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 강신숙]

'본당이 야전병원이 될 수 있을까,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동안 개인적으로 경험했던 본당이란 사목현장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고 본당이 야전병원과 어떤 연관을 갖는지, 현재 본당이 야전본당으로서의 기능이 가능한지를 탐색하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이유는 명확합니다. 저는 그동안 ‘성직중심주의’를 강하게 비판하는 입장이면서도 늘 선의와 열정으로 교회 안팎의 긴박한 문제에 뛰어든 수많은 훌륭한 사목자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듯이 아무리 선한 의지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현행 사목 시스템만으로는 ‘야전본당’으로서의 기능이 가능할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대한민국에 어느 날 촛불혁명이 분출되고 정치사회 전반에 개혁의 닻을 올리더니, 또 어느 날 갑작스럽게 불가능해 보였던 남북 평화의 물결이 손에 잡힐 듯 한반도를 뒤덮고 있습니다. 간절히 원하면 어느 순간 우리 교회 역시 불가능해 보였던 개혁의 과제들이 꿈처럼 불붙을 수도 있다는 상상을 해 봅니다.

저는 우선 본당사목을 언급하기 전에 프란치스코 교종이 언급한 “야전병원”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래야 한국교회의 본당이 어떻게 야전병원일 수 있는지, 그것이 가능하기는 한지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야전병원은 교종 자신이 겪고 목격한 남미의 역사적 체험에 바탕을 둡니다. 실제로 교종도 밝히고 있듯이 '복음의 기쁨'은 남미의 '푸에블라 문헌'과 최근 발표된 '아파레시다 문헌', 바오로 6세의 '현대의 복음선교'의 정신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종이 생각하고 의도하는 바의 “야전병원” 현장은 구조적 빈곤과 체제의 불평등, 억압과 노예로 수탈당한 민중의 역사를 빼고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20세기 중반 남미에서 시작된 민중의 각성과 저항운동은 배제된 계층과 인종, 대륙과 젠더 문제에 이르기까지 막대한 사상적 영향을 미쳤습니다. 수천 년간 입을 다물도록 강요당해 왔던 사람들이 ‘입’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얌전히 명령을 받들어야 마땅했던 자들의 반격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은 대체 누구의 편인가? 하느님의 말씀은 누가, 누구에게, 대체 왜, 어떻게 전달되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물음들은 지난 2000년간 아무 문제 없이 “진리”를 소유했던 사람들, 특히 교회의 지도자들에게도 적잖이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초대교회부터 지금까지 유지해 온 하느님의 거룩한 말씀과 신학이 훼손되고, 자신들이 자랑처럼 여기는 거룩한 전통과 오랜 역사가 위기에 처할 수 있다고 하다는 것은 몹시 힘든 일입니다. 남자의 전유물인 사제직의 모든 권한을 여성에게 내어준다는 것이 어찌 가당키나 한 일이겠습니까? 그러니 존경하올 ‘교황 성하’께서도 당신 통치하에 이런 일은 없을 것이라 못 박은 것입니다. 

혁명은 지금까지 견고한 ‘진리’로 간주되었던 모든 우상적 토대를 허물고 ‘사흘 만에 새로운 성전을 짓는’ 납득하기 어려운 일인 것입니다. 불온하고 이단으로 여겼던 자들, 화형판결로 잿더미가 된 ‘마녀’들이 살아서 판결의 현장으로 돌아오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제 이들이 중심으로 돌아와서 새롭게 복음을 선포할 것입니다. 우리 시대에서 배제되고 쫓겨난 자들, 그들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든 이들은 ‘사흘 만에 새로 세워질 주님의 성전’이며 ‘몸’이고, 예수 자신(마태 25,34-40)이기도 합니다. 노동자, 흑인, 빈곤계층, 성소수자, 난민들, 내전의 희생자들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이들, 공동체 밖에 세워진 이들의 현장이 곧 야전터인 것입니다. 교종의 ‘야전병원’은 이들의 병원이고 이들을 위한, 이들에 의한 병원이 될 것입니다. ‘야전병원’은 배제된 사람들에게 들려진 교회의 새로운, 그러나 충격적인 이미지이고 비전이며 전망입니다. 

