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나에게 컴퓨터는 필요없다ㅣ웬델 베리ㅣ양문(2002년)

<나에게 컴퓨터는 필요없다>의 저자, 웬델 베리는 1956년산 로열 스탠더드 타자기를 가지고 글을 씁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컴퓨터를 사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그는 결코 그의 고집을 꺾지 않을 것입니다. 컴퓨터를 작동시키기 위해 필요한 전력은 자연의 질서를 위배함으로써만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그는 컴퓨터에 반대합니다. 그 역시 컴퓨터의 편리함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사소한 편리함을 얻기 위해 자연과 인간 공동체를 파괴하는 것은 진정한 기술 혁신이 아니라는 것이 웬델 베리의 결벽증에 가까운 견해죠.

웬델 베리는 “내가 글을 쓰는 동안 자연을 약탈하는 일에 연루된다면 양심상 어떻게 자연 파괴에 반대하는 글을 쓰겠는가?”고 말합니다. 베리는 자연을 약탈하는 어떤 기술에도 동조하지 않겠다는 근본주의자죠. 그는 “컴퓨터라는 것이 나에게 있어 중요한 것들, 이를테면 평화나 경제적 정의, 생태적 건강함, 정치적 정직, 가족과 공동체의 안정, 선한 노동, 그 어떤 것에도 우리가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도록 인도해 줄 것이라 보지 않는다.”라고 단언하면서 각종 오염물질을 만들어내는 컴퓨터를 쓰는 소비자, 비료를 뿌려 재배한 먹거리를 사는 바로 당신이 문제라고 통렬하게 비판합니다.

거대기술시스템에 대한 의도적인 거부

전기시스템은 발전 설비를 갖추고 선로망을 통해 전기를 공급하는 전력회사, 공급된 전기를 다양한 형태로 소비할 수 있도록 전자제품들을 생산해내는 가전업체, 발전소에 필요한 화석연료를 공급하는 유조선과 선박회사, 화석연료를 채굴하는 시추선과 이를 정제하는 정유공장 등 소규모 시스템들을 그 속에 포괄하는 거대시스템입니다. 호미나 낫을 만드는 대장간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거대한 스케일과 복잡한 체계를 갖춘 것이 이 거대 기술시스템이죠. 외국으로 유학 간 친구와 실시간으로 채팅으로 대화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거대시스템 덕이고, 서울에서 부산까지 4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는 것도 거대시스템 덕입니다.

▲ 웬델 베리
문제는 이렇게 삶의 편리성을 획기적으로 증대해주고 사회의 모습을 새로운 방향으로 구조화하는 거대기술 시스템이 근본적인 결함과 불완전성을 안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날의 기술사회에서는, 기술시스템에 포괄된 특정 구성요소에 내재한 사소한 문제가 시스템의 전반에 대한 순간적인 붕괴로 이어지는 대형사고를 낳을 수도 있기 때문이죠. 뿐만 아니라 이런 거대기술시스템은 대규모의 환경파괴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대형 전력 사업에 기반을 두고 있는 산업시스템은 공동체를 파괴하고 인간을 소외시키는 부작용을 낳기도 하구요. <나에게 컴퓨터는 필요없다>의 저자, 윈델 베리가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도 이런 거대기술시스템에 대한 의도적인 거부의 표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간디의 물레, 인간을 소외시키지 않는 인간적 규모

웬델 베리가 컴퓨터를 쓰지 않겠다는 것은 바람직한 인간관계를 파괴하는 거대기술시스템에 반대한다는 점에서 ‘간디의 물레’가 갖는 의미와도 상통합니다. <녹색평론>의 발행인인 김종철 교수가 그의 수필 <간디의 물레>에서 “물레는 무엇보다 인간의 노역에 도움을 주면서 결코 인간을 소외시키지 않는 인간적 규모의 기계의 전형이다.

