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욜라 즐거운 육아일기 - 87]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오는 아빠를 반갑게 맞는 아이들 모습을 보면 흐뭇하기도 하지만 가끔은 이건 아닌데 싶기도 하다. 엄마로 말할 것 같으면 저녁나절 내내 아이들을 위해 헌신하였다. 무겁게 장을 봐 와서 요리를 하고, 아이들 밥상을 차렸다. 자신의 저녁밥은 먹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아이들이 밥 먹는 것, 반찬 집어 먹는 것만 보았다. 그런데 제길. 아이들이 밥을 시원스레 먹질 않는다. 내 입에만 맛없는 게 아닌가 보다. “얘들아, 장난치지 말고 어서 먹어. 안 그럼 치워 버릴 거야!”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은 각박해져 가는데, 마침 한 아이가 덤벙거리다 제 밥그릇을 쳐서 뒤엎었다. 밥그릇은 식탁 아래로 떨어져 데구루루 굴러가고 밥덩이는 마룻바닥 어딘가에 패대기쳐졌다. 그런데도 밥그릇을 엎은 장본인이 반성의 기미 없이 키키득 웃을 때, 나는 조용히 일어나 집 안을 단속한다. 창문을 닫는다. 옆집 할머니가 달려오시지 않도록, 옆집 이장님이 이층 창문을 열고 우리 집에서 무슨 사단이 났는지 귀를 쫑긋 세우시지 않도록. 

“야아아아! 너 지금 이게 뭐야! 응? 그러게 장난치지 말라고 했잖아. 이거 당장 치워! 네가 치우란 말이야. 꽤애애액...” 역시 괴성은 효과가 있다. 밥그릇 장본인은 코를 훌쩍이며 밥풀을 주워 담고 구경꾼들은 묵묵히 밥을 퍼 먹는다. 이 기세를 몰아가자.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가르치자! 훈계하자! 하는데 하필이면 그때, 달칵하고 문이 열리며 아이들의 아빠가 들어올 게 뭐람. “와아아아. 아빠아아아....” 밥알을 줍던 아이나 밥을 먹던 아이나 일제히 환호하며 뛰어간다. 가정에 물의를 일으킨 못된 녀석들을 잡아 혼내려고 했던 게 불발이 되었네. 아이들은 마치 지옥불에서 구원받은 얼굴로 나를 돌아본다. 아하, 그렇단 말이지? 아빠는 구세주, 엄마는 지옥의 대마왕 하데스로구나. 뒤늦게 와서 인기를 독차지하는 아빠라니, 너무 불공평해. 성질 더러운 엄마 탓이라고? 꼭 클라이맥스 때 눈치 없이 들어오는 아빠 탓은 아니고? 이건 모두 배은망덕하기 이를 데 없는 너희들 탓일지도 모르지! 아니, 어쩌면 그 셋 다 잘못이 없을지도 모른다. 단지 수학적인 현상일 뿐인지도. 말하자면 ‘함께 있는 시간이 늘어난다고 해서 긍적적 감정의 수치도 그에 비례해서 늘어나진 않는다.’와 같은 가설. 혹은 ‘함께하는 시간이 극단적으로 적거나 많을 때 감정의 긍정, 부정 비율은 균형을 잃고 한쪽으로 치우친다’는 감정의 아이러니?

마도로스 아빠는 그런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대표적 인물이다. 아이들에게 밥을 해 주거나 목욕 한번 안 시켜 줘도 집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곧잘 좋은 아빠, 이상적인 아빠가 되기도 하니까. 그 아빠가 하는 일은 가끔 나타나 아이를 목마 태우고, 신문물 장난감을 선물로 주고, 소라껍데기나 고둥 껍질에 귀를 대 보면 파도소리가 난다는 걸 알려 주는 것이다. 그리고 동산에 같이 올라 피리를 분다. 보통의 엄마라면 어찌 집안일을 제쳐 두고 피리를 불 수 있겠냐마는 마도로스에게는 식은 죽 먹기다. 마도로스 아빠는 아이 얼굴에 묻은 얼룩은 못 보더라도 아이 눈에 담긴 그림자를 본다. 아이 이마에 나는 열은 놓치더라도 아이 가슴속 열망의 온도를 감지한다. 내가 상상하는 마도로스는 그렇다. 그리고 중요한 대목. 어느 날, 마도로스 아빠는 떠난다. 꼭 떠나야 한다. 엄마가 말 안 해 줘도 이제 조금 컸으니 아이도 안다. 아빠는 바다에 갔고, 언젠가 돌아올거라는 걸. 바다는 위험하고, 곁에 없는 아빠는 다정하기만 한데 아이는 엄마의 잔소리가 바닷물의 포말처럼 부서지는 먼 바다 너머에서 아빠를 찾는다. 이번에는 아빠가 말린 불가사리를 잡아 오실거야... 바닷속 산호를 잡아다 주신다고도 했어. 그렇게 아이는 일 년 365일 곁에서 수발 들어 준 엄마 못지않게 단 3일을 지낸 아빠를 사랑할 수가 있다. 아니, 어쩌면 엄마보다 더 사랑한다.

