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 희구 성향' 종교계의 대규모 시국선언은 민심 반영한 것

불교계, 종회의원 과반수가 참여하는 대규모 시국선언

조계종 승려들이 15일 서울 종로구 조계사에서 '이명박 정부의 참회와 민주주의의 발전을 염원하는 대한불교조계종 승려 1447인 시국 선언'을 발표했다. 역대 최대 규모인 이번 선언에서 승려들은 "충격적인 전직 대통령의 서거라는 초유의 사태에도 일말의 반성조차 없는 현 정부의 부도덕한 행태와 죽음마저 또다시 음해하는 정치 검찰의 패악을 목도하고 있다"며 이명박 대통령과 집권여당의 사과와 검찰 등 사정기관의 공정성 확보 등 제도 개혁을 촉구했다.

이들은 또 "남의 충고를 듣지 않고 자비심이 없고 포악하면 왕이 권위를 잃고 나라에 도적이 들끓게 된다"는 불경(증일아함경)의 내용을 인용하면서 ▲ 표현과 집회, 언론의 자유 등 기본권 보장 ▲ 용산참사의 책임 있는 해결 ▲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정책적 배려 ▲ 4대강 살리기 및 문화재 파괴행위 중단 ▲ 자연공원법 개악 중지 ▲ 대북 강경노선 철회 등 이 대통령을 비롯한 집권세력의 결단을 촉구했다.

불교계의 시국선언은 교수 등 지식인, 시민사회 등 각계각층의 시국선언에 뒤이은 것이지만 그 파괴력은 남다른 면이 있다. 앞서 있던 각계 선언이 부문 내의 진보인사들이 주도한 면이 없지 않았지만, 이번 조계종 승려들의 선언은 불교계 진보와 보수를 포괄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엄격한 수행이 강조되는 하안거 기간임에도 1,500명에 가까운 인원이 참여하고 조계종의 국회격인 중앙종회 의원의 과반수인 42명(전체 80명)이 참여한 점에서 더욱 그렇다.

불교신도의 80%이상이 속해 있는 조계종은 촛불정국이 한창이던 지난해 8월에도 대규모 시국법회를 개최해 이명박 정권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고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때도 가장 먼저 전국에 분향소를 설치하면서 정권과 검찰의 표적수사를 규탄하기도 했다.

▲ 15일 오후 서울 종로구 조계사 대웅전 앞에서 대한불교 조계종 스님 시국선언 준비모임 주최로 열린 '이명박 정부 국정운영의 대전환을 촉구하는 불교계 시국선언'에서 현각 스님(불교환경연대집행위원장)이 시국선언문을 낭독하고 있다. ⓒ 유성호 시국선언

특히 현 조계종 총무원장인 지관 스님은 노 전 대통령 서거 이전부터 검찰의 먼저털기식 강압 수사에 비판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이 전해지자 곧바로 애도문을 통해 "국가의 대내외적 위신을 고려하지 않고 노 전 대통령 본인과 가족들에 대한 가혹한 수사를 진행한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라며 정부와 검찰을 강하게 성토한 바 있다.

지관스님은 또 서거 이튿날인 5월 24일 김해 봉하마을을 직접 찾아 조문했을 뿐 아니라 서울 조계사를 포함해 해인사·통도사·송광사·수덕사·월정사 등 주요 사찰 25곳에 분향소를 설치하고 24일 오후부터는 100여 곳으로 늘리도록 해 추모분위기를 돋우는 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처럼 불교계가 현 정부를 강력히 비판하고 있는 것은 이명박 정권의 실책과 함께 정권출범과 함께 시작된 종교편향도 한몫하고 있다. 최근에는 환경부가 국립공원이나 유서 깊은 사찰주변에 케이블카 설치를 완화하는 자연공원법 개정을 추진하면서 불교계를 들끓게 하고 있다.

