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생명을 주는 진리의 길 - 김용대]

“영원한 생명을 주는 진리의 길”, 요한 타울러, 사회와연대, 2017, 93-95쪽.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거라.”(마태 2,20)

성경을 수천 번 읽고 그만큼 강론하고 묵상하게 되면 예전에는 알지 못했던 새로운 진리를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거라. 아기의 목숨을 노리던 자들이 죽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누구나 내면적으로 새로운 삶을 살려고 마음먹게 되면 무모할 정도로 열심히 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자신 안에 성령께서 새로이 들어오셔서 하느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할 결심을 하게 만드십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본성이 그렇게 하게 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들 안에 계시는 주님께서 그렇게 하게 하신 것인지는 모릅니다. 따라서 그러한 일을 시작하기 전에 깊이 생각하면서 자신의 내면과 외부의 주변 환경을 끝까지 지켜보아야 합니다. 내면에서 성령을 만나 하느님 안에서 일이 시작되도록 하여 하느님께서 만족스럽게 역사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즉시 주먹구구식으로 이 방법 저 방법을 쓰면서 막무가내로 일을 시작하여 자신의 영육에 많은 상처를 입힙니다. 이들은 일상의 일이나 영적인 일에서 자기 나름의 기준을 마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하고 있으면서도 하느님의 인도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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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나는 여러분에게 맞서고 있는 수많은 원수가 있고
여러분을 공격하려고 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원수는 ‘이 세상’입니다. 두 번째 원수는 ‘자신의 육’으로 자신을 육체적으로 괴롭히고 말과 행동으로 꼬드겨서 나쁜 길로 인도함으로써 불순하게 만듭니다. 세 번째 원수는 나쁜 욕망과 판단과 미움과 복수심으로 영혼에 나쁜 영향을 미침으로써 얻게 되는 ‘마음의 감옥’입니다.

그 결과 상처를 받게 되어 불만을 털어놓습니다. 그리하여 이 상처를 결코 다독거리지 못하고 상대방에게 화난 모습을 보이고 경멸하고 폭언을 하게 되며 분열을 일으키고 서로 무시하고 해코지를 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이는 분명히 악마가 씨를 뿌린 것입니다.

여러분이 은총을 받으려면 이 모든 것들을 없애고 하느님을 위하여 자기를 버리고 사람들이 부당하게 또는 합당하게 대하더라도 모든 것들을 느긋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느님께 진실을 숨기거나 변명하지 말아야 하며 자기 합리화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 안에 깃들게 되므로 끝까지 참고 사랑하게 되면 여러분 주변에 퍼져 나가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욕정 때문에 이렇게 하지 못하게 되면 아르켈라우스가 나타나 여러분 영혼 안에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인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우리는 주변에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찾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 알기 위하여 겸손한 요셉이 어떻게 주의 깊게 살펴보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집트 피신', 젠틸레 파브리아노. (이미지 출처 = en.wikipedia.org)

교부 오리제네스가 말했습니다. “성부와 성자의 능력이 모든 창조물 안에 작용하고 있습니다.(로마 1,20) 성인들은 성령께서 생명이 되어 주신 분들입니다.(로마 8,10; 갈라 6,8) 따라서 성령을 받지 않고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1코린 12,3) 그러나 성령을 받지 못한 사도들은 ‘성령께서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는 말씀을 들을 자격이 없습니다.(사도 1,8)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도들을 두고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한 사람은 용서를 받을 것이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마태 12,32)

따라서 때때로 말씀에 따라 살지 않은 사람이나 무지나 어리석음에 빠진 사람은 진정으로 회개하거나 용서 받을 길이 막히게 됩니다. 그러나 한때는 성령 안에서 살던 사람이 다시 배교한 사람은 이 배교 때문에 성령을 모독했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성공회 신학자 제임스 패커는 성령의 가장 중요한 특성 중에 하나를 ‘거룩한 수줍음’(holy shyness)이라고 했습니다. 이 수줍음은 인간에게서 볼 수 있는 병든 자의식의 산물, 즉 자신감이 결여되거나 지나치게 자신을 의식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수줍음은 자신을 잊어버리고 상대에게 모든 관심을 쏟는 사랑의 특성입니다. 성령님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온전히 예수님만 드러내는 수줍음을 가지셨습니다. 성령님은 자신의 영광을 베일로 감추고 당신을 통해 예수님의 영광만 드러나게 하십니다.(요한 16,14) 이 거룩한 수줍음은 예수님의 특성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영광을 취하지 않고 하느님 아버지에게 모든 영광을 돌리셨습니다.