교종은 이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명확히 언급합니다; “이제는 문제가 단순히 착취와 억압의 현상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어떤 것입니다. 배척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 속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배척된 이들은 더 이상 사회의 최하층이나 주변인이나 힘없는 이들이 아니라, 사회 밖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착취된’ 이들이 아니라 쫓겨난 이들, ‘버려진’ 사람들‘입니다."('복음의 기쁨', 53)

프란치스코 교황 (사진 출처 = Wikimedia Commons)

교종 프란치스코의 정신을 단적으로 보여 준 상징적 사건은 교종 즉위 후 첫 방문지인 이탈리아 최남단 람페두사 섬에서 일어났습니다. 람페두사 섬은 전쟁과 가난으로 생명을 위협받고 있는 아프리카의 난민들이 목숨을 걸고 탈출하여 정박하는 전초기지 같은 곳이었습니다. 수많은 난민이 보트에 의지해 탈출을 감행하다 바다에 수장되곤 하던 비극의 현장이었습니다. 교종이 이곳을 방문해서 전 세계에 전달하고자 한 메시지는 매우 뚜렷하고 또 분명합니다. 그가 앞으로 교회의 중심에 무엇을 두고자 하는지 교회는 이들을 위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를 알게 한 사건이었습니다. 람페두사 섬에서 교종은 기꺼이 스스로를 ‘야전병원’으로 드러냈습니다. 물론 교종이 처음 ‘야전병원’이 된 것은 아닙니다. 교회는 역사 속에서 긴급사태에 응답한 무수한 성인들, 수도회 설립자들을 기억합니다. 다만 교종은 이 시대가 지난 과거 어느 때보다 총체적 위기에 처해 있으며, 그 파국의 결말이 전 지구적으로 임박했다는 것과 그럼에도 교회 현실인식이 이에 미치지 못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통감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실 누구보다도 깊은 연민과 통찰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람페두사 섬을 바라본 교종의 마음은 말할 수 없는 비통에 잠겼습니다. 그는 '이주자들이 바다에서 죽어가고 있다. 희망의 배가 죽음의 배가 되고 있다'고 외쳤습니다. “…수 주 전 이 비극에 대해 처음 들었습니다. 이런 비극이 빈번하다는 걸 알고 난 뒤부터는 줄곧 심장이 가시로 찔리는 듯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와서 기도하고, 내가 여러분과 함께하고 있다는 징표를 보여 주고 싶었습니다. 또한 이런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우리 양심에 도전하고 싶었습니다. 제발, 이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합시다!” 그는 죽음의 비극에 처한 가엾은 사람들을 위해 모든 교회는 기꺼이 ‘야전병원’의 구성원이 될 것을 촉구합니다. “저는 먼저 여러분들, 람페두사와 리노사의 사람들, 여러 연대단체들, 봉사자들과 안전요원들 등, 더 나은 미래를 향해 항해하는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돕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와 격려의 인사를 드리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소수입니다만, 연대의 본보기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탄식합니다. “우리 현대인들은 이웃 형제자매들에 대한 책임감을 상실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에서 언급하신 사제와 레위인의 위선에 빠져 버렸습니다. 안락을 추구하는 문화는 오직 우리 자신만 생각하도록 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이웃의 고통에 무감각하게 만들고, 사랑스럽지만 허상 가득한 비누거품 속에 살도록 합니다. 그것들은 ‘무관심의 세계화’로 이끄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계화된 세상에서 세계화된 무관심으로 타락했습니다. 우리는 이웃의 고통에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나한테는 영향 없어, 나하고 무슨 상관이야, 그건 내 일이 아니야! 하고 말입니다. 무관심의 세계화는 우리 모두를 무책임한 ‘익명의 사람들’로 만듭니다. 이름도 없고, 얼굴도 없는 그런 사람들 말입니다. (…) 저는 여러분에게 질문을 던지고자 합니다. ‘누가 이들을 위해 울고 있습니까?’ 여기 형제자매들의 죽음에 누가 애통해하고 있습니까? 이 (죽음의) 배를 탄 사람들을 위해 누가 울고 있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울어야 할지, 어떻게 연민을 경험해야 할지를 잊었습니다. 이웃과 함께하는 ‘고통’ 말입니다. 무관심의 세계화가 우리에게서 슬퍼하는 능력을 제거해 버렸습니다!”