불교계는 국립공원 등의 케이블카 설치는 민원해소, 규제완화를 명분으로 하고 있지만 지역 개발업자들의 편에서 국립공원과 사찰을 유흥단지로 만들 가능성이 높다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지난 5월 1일 환경부가 입법예고한 자연공원법 개정안에는 국립공원구역 내 케이블카 설치는 물론 단란주점 등 유흥업이 가능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처럼 영남권에 영향력이 큰 불교계의 강력한 저항은 지지기반이 겹치는 이명박 정권으로서는 골치가 아플 수밖에 없지만, 양자 간에 골이 워낙 깊어 해결책이 나올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게다가 7월 2일에는 양산 통도사에서 자연공원법 개악반대를 위해 2천여 명의 승려들이 참여하는 본말사 주지 결의대회가 예정되어 있어 정권을 긴장시키고 있다. 불교계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49재가 끝나는 7월 10일 이후에도 현 정권과 검찰을 비판하는 대규모 집회를 열 것을 고려하고 있다.

천주교, 독재정권 떄도 없던 '미사 집전 신부 끌어내기'에 공분

전국의 천주교 사제 1,178인도 15일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전국 천주교 사제 3,400명 중 약 35%가 동참한 대규모 시국선언으로 조계종 승려들의 선언 이상으로 파급력이 클 것으로 예상된다. 게다가 시국선언 장소가 용산참사 현장이라는 점에서 종교적 의미를 높여주고 있다.

천주교 사제들은 이명박 정권이 "고작 자기들만의 행복을 영영세세 누리자고 어렵사리 이룩한 민주주의의 성과와 평화통일로 가는 화해와 상생의 기조를 대수롭지 않게 파탄으로 몰고 가는 현실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면서 "대통령이 이토록 국민의 줄기찬 요구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헌법준수 의무를 저버릴 바에야 차라리 그 막중한 직무에서 깨끗이 물러나야 옳다는 것이 우리 사제들의 입장"이라며 대통령 사퇴까지 거론했다.

이날 사제들은 시국선언에 앞서 오후 3시에 명동 가톨릭회관에서 비상시국회의를 열고 명동에서 용산까지 도보로 피켓시위를 한 후 미사를 열었으며, 향후 '실천 행동'으로 전국 각 성당에서 매일 '민주주의 회복과 생명평화를 위한 미사'를 봉헌하고 전국의 모든 교우들이 용산 참사 현장을 방문하는 추모 평화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사제들의 이러한 초강력 시국선언과 행동방침은 1980년대 이후 보수파가 교단 상층부를 장악한 후 수구화되던 천주교의 상황에서는 매우 이례적인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실제 천주교는 지난해 삼성비자금사건과 촛불집회를 주도한 정의구현사제단의 고문인 함세웅 신부 및 대표인 전종훈 신부에 대해 징계성 인사를 하는 등 사회 문제에 대해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해왔다. 전 국민을 충격으로 몰아넣은 용산철거민 참사 때도 사제단을 제외하고는 현장을 한동안 외면하다, 비난 여론이 높아지자 주교급 인사 한 명이 현장을 찾았다. 이처럼 천주교의 총보수화 흐름 속에서 1천명이 넘는 사제들이 시국선언에 동참한 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이 거행된 5월 29일 용산참사 현장에서 미사를 집전하던 신부를 끌어내 미사가 중단되는 등 독재정권 시절에도 없었던 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 10일 저녁 '용산참사 140일 해결촉구 및 6·10항쟁 22주년 현장문화제'에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이 추모미사를 진행하고 있다. ⓒ 권박효원 용산참사

이에 김희중 광주대교구 총대리주교는 지난 4일 청와대에서 열린 7개 종단 지도자 간담회에서 이 대통령에게 "용산에서 벌어진 일을 아느냐? 가톨릭의 미사가 유린당했다. 그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정부가 위로해주지 않아서 종교가 나서서 그들을 위로하고자 미사를 드리고 있는데, 정부가 그것을 외면하고, 그것에 불법 폭력까지 동원하는 일이 옳은 일이냐?"고 따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실을 보도한 천주교 매체 <가톨릭뉴스 지금여기>는 김희중 주교의 발언에 대해 간담회에 참석한 최근덕 성균관장이 "거룩한 제사가 이뤄지는데,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 말도 안 된다"라며 공감했으며, 이명박 대통령도 이 말에 당황해 "그런 일이 있었는지 몰랐다"며 알아보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김희중 주교는 광우병쇠고기 문제로 촛불문화제가 한창이던 지난해 5·18기념성당인 광주 남동성당에서 열린 5.18 기념미사에서 "주인(국민)의 의견을 무시하는 머슴은 쫓겨날 것이다"라는 '머슴추방론'을 주장하며 이명박 정부의 잘못을 지적한 바 있다.

