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담긴 전례력을 따라 - 박유미]

- 연중의 삶 안에서 창조와 구원사의 근원이며 목적을 바라보도록   

이 세상 삶이 사랑이어니. (이미지 제공 = 박유미)

이 세상 삶이 사랑이어니(Laus trinitati)

삼위의 신성이여 찬양받으소서!

모든 것의 아름다운 가락,/ 세상의 생명,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담긴 창조의 힘이여!

천사들 무리의 찬양 노래
바로 이 삼위의 신성이어라 :
인간이 밝힐 수 없는/ 저 모든 깊고 깊은 신비
그 놀라운 광채.

삼위의 신성,
모든 것 안에 사랑으로 살아 있는 생명,
사랑을 일깨우며 살아 있는 이로다!

- 힐데가르트의 삼위일체 비전과 찬미노래

성령강림 후 첫 주일, 부활시기가 끝나고 연중시기로 들어가며 첫 주일이 삼위일체 대축일이다.

부활시기에 속하지는 않지만 이어오는 성체 성혈 대축일과 예수 성심 대축일, 성모 성심 축일과 같이 날짜는 정해져 있지 않고 부활시기에 따라 정해진다. 어느 땐가 이렇게 연중시기지만 주님 부활에 따라 날짜가 정해지고 성령강림에 이어서 연중을 시작하는 때에 축일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 그 의미에 관심을 갖게 했다.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어릴 때부터 성호와 기도로 익숙해져 있는 삼위일체 하느님은 나의 신앙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가? 찾아보고 묵상하는 시간들이 있었다.

“삼위일체 대축일을 기념하는 것은 세계의 시작과 완성 그 사이에, 태초부터 작용하신 하느님의 영이 곧 역사와 오늘에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바로 이 점을 기억하는 것이다!” 삼위일체 대축일에 있었던 창세기와 묵시록 그림 설명회에서의 말씀이 찾고자 하는 마음에 이정표가 되었다.

다른 축일들과 달리 삼위일체 대축일은 예수님 삶에 일어난 어떤 특정한 사건과 관련이 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앙의 신비와 관련된 축일이다. 하느님은 한 분이시나 세 위격을 지니셨다는 교의를 담은 의미 축일.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들이 믿는 바와 미사 전례로 경축하는 것 사이에 밀접한 연관이 있다. 삼위일체 대축일도 그렇게 생겨났다. 주님의 삶과 관련된 축일들이 먼저 전례력 안에서 자리를 잡고 중세부터 신앙에 대한 교의를 담고 의미 축일들이 정해지기 시작한 것처럼, 삼위일체 대축일이 모든 교회가 경축하는 축일로 정해진 것은 1334년이다. 아비뇽으로 유배를 가 있었던 요한 22세가 제정했다.

의미 축일로서 이 축일이 제정된 것은 14세기에 들어서지만 사실 초대교회부터 삼위일체 신비에 대한 신앙은 이미 깊이 뿌리내려 있었다. ‘성부, 성자, 성령이 각각의 위격을 지니지만 한 분으로서 존재하며 구원을 위한 사랑으로 작용한다’는 신앙의 신비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어도 기도문과 기도형식 등을 통해서 내면적으로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 이 예수님의 말씀으로 정해진 세례양식으로부터 성호 긋기, 또 “그러므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와 같은 청원기도와 축복기도, 그리고 영광송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과 같이 삼위일체 하느님 사랑에 대한 우리의 응답으로 신앙의 삶에 그 의미가 배어들었다. 삼위일체로서 언제나 모두 안에 살아 있는 하느님.... 영원으로부터 영원까지 언제나 우리에게 놀랍기만 하게 온전하고 충만함으로 사랑을 선사하시기 때문이다.

삼위일체 표현의 변화. (이미지 제공 = 박유미)

초대교회에서부터 신자들은 기도와 함께 눈에 보이는 그림으로도 그 의미를 나타내고자 했다.

그리스 문화로부터 사용하던 삼각형으로부터 삼위일체, 삼각 안에서 하나로서 모든 걸 살피시는 하느님의 눈을 표시하기도 하고 삼각형에 모든 걸 창조하신 하느님의 손과 구원을 위해 희생하신 성자, 비둘기 모양의 성령으로 삼위를 표현하기도 했다. 그리고 중세에 접어들며 인간을 위해 수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신심이 퍼지면서 은총의 권좌에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성자를 안거나 잡고 있는 성부 위로 성령 비둘기가 떠 있는 표현방식이 나타났다.

어머니와 같은 하느님의 사랑을 나타내고자 하여 이름에 성이 정해져 나타나지 않은 성령을 히브리어 루아처럼 여성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독일 우어샬링의 야코부스 성당 벽화. (1390년경) (이미지 제공 = 박유미)

표현의 변화들처럼 초대교회에서 삼위일체의 가르침이 정해지기까지도 오랫동안 치열한 논쟁이 있었다. 인간이 되어 오셨던 성자에 대한 평가 때문이었다. 4세기 니케아공의회에서 정리가 되었지만, 의미 축일들이 제정되는 시기에도 모든 일요일에 삼위일체의 신비가 들어가 있다는 이유로 교황들은 오히려 삼위일체 대축일 도입을 막았다. 10세기 말 프랑스 베네딕도 수도원들로부터 시작해서 요한 22세가 축일을 선포하기 이미 수 세기 전부터 많은 수도원에선 이 축일을 경축하고 있었다.