이것이 교종이 인식하는 ‘야전병원’으로서의 교회입니다. 그가 본당사목이든, 특수사목이든, 고위성직자든, 이제 막 교회 문턱을 넘어선 이들이든 타종교나 무신론자를 막론하고 온 세계에 촉구하고 호소하는 이유입니다. 여기가 바로 교회가 자기 현존을 드러내는 장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전병원 교회로서는 본당사목이 예외적으로 지금과 같은 안전지대로 그대로 남아 있는 일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 함께 뭔가를 하도록 밀어내야 하고 재촉해야 합니다. “자기 안위만을 신경 쓰고 폐쇄적이며 건강하지 못한 교회보다는 거리로 나와 다치고 상처받고 더럽혀진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복음의 기쁨', 49)

따라서 ‘야전병원’으로서의 교회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반드시 이행되어야 할 복음적 과제입니다. 본당 역시 본당의 안전한 거주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저마다 야전본당으로서의 구체적인 복음적 목표와 수행방식이 무엇인지를 고민해야 하며, 이를 위해 할 수 있는 교육이 제공되어야 합니다. 각자 역할분담이 이루어지고 긴급한 상황에 맞는 시스템으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교종이 세계교회에 던진 이 무게 담긴 이미지는 이후 여러 차례 걸쳐 언급되었지만 아직껏 한국교회 안에서 이런 소리가 교구정책이나 본당 사목과 연결되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습니다.(부디 나의 부족한 정보 탓이었길 바랄 뿐입니다)

‘야전병원’은 후방에 세워진 일반적 병원이 아닙니다. 우리는 종종 이 두 개의 이미지를 혼동해서 사용하거나 의미를 축소시켜서 말하곤 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해 오고 있는 본당의 ‘일선’ 사목현장을 ‘야전본당’으로 전제하고 이 둘을 환치시킬 위험을 집니다. 이것은 교황이 언급한 야전병원의 맥락과 전망을 왜곡시킬 수 있습니다. 만일 ‘야전병원’이 긴급한 요청을 필요로 하는 장이 아니라면 굳이 이 이미지를 취할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야전병원의 존재 이유는 이런 전쟁과 같은 터전 한복판에서 이루어지는 ‘온갖 형태의 치유행위’가 이루어지는 곳이며, “인간 존엄을 잃어버린 긴박한 삶의 조건과 구조에 처한” 모든 현장의 상징 같은 것입니다.

현재 우리 교회가 안고 있는 가장 커다란 문제는 야전병원의 이미지와 대척점에 선 안정과 편의주의에 깊이 빠져 있다는 점입니다. 교황의 다음과 같은 일침은 한국교회 본당사목 현장에서도 여전히 유효할 것 같습니다. 그는 일선 사목자들이 취하고 있는 위험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경고를 내린 바 있습니다. 사목자들의 안이한 영적 세속화의 결과로서 “전례, 교리, 교회의 특권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모습”과 “복음이 현대의 구체적인 요구에 실제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으며, 이렇게 해서 교회생활은 박물관의 전시물이나 선택된 소수의 전유물”로 전락하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그 주요 수혜자는 하느님 백성이 아니라 제도로서의 교회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적 열정은 더 이상 없고 자아도취와 자기만족의 공허한 쾌락만이 남게” 됩니다.('복음의 기쁨', 95) 이는 교황의 표현을 빌리자면 “선으로 포장된 끔찍한 타락”(97)과 같습니다.

본당이 야전병원이 될 수 있을까? (이미지 출처 = Pixabay)

