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현철

“어쩜 이딴 곳에서 미사를 드릴 수 있지?” 

7월 11일 수요일 저녁, 대한문 쌍용차 분향소 앞을 지나가던 한 초로의 여인이 목소리를 높였다. 분향소 앞 길거리에서 ‘30번째 희생자 추모 및 쌍용차 문제 해결을 위한 미사’를 봉헌한 직후였다 “40년 넘게 성당에 다니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야. 정말 충격이네.” 그 여인의 얼굴은 정말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사람만 충격을 받은 게 아니었다. 그렇게 말하는 그 사람을 보고, 나도 충격을 받았다.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키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선포했다.(루카 4,18 참조) 예수님을 따라, 우리 그리스도인도 하느님나라의 도래라는 복음을 선포하고 실현하도록 세상에 파견된다. 그러나 세상에서 하느님나라는 순탄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갈 것이다.(마태 10,17) 하느님나라가 와야 할 세상은 ‘순백’의 장이 아니라 하느님나라를 반대하는 힘이 위세를 부리는 곳이다. 하느님나라는 반-하느님나라의 와중에서 선포되고 실현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세상에는 이런 상황을 보여 주는 곳이 차고 넘친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대한문 쌍용차 분향소도 그런 곳이다. 다른 해고자들도 그렇지만, 쌍용차 해고자들은 분명 성서가 말하는 억눌린 이들이다. 이들과 함께하려고 대한문 분향소를 찾는 사람들이 있다, 예수께서 그랬듯이. 그곳에 가서 함께 하는 것은 해고자들에게 글자 그대로 기쁜 소식, 복음이다. 하느님나라를 선포하고 보여 주는 일이다. 한데, 복음이 선포되는 분향소 바로 옆에는 ‘태극기’ 운운하는 단체가 자리를 잡고 앉아, 수시로 시비를 걸고 욕을 한다. 문화제나 미사에는 맞불 집회로 방해한다. 지난 정권에서는 경찰들이 앞장서서 방해를 했다. 이 모두가 하느님나라의 도래를 반대하는 세력이다.

11일 서울 대한문 앞에서 김주중 씨 추모와 쌍용차 문제해결을 촉구하는 미사가 봉헌됐다. ⓒ김수나 기자

하느님나라를 반대하는 세력의 반발 속에서 하느님나라를 선포하고 실현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것은 양자택일의 상황이라, 어느 누구도 중간에 머물 순 없다. 분향소에 함께하든지, 옆에서 분향소를 공격하든, 둘 중의 하나다. 중립은 결국 어느 편을 드는 것이다. 성서의 예언자들은 사람들에게 하느님에게 돌아오라고 요구하고 호소했다.(호세 14,2 참조) 하느님은 세상의 가난하고 억눌린 이들,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함께하신다.(신명 10,18 참조) 하느님을 찾는다는 것은 이 사람들에게 다가간다는 것을 뜻한다. 이들이 배제된 곳에는 하느님도 계시지 않는다.

분향소 미사를 보고 ‘충격을 받은’ 그 여성은 미사는 하느님의 성전인 성당에서만 봉헌해야 한다고 배웠고, 지금껏 그렇게 살아온 듯하다. 그러나 하느님은 교회라는 건물 안에 계시지 않는다. “내가 살 집을 네가 짓겠다는 말이냐? 나는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데리고 올라온 날부터 오늘까지 어떤 집에서도 산 적이 없다.”(2사무 7,5) 교회 안에만 하느님이 산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느님을 교회에 가두는 꼴이다. 교회는 하느님을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찾도록 사람들을 초대하고 격려하고, 필요하다면, 경고해야 한다. 

쌍용차 사태로 22번째 희생자가 난 2012년 4월, 23번째 희생자를 막기 위해 대한문에 분향소를 설치했지만, 1년 만에 철거되었다. 철거된 바로 그곳에서, 그해 11월까지 문제 해결을 염원하고 촉구하며 매일 미사를 봉헌했다. 5년이 지났고 30번째 희생자가 나왔다. 이제 31번째 희생자를 막기 위해 대한문에 다시 분향소를 설치했다. 미사를 봉헌했다. 그 여인이 말했던 ‘이딴 곳’에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하느님은 세상 어디에도 계시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대한문 분향소를 찾아 미사를 봉헌하는 연유다.

 
 

조현철 신부(프란치스코)

예수회, 비정규노동자의집 ‘꿀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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