간디는 기계 자체에 대해 반대한 적은 없지만, 거대 기계에는 필연적으로 복잡하고 위계적인 사회 조직, 지배와 피지배의 구조, 도시화, 낭비적 소비가 수반된다는 것을 주목했다. 생산 수단이 민중 자신의 손에 있을 때 비로소 착취 구조가 종식된다고 할 때, 복잡하고 거대한 기계는 그 자체로 비인간화와 억압의 구조를 강화하기 쉬운 것이다.”라고 지적했듯이, 간디의 물레는 거대 기술 시스템에 저항한다는 적극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김종철 교수는 웬델 베리와 같이 확장지향적인 현대기술에 한 치도 타협하지 않겠다는 근본주의자로 통하죠. 그에겐 적당한 타협이 없습니다. 현대문명에 대해서 근본주의자적 면모를 보이는 웬델 베리의 글 <나에게 컴퓨터는 필요없다>가 김종철 교수가 발행인으로 있는 잡지 <녹색평론>에 소개되어 독자들로부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것도 어떤 점에서는 우연의 일치라고 볼 수가 없지요. 근본주의자가 근본주의자를 알아보는 것 아니겠습니까.

김종철 교수는 ‘간디의 물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물레질과 같은 단순하지만 생산적인 작업의 경험은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 위에 기초하는 모든 불평등 사상의 문화적 심리적 토대의 소멸에 기여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기 먹을 빵을 손수 마련해 먹는 창조적 노동에의 참여와 거기서 얻는 기쁨은 소박한 삶의 가치를 진정으로 긍정할 수 있게 하는 토대를 제공해 줄 것이라고 간디는 생각하였다.”라고. 간디에게 물레는 단순히 도구 이상의 것이듯, 웬델 베리에게도 컴퓨터는 단순한 도구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간디에게 있어서 물레가 공동체를 재건하는 의미였다면, 웬델 베리에게 컴퓨터는 공동체를 파괴하는 의미였다고나 할까요.

작은 것이 아름답다

거대한 현대기술의 비인간성을 간파한 이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의 저자 슈마허였습니다. 그는 1961년 네루의 초청을 받아 인도의 농촌개발을 위한 자문으로 인도를 방문하게 됩니다. 슈마허는 당시 거의 원시상태에 가까운 인도의 농촌현실을 둘러보고 제3세계의 자주적 경제발전을 이끌어 내기 위한 기술로서 ‘중간기술’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창안해 냅니다.

세계 제2차 대전 이후 대량 생산에 의한 대량 소비가 진행되면서, 대량 생산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자원 투하량의 증가, 생산성 향상을 위한 투자의 대규모화와 거대 조직화로 여러 가지 문제점이 나타나죠. 소득과 자원에 있어서 부국과 빈국의 갈등, 특정집단의 기술 독점으로 인한 불평등, 자원의 고갈과 생태계의 파괴 등의 문제점을 극복하고자 하는 데서 슈마허가 창안한 개념이 이른바 ‘중간기술’입니다. 기술은 특정집단의 이익만을 증가시키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그 혜택을 돌려줄 수 있어야 하며, 기술은 자원을 남용하지 않으면서 생태계를 건강하게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의 소산이 중간 기술입니다. 인간의 노동력을 최대로 활용하여 작은 규모로 이루어지는 중간 기술이야말로 개발도상국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개발 전략이라는 것이 슈마허의 주장이죠. 호미로 농사를 짓고 있는 제3세계의 농촌을 개발하기 위해서 트랙터와 콤바인을 들여오게 되면, 농촌인구 과잉에 일자리 부족으로 시달리고 있는 대다수의 제3세계에 더 많은 실업과 혼란을 야기하여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뿐 아니라 복잡한 기계에 무지한 농민들은 기계와 그 기계를 다룰 수 있는 사람에게 매여 버리게 된다고 슈마허는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슈마허 박사는 호미와 트랙터의 중간에 해당하는 그 지역의 상황에 적합한 기술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그것을 중간기술이라 이름붙이고, 그러한 기술을 연구, 개발하기 위하여 '중간기술 개발 그룹'이라는 국제적인 단체를 조직하게 됩니다.