만일 한국교회 본당이 ‘야전병원’으로서의 사목 현장이 되고자 한다면 현재의 본당 운영시스템과 사목적 패러다임은 완전히 달라져야 할 것입니다. 본당은 다양한 의견과 욕구를 지닌 사람들의 공동체로서 모두가 같은 신념과 가치를 소유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이들을 일치시키고 함께해 나갈 사목자가 현재처럼 정해진 임기만으로 본당에 임한다면 본당 체질을 바꾸어 나가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장기적으로 적합한 일꾼 양성과 훈련도 한시적으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교구 차원의 지속적이고 통일성 있는 교육과 장기적 계획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그래야만 사목자와 함께 동행하고 움직이는 야전본당으로서의 기틀이 가능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려면 사목자 양성이 무엇보다 중요해질 것이고, 신학교 교과목과 다양한 훈련을 이끄는 야전 체험도 개발될 것이며, 기도와 영성을 이어주는 통합적 훈련도 함께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본당이 무엇을 우선 중심으로 두는가에 따라 교회의 전반적 사목방향과 시스템이 함께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단적인 사례입니다. 현장을 목격하고 체험한 구성원은 더는 안이한 생활로 돌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망루에 올라 모든 감각과 시선을 동원해 전후방의 경계를 넘나드는 파수꾼들로 행동할 것입니다.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등 교회 모든 구성원들은 과거처럼 기계적 수동주의로 살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 역시 새로운 사목 파트너로서 새롭게 자신을 인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의 낡은 성직중심주의나 관료적 체제로는 ‘야전병원’으로서의 존재적 임무를 수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야전본당은 모든 구성원이 하나의 목표를 수행하기 위해 상호 주도적인 동시에 협력적이며, 깊이 있는 판단과 분별로 호흡을 맞춰 나갈 것입니다. 본당은 이제 더 이상 성직자의 독점 영역도 신자들의 개별 무대도 될 수 없습니다.

세계에는 무수한 제2, 제3의 람페두사 섬이 있으며, 그 같은 생사고락의 현장은 그 현장에 대한 연민과 사랑의 즉각적 투신을 요청합니다. 그 현장은 준비된 요원들을 필요로 하며, 모두가 성원하고 마음을 다해 지지하는 수많은 사람의 염원으로 이루어집니다. 전후방은 서로 긴밀히 연대해 나갈 것이므로 이제 이 둘의 경계를 나누는 일은 무의미해질 것입니다. 후방에 남아 있는 사람들 역시 전방을 위해 뭔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나설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보편성과 일치, 거룩함은 이렇게 빛날 수 있습니다. 예수의 산상설교 현장은 지구촌 곳곳에서 믿는 이들의 투신에 의해 ‘행복하고 기쁠 것’입니다.

이제 아프리카와 유럽의 경계에 람페두사 섬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북한이 있습니다. 북한은 오랜 기간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고립된 지역이었으며, 아직도 절대독재의 통제와 사회주의 체제하에 놓여 있어서 대체 그곳이 어떤 사회인지를 가늠하기가 어렵습니다. 북한은 여전히 비밀유지와 보안으로 가려져 있어서 아무도 북한을 전체적으로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는 북한 개방이 이루어질 날을 간절히 기대하지만 한편 걱정도 많습니다. 강력한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물밀 듯이 밀려들 것이고, 그 여파가 어떻게 북한 사람들을 잠식하고 왜곡시킬지, 북한만이 지닌 고유한 순수성과 가치들은 어떻게 지켜낼 수 있을지 모든 것이 미지수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껏 말했듯이 남한의 교회는 후방지원체제로서 제대로 준비하고 훈련될 수 있는지, 아니면 현재의 교회 모습을 그대로 이식시키는 것으로 끝날지 이 또한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바라는 것은 우리가 북한선교를 위해 좀 더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는 것과 그들의 특수성을 존중하고, 보다 긴박한 요청이 무엇인지 조심스럽게, 그러나 지혜와 식별을 통해 접근해 나가야 한다는 점입니다.

북한선교는 우리 남한 교회에 상상 이상의 도전과 기회의 땅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통해 우리의 현재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을 것이고, 그들에 의해 우리 교회가 다시 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 서유럽 자본시장에 문을 연 동유럽 국가들이나 중국, 베트남이 그 뒤 겪었던 자본적 폐해가 북한사회에 그대로 유입되고 노출되지는 않을지 걱정이 앞섭니다. 그래서 우리의 북한선교 준비라는 것이 고작 종교적 교리나 세례자 양산 정도로 축소되고, 지금과 같은 교회 시스템이 판박이로 이식되지는 않을지 우려됩니다. 그래서라도 이 기회에 남한이 안고 있는 수많은 폐해가 제대로 다루어졌으면 합니다. 이제 곧 닥칠 이 기쁘고 설레이는 만남을 위해 지금이라도 서둘러서 교회 시스템 전반을 정비하고 모든 목표와 절차, 방식이 제대로 논의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대해 봅니다.  

강신숙 수녀

성가소비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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