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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평화는 생태정의[시사비평 - 박병상]

“케이블카는 정의로운 운송수단이다!” 다리 근력이 예년 같지 않은 노인과 부모의 도움이 절대적인 어린이, 그리고 불의의 사고로 보행이 불가능한 사람도 험준한 산을 오르게 해 주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데, 그 말은 누가 주도할까? 케이블카 노선이 구상되는 설악산 일원에서 들리는 그 주장은 설악산 이용자가 제기하지 않았다. 설악산국립공원에서 관광객 대상으로 하는 식당이나 숙박업에 투자한 상인들이 오색에서 설악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케이블카 노선을 기대하면서 앞세우는 논리가 그렇다.

설악산에 이미 케이블카가 있다. 유신 선포 직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전처 소생의 딸 집안에 당시 정부는 특혜를 주었고 그 케이블카 기업이 50년 가깝게 해마다 50억 원 이상의 독점 수익을 올리는 권금성 케이블카 노선이다. 성인 한 사람 당 1만 원이나 되는 이용료는 지나치는 등산객에 무차별로 받아내는 신흥사 입장료와 더하면 부담스럽다. 그 케이블카는 정의로운가?

‘정의’는 ‘동등’과 다른 개념이다. 누구나 서울대학교 입학할 수 있어야 정의로운 건 아니다. 대학 당국은 정의로운 입학을 위해 합격 기준을 없애거나 낮추지 않는다. 과도한 이용료를 부담하고 들어선 등산객들이 수려했던 생태계를 50년 가깝게 밟자 권금성은 흙을 잃었다. 수려했던 생태계의 오랜 생명이 모두 떠났고 바위만 남았다.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의 상징동물인 잔점박이물범은 현재 멸종위기에 몰렸어도 체계적 보호를 받지 못한다. 300만 인구의 소득이 부산을 뛰어넘는다고 자랑하는 인천도 무관심하지만 중앙정부도 손을 놓았다. 한때 8000마리를 넘었지만 요즘 200여 마리에 머무는 잔점박이물범이 양식장 그물을 뜯고 들어와 가리비와 까나리를 축낸다는 민원으로 천연기념물의 생존 대책이 미뤄지는 모양이다. 갯벌의 원형이 아직 보전된 충남 가로림만에서 여름을 보내고 겨울철 중국 보하이만의 유빙에 새끼를 낳는 습성은 이제 유지할 수 없다. 중국 해안에서 막대하게 쏟아내는 공장폐수는 유빙만 없애지 않았다. 풍요로웠던 어장을 황폐하게 했는데 가로림만 조력발전소 계획이 마지막 비수가 될 뻔했다.

설악산 케이블카. (사진 출처 = ko.wikipedia.org)

서울의 마지막 개발 요충지라는 마곡지구를 터전 삼았던 맹꽁이는 대체서식지에 잘 살고 있을까? 골프장으로 개발할 김포공항 습지에서 생포한 멸종위기종 수원청개구리와 금개구리, 그리고 맹꽁이는 좁아터진 대체서식지로 수용했는데 살기 어려울 게 뻔하다. 김포공항 습지보다 훨씬 넓은 ‘은평뉴타운’의 오랜 ‘자연 이웃’, 맹꽁이와 두꺼비와 산개구리는 시방 보이지 않는다. 개발에 방해가 되므로 대체서식지로 옮겼지만 “더 좋은 환경”으로 보낸다던 개발자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더 좋은 환경? 낯모를 환경에 내몰린 자연 이웃은 얼마나 황당할까? 하긴 주민과 합의 없이 진행하는 ‘뉴스테이 사업’은 세입자부터 대체서식지로 몰아낼 테지만.

정부가 추진하는 멸종위기종 복원사업은 지지부진하면서 부실하다. 예산보다 관심 부족이다. 복원하려는 자연 이웃이 살아갈 터전부터 복원해야 순서가 맞지만 개체부터 늘리고 생존이 불안한 장소에 풀어놓더니 예산이 위축되자 주춤한다. 20년 가까운 연구로 자연복원이 시작된 황새는 늘어나는 개체 수를 통제하려고 가짜 알을 품어야 한다. 황새 둥지가 들어서면 개발이 불가능하다며 손사래를 치는 지방자치단체장은 가능성을 타진하려는 연구자의 접근을 주민 앞세우며 원천봉쇄했다. 1971년 사라졌다 이제 10여 마리로 늘었을 뿐이다. 텃새화한 천연기념물 황새가 농촌 지역의 경제 활성화에 어느 정도 기여할 텐데 막무가내다.

