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교회의 사회적 가르침 1(동영상 강의 및 요약문)

Martin Erspamer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을 믿고, 성령 안에서 예수님을 따라 살기로 작심한 사람들이다. 신앙인들은 모두 ‘하느님’을 입에 올리지만, 저마다 생각하는 하느님의 모습은 다르다. 현대 신학자들은 그분을 일정한 장소에 갇히지 않고 우리 가까이 계신 친밀한 분으로 고백한다. 하느님은 추악한 역사와 더러운 세상에 다가서서 인류와 함께 고통 받으며 연민과 해방하는 사랑을 드러내는 분이며, 사실상 지배 권력의 주변부에 위치한 분이라고 말한다. 이들이 현대에 와서야 되찾은 하느님 이미지는 역설적이게도 전통적인 믿음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고 하는.

탈출기에서 이스라엘이 경험한 하느님은 히브리 노예들의 하느님이고, 그들의 고통에 응답하시고 그들의 해방을 이끄시는 분이다. 고대세계에서 신은 전형적으로 지배자의 지위를 정당화하며, 심지어 왕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그러나 히브리의 하느님은 이집트 파라오의 편을 드는 대신에 자신의 권력을 비참한 노예들을 위해 행사했으며, 그들의 해방을 요구했다.

예언서와 시편과 잠언에서도 사회적 불의를 준엄하게 비판하고, 구원에 대한 하느님의 따뜻한 확신을 심어준다. 성경은 한결같이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선 하느님께 합류하라고 신자들을 호출한다. 아모스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성전에서 바치는 번제물에 싫증이 났으며, “다만 공정을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5,24) 하고 명령했다고 전한다. 하느님은 예배와 단식 같은 개인적 희생보다 먼저 가난한 이들을 돌보라고 명령한다.

엘살바도르의 신학자 혼 소브리노는 “가난은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상처로 남아 있다.”면서 “이것은 오늘의 근본적인 상처다. 이것을 그리스도교의 용어로 말하자면, 바로 하느님의 창조가 상처를 입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이런 사회적 상처를 치유하는 행위는 하느님의 연민에 참여하는 것이고, 이 행동 속에서 우리는 그분의 신비를 깊이 체험하게 된다.

초기교회의 사도들이 음식을 나누며 그리스도를 깨달았듯이, 우리는 가난한 이들과 연대하면서 하느님을 더 잘 알게 된다. 사랑은 다만 사랑하면서만 사랑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하느님 사랑은 이웃사랑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연민과 연대성은 교회의 핵심 사명이다.

이 책을 구입하실 분: 이 배너를 클릭하시면 곧바로 인터넷 서점(교보문고)으로 연결됩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관련기사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