종교계 시국선언은 그만큼 민심이 동요하고 있음을 반영

개신교에서는 16일 한국기독교장로회(이하 기장, 총회장 서재일)가 포문을 열었다. 목회자 1,221인이 공개서신 형식을 빌려 시국선언을 발표한 것이다. 기장 목회자들은 "지상에 영원한 권력은 없다. 권력이 국민의 뜻을 거슬러 지배하려고 할 때 심판을 면할 수 없다"면서 "오직 겸허히 국민을 섬기는 것만이 국민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이가 걸어야 할 마땅한 길"이라고 지적했다.

이들은 이 대통령에게 ▲ 과도한 공권력 남용 자제 및 표현·집회·시위·결사·언론 자유 신장 ▲ 사회경제적 약자를 배려하는 상생 정치 실현 ▲ 남북의 극단적 대결 지양 및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한 평화·공존 ▲ '4대강 살리기'라는 이름으로 추진하는 한반도 대운하 사업 즉각 중단 ▲ 방송법 개악 중단 등을 촉구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와 전국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이하 목정평) 소속 목회자 1천여 명도 18일(수) 오전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 대강당에서 시국선언을 할 예정이다. 개신교 목회자들은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이후 민주주의의 근간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으며, '국민들의 삶을 질을 높이는 데 이바지할 것'이라는 공약의 혜택이 실제로는 소수의 특권층에 편중되면서 서민들의 삶이 피폐해졌으며, 용산 참사와 같은 비극이 벌어졌다는 내용을 발표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개신교 목회자들은 19일에는 선언내용을 신문광고에 내고 7월 2일 이후 매달 '나라를 위한 기도회'라는 제목으로 전국 각 지역(수원, 대전, 대구, 광주, 부산, 군산, 전주 등)을 순회하는 집회를 예정하고 있다.

이처럼 한국의 3대 종교인 불교·기독교·천주교 성직자들의 시국선언이 이어지자 언론도 크게 주목하고 있다. 교수사회나 시민사회의 경우 대체적으로 사회비판적인 경향이 강하지만 종교의 경우는 사회 안정을 희구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성직자들의 시국선언이 이어진다는 것은 그만큼 민심이 동요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처음 서울대 교수 124명이 시국선언을 하자 "서울대 교수가 모두 몇 명이냐. 1,700명이 넘는 교수 가운데 시국선언에 참여한 자들은 불과 124명 아니냐"는 식으로 비아냥대고 계속 이어지는 시국선언에 대해서도 좌파들의 음모로 몰아붙였던 청와대와 한나라당, 조중동 보수언론도 종교계의 시국선언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반응을 삼가고 있다.

<조선일보>의 경우는 2007년 변양균·신정아 사건 당시 불교계를 자극했다가 전국 사찰 차원으로 불매운동이 벌어지자 방상훈 사장이 직접 주필, 편집국장, 문화부장 등을 대동하고 조계종을 방문해 사과한 경험이 있다. 자칭 구독률 1위를 외치던 <조선일보>가 사장 방문이라는 굴욕을 택하면서까지 불교계 달래기에 나선 것은 그만큼 불교계의 구독거부운동이 심각했기 때문이다.

각계의 시국선언이 이어지고 종교계마저 비판의 날을 세우고 있는 시점에서 청와대 등 집권세력이 어떤 식으로 정국을 돌파할지 구체적인 내용이 나온 것은 없다. 결국 정국의 키를 쥐고 있는 이 대통령의 결단이 중요한데, 만약 이 대통령이 민심을 거스른다면 임기를 제대로 채울지 누구도 장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만큼 종교계의 대규모 시국선언은 엄중하다.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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