신이 머무는 성전인 내 몸을 그들이 범했고 사악한 쾌락의 자리로 만들어 버렸다. (중략) 이 방을 나가야만 해, 나는 남은 옷을 챙겨 목욕탕으로 달려갔다. 모든 것을 씻어내고 싶었다. 더러움, 수치심, 상처를 모두 씻어 버리고 싶었다. 씻고 또 씻었다. 목욕탕에서 다른 소녀들도 보였다. 우리는 모두 울면서 같은 행동을 했다. 모든 더러움과 수치, 상처를 씻어 버리려고 했다. 우리에게 벌어진 일들까지 마치 씻어 버릴 수 있을 것처럼. 완전한 절망과 극심한 공포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런 절망의 상황에서 순간순간 십자가 위에 매달려 옷 벗김 당하신 예수의 고난과 치욕을 묵상한다.

이후 전쟁이 끝나고 그곳을 떠났지만 그녀들의 삶 속에서 그 시간은 영원한 침묵 속에 묻혀 버렸다. 어머니와 만나 그간의 일을 이야기했지만 딱 한 번 이야기했을 뿐 다시는 꺼내지 않았다. 대부분의 소녀들 또한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고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그녀들을 상담해 줄 사람도 없었고 누구도 그녀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 그녀들은 그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일상을 살아야 했다.

수녀가 되고 싶었던 그녀는 신부님에게 자신이 겪은 일을 모두 말씀드렸다. 하지만 신부님은 그녀에게 수녀가 되지 않는 게 낫겠다고 말했다. 그녀는 사제의 조언을 듣고 완전히 실망하고 낙담했다. 그녀는 심한 열등감에 사로잡혔고 자신이 때가 묻고 더러운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그녀는 다행히도 자상하고 다정한 남자 톰을 만나 결혼을 했고 그곳에서 일을 이야기했을 때 남편 톰은 그녀를 꼭 안아주었고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사랑해, 얀, 당신은 아름다워.” 그녀에게 꼭 필요한 말이었다. 톰은 그녀에게 과거를 잊으라고 말하지 않았다. 잊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톰의 한마디였다.

“당신은 아름다워.”

그녀는 수용소에서 겪은 일로 세 번이나 유산을 하고 어렵게 두 딸을 얻게 된다. 평온한 삶이 이어지지만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늘 자기 안에 있었던 지난날의 상처를 간절히 얘기하고 싶으면서도 수치스러워 얘기할 수 없다는 고통에 짓눌려 있었다. 그녀는 소리쳐 말하고 싶었다. 50년 동안 악몽과 불면증에 시달렸고, 그곳에서 당한 일 때문에 어둠이 내릴 때마다 공포를 느끼며 살았다. 수치심과 공포를 떨쳐 버릴 수 없었고, 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던 무시무시한 기억들이 수시로 튀어나왔다.

그녀는 생각했다. 왜 여성은 전쟁에서 늘 무고한 희생자가 되어야 했는가? 세상은 강간이 마치 전쟁의 일부인 것처럼 보이게 하고, 전쟁이 강간을 정당화할 수 있는 것처럼 여기게 했다. 전쟁에서 강간은 파워 게임이다. 강간은 군인들에게 보상처럼 이용되었다. 강간은 인종 학살로 가는 무기이자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강간은 인권을 짓밟는 중대한 범죄다.

그녀는 1992년 정초부터 텔레비전에서 방송되는 한국의 일본군 ‘위안부’ 모습을 보았다. 한없이 눈물만 흘리던 그녀는 그들이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일 때 나도 그들과 함께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보스니아 전쟁을 보며 그녀는 이 세계가 별로 변하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여성들은 다시 강간을 당했다. 전쟁이 나면 강간은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일인 것처럼, 전쟁이 강간을 정당화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이 당한 일이 50년 전에 일어난 ‘과거사’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의 이야기를 해야만 한다는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1992년 12월, 일본의 전쟁범죄, 전후 보상과 관련하여 도쿄에서 열린 국제 청문회에 출석해 증언하게 된다. 