중간기술의 개념은 슈마허 스스로가 인정하듯 그것은 본래 간디의 아이디어였습니다. 영국의 지배하에 들면서부터 영국의 섬유 공업이 인도 가내 공업을 파괴하고, 영국이 섬유 산업을 통해서 인도로부터 많은 이윤을 가져가고 있을 때, 간디는 서양의 거대한 생산체계가 제3세계의 민중을 소외시키고 자연을 약탈한다고 생각했죠. 간디는 물레가 영국의 대규모 섬유공업처럼 인도인들을 소외시키지 않으며 인간성과 환경을 파괴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죠. 슈마허의 ‘중간기술’은 바로 이런 간디의 생각을 구체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대규모 기계화와 화학비료 및 농약의 대량 사용이 빚어낸 농업의 사회구조는 인간이 살아 있는 자연과 진정으로 접촉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게다가 이 구조는 사실상 폭력, 소외, 환경 파괴와 같은 근대의 가장 위험한 경향을 지지한다. 여기서는 건강, 아름다움, 영속성이 거의 진지하게 논의되는 일조차 없는데, 이것은 인간적인 가치가 무시되는 또 다른 사례로서, 경제주의라는 우상숭배의 필연적인 산물이다.”라고 말하는 슈마허의 문제의식은 윈델 베리의 그것과 너무도 닮아 있습니다.

웬델 베리 또한 슈마허처럼 ‘거대한 것’들을 반대하고 작은 것들을 지향합니다. 그는 거대 기술과 개발 위주의 발전이 아닌 소규모 기술과 개별적 특수성을 살리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합니다. 예를 들어 교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동차가 다니는 길을 늘린다거나 새로 길을 닦음으로써 교통 흐름을 원활하게 하는 방법을 거부하죠. 여기에서『행복은 자전거를 타고온다』의 저자 이반 일리히가 자전거를 새로운 문명의 대안으로 내놓은 것도 ‘적정기술’이라는 관점에서 재해석해볼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의 자동차 산업도 복잡한 생산조직과 판매 시스템과 연료공급 시스템 등을 요구하는 거대한 규모의 체계입니다. <자동차에서 자전거로>라는 일리히의 주장은 바로 비인간적인 ‘거대기술’에서 인간적인 규모인 ‘적정기술’로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웬델 베리는 『나에게 컴퓨터는 필요 없다』에서 기술혁신(기술혁신이라고 주장하니까)의 기준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 새로운 도구는 이전 것보다 값이 싸야 한다. 둘, 그것은 크기 면에서 이전 것에 비해 작아야 한다. 셋, 그것은 이전 것보다 분명하고 명백하게 더 나은 일을 해야 한다. 넷, 그것은 이전 것보다 에너지가 덜 소비되어야 한다. 다섯, 가능하다면 새 도구는 신체처럼 어떤 형태로든 태양에너지를 이용해야 한다. 여섯, 보통의 지능을 가진 사람이라면 기본적인 도구들을 가지고 수리 할 수 있어야 한다. 일곱, 가능하면 집 가까운 곳에서 구입할 수 있고 수리할 수 있어야 한다. 여덟, 그 도구는 유지나 수리를 위해 다시 맡길 수 있는 개인 소유의 작은 가게나 상점으로부터 생산된 것이어야 한다. 아홉, 그 도구가 가족이나 공동체 관계 등을 포함한 기존에 있는 어떤 좋은 것들을 대체하거나 파괴하지 않아야 한다.

만약 웬델 베리였다면 지방에 세워지는 대규모 마트도 거부했을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바로 대규모 마트가 지방에서 얻은 이윤을 대도시로 앗아가고, 지방의 고유한 문화와 인간관계를 파괴시키기 때문일 것입니다. 동네의 구멍가게나 재래식 장터는 사람들 사이의 인정이 살아있는 곳이지만 대형 마트는 에너지를 낭비하고, 인간의 욕망을 부추기는 ‘거대한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거대기술은 인간에게 편리를 가져다주었지만 편리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것이 웬델 베리의 생각입니다. 왜 그가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타자기로 글을 쓰는지 조금은 이해가 가시는지요. 『작은 것이 아름답다』의 저자 슈마허는 ‘작은 것’, 적정한 것이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웬델 베리였다면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불편한 것은 아름답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김보일 - 196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대학을 졸업한 뒤 모기업 홍보실에서 카피라이터로 일했다. 온라인 동호회 '시사랑', '바른 통신을 위한 모임', '시네마천국' 등에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지금도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코드로 보는 영화' '세상의 창' '시로 읽는 세계' 등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한국출판인회의 '이달의 책' 선정위원, 리더스가이드 북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며, 배문고 국어교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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