아이들 셋. ⓒ김혜율

이런 기현상이 365일과 3일의 시간 차이 때문이라면 나도 그럼 365일 말고 3일 해야겠네! 아이들과 나 사이, 우리의 관계개선을 위해 엄마인 내가 멀리 가 보는 거다. 소소한 잔소리 따위로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모조리 쓰지 않으려면 차라리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들을 버리는 게 낫다니, 말이 안 되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 우리 사이에 시간의 공백은 그리움과 애틋함, 사랑으로 메워지겠고. 만일 그렇다면 나도 아이들에게 웃는 얼굴의 인기만점 엄마가 될 수 있겠다. 아이들에게 ‘코 후비지 마!’와 같은 잔소리를 더 이상 하지 않는 순도 100퍼센트의 엄마, 마도로스 엄마가 될 수도 있겠다.

아이가 코를 후비더라도 그 까짓것 나는 참는다 하는 사람들은 성자의 반열에 올랐거나 그런 아이를 실제로 만나 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일련의 과정을 겪고 나서도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내 주변에 떠오르는 사람은 올해 87살 옆집 할머니 정도다. (옆집 할머니로 말하자면 일제 강점기를 몸소 겪었고, 광복도 보았고, 6.25도 겪었고, 새마을운동에도 가담했으며, 88서울올림픽에 2002월드컵, 밀레니엄을 거쳐, 제4차 산업혁명의 물결 속에서도 오늘도 변함없이 야들야들하게 연한 상추를 키워 내시는 분이다.) 코 후비는 아이를 끝까지 자애로운 눈길로 쳐다볼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다음의 단계를 밟아 보면서 자신의 혈압이 가파르게 상승하는 것을 느껴 보길 바란다. 

코딱지, 그것은 인생에 있어서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무시할 수도 없다. 아이가 사람들 많은 데서 코를 후빈다고 가정해 보자. 다른 사람들이 중하냐, 코 답답한 우리 아이가 중허지, 잘만 처리하면 된다고 마음을 가다듬으며 위기를 모면했다고 치자. 그런데 아이가 코딱지를 주위에 있는 형제자매에게 들이대며 일대를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있다면? 그래도 ‘괜찮아, 잘 타이르면 되지.’ 하는 당신이라면 다음 단계로. 아이가 이번엔 덥석 제 손가락을 입에 집어넣었다 뺐다면? 설마...! 입맛을 다시는 것이 연극이 아니라면 먹은 것이 맞다. 그걸 왜? 도대체 왜! 이런 의문을 뒤로 하고 제정신을 차린 당신이라면 그 다음 단계가 기다린다. 아이가 이번엔 코딱지를 들고 당신을 목표물로 삼아 다가온다. 주변에 휴지는 없고 악마 같은 아이를 말려 줄 사람도 없다. 아니야, 안 돼. 그러지 마. 애걸하는데도 애가 말을 안 듣고 키키득 웃으면서 코딱지를 당신의 바지에 묻혔다면? 게다가 이 바지는 오늘 드라이클리닝을 한 새 바진데! 이때까지도 화를 내거나 고함을 지르지 않고 살아남았다고? 아직 안심하기에는 이르다.

지금까지 모든 걸 지켜본 나머지 아이들이 처음부터 흉내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코딱지는 한 개인의 단순한 도발에 그치지 않는다. 하나의 문화가 되었다. 공격하는 코딱지와 도망가는 코딱지, 코딱지들의 아수라장... 그 앞에서는 인내도, 훈계도 소용없다. 이때껏 용케 버텼던 나 또한 이 단계는 넘기지 못하고 울었다! 얘들아. 제발, 그러지 마. 엄마 너무 힘들다. 엉엉엉.

마도로스 엄마라면 아마도 모든 단계 통과일 것이다. 오랜만에 집에 들어와서 아이한테 한다는 소리가 ‘야, 너 코딱지 그만 파.’는 아닐 테니 말이다. 마도로스 엄마는 코딱지를 앞에 두고도 마음이 편안하다. 아니, 그녀의 눈에는 아이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설사 아이가 엄마 앞에서 코딱지로 문화를 만들더라도 엄마는 아이를 사랑스럽다는 듯 안아 줄 것이다. 왜냐면 마도로스 엄마는 내일 이 집을 또 떠날 것이기 때문에.

나도 그리 될 수 있을까? 허투루 쓰는 시간들, 우리 관계에 악영향을 끼치는 시간들을 반납하고 짧지만 강렬한 시간을 보낸다면? 때마침 나도 시간운용에 있어 마도로스 비슷한 워킹맘이 되었으니까. 그렇다고 아이에게 더러워진 옷을 갈아입히는 대신 조개껍질로 엮은 목걸이를 걸어 준다든가, 밥 먹으라고 하는 대신 피리를 부는 엄마가 되었냐 하면 전혀 아니다. 함께하는 시간만 확 줄었지, 잔소리는 예전과 똑같다. 잔소리 한다고 입이 다 아플 지경이다. 그래도 마도로스답게 매일 아침 먼 바다로 나갔다가 저녁이면 다시 돌아오고 있다. 오는 길 어느 곳에서 진주조개 하나 발견하고는 기뻐서 발걸음을 재촉할 것이다. 아이들을 다시 만나는 설렘 속에서 나는 매일 헌 엄마 대신 새 엄마가 되는 것 같다. 우리가 비록 부실한 마도로스 엄마라도 그건 그것대로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게 아닐까.

 
 

김혜율(아녜스)
(학교에서건 어디에서건) 애 키우는 거 제대로 배운 바 없이 얼떨결에 메리, 욜라, 로 세 아이를 낳고 제 요량껏 키우며 나날이 감동, 좌절, 희망, 이성 잃음, 도 닦음을 무한반복 중인 엄마. 워킹맘이다. 다행히 본인과 여러 모로 비슷한 남편하고 죽이 맞아 대체로 즉흥적이고 걱정 없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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