그곳에서 그녀는 아시아 일본군 위안부들을 만나 서로 끌어안으며 고통스러웠던 인생의 한이 갑자기 녹아내리는 것 같은 경험을 하게 된다. 한국, 타이완, 필리핀, 중국에서 온 위안부들과 네덜란드령 동인도(인도네시아)에서 온 그녀가 증언을 했다. 객석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많은 이들이 눈물을 흘렸다. 어린 여성들은 날마다 강제로 20명에서 50명까지 일본 군인을 상대해야 했고 자주 구타를 당했고 강제로 낙태를 당하기도 했고 불임 주사를 맞기도 했다.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여성에 대한 가장 잔인한 집단 강간임이 분명했다. 이 용감한 할머니들이 증언대에 선 까닭은 이런 전쟁 범죄가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자신이 수용소 생활을 했던 자바를 다녀온 뒤, 다큐멘터리 영화 '침묵의 50년'을 만들었고 일본군 ‘위안부’들이 일본 정부로부터 사과를 받고 명예를 회복하는 일을 위한 운동을 계속 펼쳤다.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행사에 참여해 발언했다. 그녀가 다른 일본군 ‘위안부’를 만나는 일은 굉장히 중요한 일이었다. 그녀는 말했다. “내가 그들 삶의 일부가 되었고, 그들이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 우리는 고통을 공유하고 있었고, 이렇게 함께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달라붙어 있던 수치심을 던져 버리는 데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놀라운 것은 그녀가 세계적 행사에 참여하면서 그곳에서 당시 전쟁에 참전했던 일본 군인들을 옆자리에서 만날 기회가 되면 전쟁에 참전했었는지를 묻고 대부분은 위안소를 찾거나 심지어 수용소 소장이었던 이들을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녀는 먼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을 용서합니다.” 그러면 그들은 “정말 미안하다”고 대답했다. 그들은 감정이 격해졌고 악수를 했다. 그녀는 용서의 놀라운 체험을 했고 그것은 치유의 한 과정이었다.

필자는 그런 그녀의 용기에 용서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자신을 그토록 짓밟았던 일본 군인들을 다시 만난 자리에서 어떻게 그런 마음이 가능했을까.... 그것은 분명 하느님께서 불러일으켜 주신 마음일 것이다. 용서는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마음의 평화를 이루기 위한 거룩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네덜란드 여왕으로부터 훈장을 받았고 그 이후로도 수많은 상을 받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소중한 상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준 상이었다고 말한다.

여전히 날이 어둑해지고 거실의 커튼을 닫을 때면 몰려온다던 공포와 그런 매음굴에서 자신을 지켜준 신앙과 믿음에 대한 그녀의 마음을 생각해 본다. 전쟁은 이렇게 인간의 모든 삶을 파괴하고 특별히 여성으로서 인생에서 떨칠 수 없는 죽음과도 같은 상처를 남긴다. 강간은 더 이상 전쟁의 불가피한 결과도 아니고 군인에 대한 ‘대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더 많은 이들이 인식해야 한다.

지난날 수세기 동안 여성의 인권은 제대로 존중받은 적이 없었고 그것은 심지어 교회 안에서조차 불합리하게 적용되었다. 여성이 하나의 인간으로서 대접받기 위한 노력과 인정의 역사 또한 그리 길지 않다. 전쟁에서 여성의 위치가 결국 남성의 사기를 북돋기 위한 하나의 물건이나 보상으로 여겨졌던 것은 수세기에 걸쳐 온 여성 인권의 문제와 깊이 결부되어 있다. 결국 여전히 약자일 수밖에 없는 여성들은 같은 고통을 느끼는 자들과 연대하여 싸우고 세상을 바꿔 나가려 하는 것이다.

필자에게 위안부 문제는 단순히 전쟁 시에 있었던 문제였다고만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도 사회적으로 역사적으로 여성이 성적 노예로 전락하고 그저 아이를 생산하는 수단으로 여겨진 것은 너무나 오랜 남성주의적 역사관에서부터 비롯된 잘못된 관점이다. 뿌리 깊이 박혀 있는 여성 혐오와 여성 비하는 전쟁이든 평화 시에든 지금도 우리 곁에 수시로 세계 각국에서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단순히 전쟁, 그리고 그로 인한 ‘위안부’의 문제로 국한해 보기보다는 지금껏 역사적으로 잘못 평가되어 온 여성, 아니 평가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던 여성의 제대로 된 인권을 회복하는 시간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모든 이에게 공평하며 하느님은 너무도 사랑하신 (여성인) 마리아를 통해 예수를 세상으로 내보내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 여성은 구원의 통로였고 하느님 구원사업의 중심이었음을 모든 신앙인들은 특별히 더 기억해야 할 것이다.

구영주(세레나)
11살, 세례 받고 예수님에게 반함. 뼛속까지 예술인의 피를 무시하고 공대 입학. 돌고 돌아 예술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며 피는 절대 속여서는 안 됨을 스스로 증명. 아이들과 울고 웃으며 화가로, 아동미술치료사로 성장.
칼럼과 서평 쓰기가 특기며, <가톨릭 다이제스트> 외 여러 잡지에서 자유기고가로 활동. 현재 남편과 7살 아들, 두 남자와 달콤 살벌한 동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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