성령강림 다음 일요일에 축일이 배치된 것도 일상의 신앙생활에 대한 깊은 의미를 담아 이뤄진 것이다. 성령강림에 성령을 보내심으로 그리스도는 구원을 위한 당신의 구원작업을 마치셨고, 약속하신 것처럼 성령 안에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삼위일체 하느님의 공동체로 받아들여진다.

태초부터 창조의 근원이며 구원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힘으로 작용하며 또한 구원의 목적지이기도 한 삼위일체 하느님. 그 사랑이 역사 안에서도 또한 오늘 우리 안에서도 계속 작용하고 있으며 우리의 응답이 삼위일세계의 시작과 완성 그 사이에, 태초부터 작용하신 하느님의 영이 곧 역사와 오늘에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삼위일체 대축일에 우리는 우리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구원작용을 경축한다. 삼위일체 하느님, 모든 것을 창조하신 성부를 찬미하고 그분을 통해 모든 것이 창조되었으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신 성자를 찬미하고, 우리 안에서 작용하시며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를 받아 주시는 성령을 찬미한다.

세 얼굴을 한 머리로 삼위일체를 표시하는 방식의 그림. 예로니모 코시다. (1570년경) (이미지 제공 = 박유미)

그런 의미에서 역사 안에서, 일상 안에서 작용하시는 하느님을 이해하는 바에 따라 시대에 따라, 본인들이 처한 상황에 따라 삼위일체 하느님을 표현했다. 그런 표현을 보는 것으로도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이해가, 그리고 내 삶에 작용하시는 그분의 모습을 다양하게 그려 볼 수 있다.

하느님의 사랑을 그리면서 어머니와 같은 하느님의 사랑을 나타내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래서 이름에 성이 정해져 나타나지 않은 성령을 히브리어 루아처럼 여성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1390년경, 독일 우어샬링의 야코부스 성당 벽화가 대표적이다. 

초대교회로부터의 삼각형 삼위일체, 하느님은 성부이며 성자이며 성령이시나, 성부는 성자가 아니고 성자는 성령이 아니라는 표시에 세 얼굴을 한 머리로 삼위일체를 표시하는 이전의 방식들을 한데 모아 표현한 르네상스 시대 그림도 있다.(1570년경, 예로니모 코시다)

'성 삼위일체', 안드레이 류블료프. (이미지 출처 = it.wikipedia.org)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안드레이 류블료프의 '삼위일체' 이콘(1410년경), 아브라함을 방문한 세 천사의 형태로 하느님을 표현한 이 이콘은 그리스도 신앙에서 구약으로부터 삼위일체 하느님을 예견하면서 정적인 삼위일체의 내적 연관성을 넘어서서 그 바닥을 측정할 수는 없지만 끊임없는 성찰을 통해 삼위일체의 신비가 열린다는 성찰을 담고 있다. 중세부터 많이 퍼져 있던 십자가상에 희생되신 성자를 안고 있는 하느님과 비둘기 형태의 성령으로 표현한 삼위일체 그림은 19세기 들면서 창조와 성서의 역사, 교회의 역사 안에서 구원을 위한 계약의 희망을 나타내는 '은총의 권좌'로 많이 나타난다.

미사에 담고 있는 삼위일체 신비를 나타내는 표현이기도 하다. 성부께 미사에서 바치는 희생제물을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생각하며 받아 주실 것을 청하고 성부는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 사람들에게 전한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 중세에 성부가 죄인을 위해 십자가상에서 죽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주며 삼위의 하나인 성령은 성부와 성자를 연결하는 것으로 표현했던 삼위일체의 신비를 구원사에서 작용하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자비로 이해한 것이다.

이 은총의 권좌와 함께 성부께서 성자로 향한 십자가를 쥐고.... 성령은 비둘기 모양으로 함께하는 삼위일체 표현은 하느님은 외롭게 권좌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로 계신다는 것, 그리고 우리와 관계하는 것이 그분에게 속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특별히 우리 인간의 형제이신 성자 예수 안에서 우리가 그 공동체에 속함을 나타내고 이를 향해 손을 뻗고 팔을 벌리신 하느님이 이 모든 것을 받아 주시는 모습으로 공동체를 이룬다.

'삼위일체 - 은총의 권좌', 쾰른 대성당 글라라 제대 뒷면. (19세기) (이미지 제공 = 박유미)

이렇게 그때그때 삼위일체를 이해하고 표현한 그림들은 오늘날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선조들의 가르침이며, 연중 주간, 일상의 날들에 이어지는 하느님과 함께하는 신앙의 신비를 깨어 체험하고 실천하도록 일깨우는 교회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오 복된 삼위일체여, 진리의 근원이며 거울이며 선물이신 분"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우리와 공동체를 이루며 영원히 영광받으실 삼위일체 하느님의 힘이 오늘 우리 안에 당신 평화를 이루어 가는 힘으로 작용하시길 청한다.

박유미 프리랜서(수산나)
서강대 사회학과, 독일 본, Friedrich-Wilhelm-Uni. 종교사회학 전공, 가톨릭사회론 제1 부전공, '빙엔의 힐데가르트 성녀에 대한 시대별 반향으로 본 교회와 사회와의 관계 연구'. 학문과 일상생활, 교회 안의 신앙생활과 일상의 간격에 다리를 잇는 교육과 프로그램에 깊은 관심이 있으며 전례력과 성인들의 가르침에 담긴 사회적 배경 인식과 성찰을 통해서 사회교리의 보편성과 사회영성 일상화를 나누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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