생존을 위해 먹이만 필요한 만큼 요구하는 동물과 달리 옷과 난방 가능한 집을 더 요구하는 사람은 멋과 재미, 그리고 과시를 위해 생태계를 황폐시켜 왔다. 편안한 등반을 자랑하는 설악산 케이블카는 200여 마리 산양의 자유로운 이동을 가로막을 것이다. 땀 흘리지 않고 설악산에 오른 이용객을 산에 드는 과정에서 자연에 대한 경이로움을 배우지 못한다. 탐욕스런 개발로 사라질 자연의 수려한 경관과 다채로운 생태계를 후손에게 물려주려고 1872년 미국에서 지정하기 시작한 국립공원은 우리나라에서 개념이 왜곡되었다. 그저 유원지로 전락했고 지정 이후 집요하게 파괴되는 실정이다.

일본 유전학회는 우성과 열성이라는 표현을 삼가기로 했다는데, 생태계에 해로운 동물이 있을까? 생존을 위한 습성이 사람을 귀찮게 하는 모기는 해로울까? 생태계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하면 사람은 평안해질까? 사라진 모기의 생태적 지위를 다른 생물이 떠맡을 수 있는데, 그물망으로 촘촘한 생태계에 생명공학자들은 유전자 조작 모기를 풀어주었다. 그 모기와 교접한 모기에 생식능력을 없애는 유전자 조작은 엉뚱한 결과를 낳았다. 지카 바이러스가 늘어나는 게 아닌가. 지카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은 대뇌 형성이 부실한 소두증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공포에 젖었다. 부메랑이었다.

모기가 많던 인도네시아 농민은 말라리아가 두려워 한때 DDT를 움막과 주변 습지에 뿌렸다. 그러자 모기와 말라리아는 크게 줄었지만 바퀴는 살아남았다. 그런데 바퀴를 먹던 도마뱀 종류가 비틀거렸고 그 도마뱀을 쉽게 걷어 먹던 고양이가 쓰러지는 게 아닌가. 고양이가 사라지자 쥐가 늘더니 서까래를 파먹는 나방이 창궐하기 시작했다. 쥐가 옮기는 질병을 새롭게 걱정해야 했던 주민은 무너지는 지붕을 바라봐야 했다. 농약을 뿌리자 벌레가 줄었고 죽은 벌레를 먹던 닭이 비틀거렸다. 팔 수 없는 닭을 삶아 먹은 농민이 쓰러진 예는 우리나라에서 그치는 아픈 기억이 아니다.

자연을 이해하면 마을의 이웃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시선을 갖게 된다. 바로 생태정의로 이어지게 돕는 생명평화다. (이미지 출처 = Pxhere)

요즘 반려견에 압도적으로 처방하는 약은 우울증 치료제라고 한다. 이웃은 물론이고 가족과 연락할 기회조차 잃어 가는 사람 대신 우울증을 앓는 반려견은 대표적인 사회적 동물이다. 발톱과 송곳니가 날카로운 반려견은 공격적인 본성 대부분이 억압되어도 사회성이 남았는데, 주변에 친구는 물론 가족도 없다. 이웃이라 여기는 사람은 반려견에 옷을 입히고 털에 염색을 한다. 양말에 농구화를 신고 선글라스를 쓴 반려견은 자신의 모습을 과시하고 싶지 않다. 평생 함께 살려고 반려한다지만 사람은 동물의 눈높이를 무시한다. 개 주인은 장난감 신세인 자신의 반려견에서 우울증을 읽지 못한다.

1960년대 도시 외곽의 과수원은 때까치가 많았다. 꾸둑꾸둑 말린 개구리 뒷다리를 주는 일꾼이 등장할 때 모여들었는데 숲이 건강한 녹지와 가까운 곳에 산다면 비슷한 감동을 느낄 수 있다. 적당한 크기로 쪼갠 땅콩이나 잣을 내놓으면 산새들이 모여든다. 가까운 산에 오를 때마다 땅콩을 내놓는다면 새들이 그 사람 주변에 모인다고 한다. 낯선 이가 없다면 어깨에 내려앉는다니 그럴 때 느끼는 감미로운 감동은 근근이 살아가는 자연 이웃에 대한 연민으로 이어진다고 경험자는 이야기한다. ‘생태정의’를 배우는 순간이겠지.

자연을 이해하면 마을의 이웃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시선을 갖게 된다. 바로 생태정의로 이어지게 돕는 생명평화다. 생태정의는 미래세대의 행복을 염려하는 마음으로 키울 것이다. 역대 어느 황제보다 풍족한 삶을 구가하는 만큼, 현세대 인간은 탐욕을 멈춰야 한다. 자연과 후손을 위해 과시보다 이웃과 따뜻하게 나누던 시절로 돌아가야 한다. 과시와 질시가 주목받지 않는 세상, 흔쾌히 가난해지는 마을이다. 반성을 토대로 자연과 후손에 선물을 주면서 행복해지는 내일을 늦지 않게 만들어야 한다.

 
 

박병상 

인천 도시생태, 환경연구소 소장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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