예수님뿐 아니라 성부 하느님마저 수줍어 하십니다. 성부 하느님께서 궁극적으로 영광을 받으시게 되지만 성부께서는 아드님을 영화롭게 하십니다. 그리고 아드님 안에서 우리도 영화롭게 해 주십니다. 삼위 하느님은 서로에게 영광을 돌리십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은 바로 마귀의 특성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이름을 내고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것은 자신에게 가장 욕되고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하느님께만 영광을 돌릴 때 하느님을 닮은 가장 영광스러운 존재가 됩니다.

만약 바리사이들이 성령을 받았다면 예수님을 죽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치안츠의 그레고리오(329-389/390)는 나치안츠의 주교였던 아버지(그 당시에는 사제의 결혼이 허락되었음)로부터 361년 성탄절에 강제적으로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서품식이 끝나자, 그레고리오는 집을 뛰쳐나가 다시 폰투스로 가서 친구 성 대 바실리오와 함께 지내다가 다음 해 부활절에 돌아왔습니다. 그는 자신은 아직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의 희생제물이 될 수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제직무로부터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심경을 다음과 같이 털어놓았습니다.

나의 손이 항상 거룩한 일만 하기 전까지, 내 눈이 오직 창조주만 경배하고 피조물을 해치지 않고 느긋하게 바라보는 데 익숙하기 전까지, 내 귀가 주님의 지시를 온전히 들을 수 있도록 열리고 지체 없이 들을 수 있도록 주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고 금 귀고리와 값비싼 장식을 달아 주시어 지혜로운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이도록 해 주시기 전까지, 내 입이 성령을 받기 위하여 입을 벌리고 헐떡이고 주님의 신비와 교리를 말하는 성령으로 가득 채워져 지혜로운 말만 하게 되고 때가 되어 못 다한 지혜로운 말을 하기 전까지, 내 혀가 기쁨에 넘쳐 영광과 함께 바로 깨어나게 하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을 때까지 천상의 악기가 되어 노래하기 전까지, 내 발이 바위에 걸려 넘어져 수사슴 발처럼 되고 내 발걸음이 주님을 향하고 미끄러지지 않게 되기 전까지, 나의 모든 지체가 의로움의 도구가 되고 모든 죽을 것들을 생명이 이기도록 하고 성령에 순응하기 전까지에는, 어찌 내가 감히 어떻게 그분께 영원한 희생제사를 드릴 수 있으며, 사제라는 이름과 직분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Oration II", 95 중에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끝까지 낮추신 겸손하신 그리스도를 참으로 깨닫지 못한 채, 누가 감히 사제직에 오를 수 있단 말입니까? .... 그리스도와 참된 친교를 맺지 못한 채, 누가 감히 사제직에 오를 수 있단 말입니까?”("Oration II", 98 중에서)

토머스 머튼 신부님은 주님께서 부활하시기 전, 성령을 받기 전의 제자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안타까워 했습니다.

 

'넋이 빠져 버린 제자의 영혼 안에'(When In The Soul Of The Serene Disciple)

 토머스 머튼(1915-68) / 후고(後考) 옮김

 

넋이 빠져 버린 제자의 영혼 안에

더 이상 본받을 교부들도 없어짐으로써,

가난하기만 하여, 거처할 집조차 없어져

노숙할 수밖에 도리가 없게 되어 버렸다.

 

친구들뿐만 아니라 별들조차도

주님의 죽음에 화를 내고

성인들이 뿔뿔이 흩어져 감으로써,

 

더 이상 할 말을 잊었기 때문에

아무 말 없이 있는 게 상책이다.

그의 수많은 걱정과 함께

요행의 바람이 그의 광배(光背)를 몰고 가버렸고

요행의 바다가 그의 명성을 가라앉혀 버렸기 때문이다.

 

이제 여러분은 그에게서

한 마디 가르침도 듣지 못하고 받아 적을 것도 없게 되었다.

그의 하느님께서는 고통처럼 허탈함 속에 살고 계시므로

그에게는 아무것도 칭찬할 만한 것이 없다.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다시 예전처럼 살 수밖에 없다.

아무 희망도 없이 살아갈 뿐이다.
 

김용대(후고)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박사.
본명은 후고입니다만 호도 후고(後考)입니다. 항상 뒷북을 친다는 뜻입니다.
20년 동안 새벽에 일어나서 묵상을 하고 글을 써 왔습니다.
컴퓨터 전공 서적을 여러 권, 묵상집 "그대 음성에 내 마음 열리고", "징검다리"를 쓰고, 요한 타울러 신부의 강론집을 번역하여 "영원한 생명을 주는 진리의 길"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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