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티에레스 신부] 5월 6일(부활 제6주일) 요한 15,9-17

부활시기 내내, 교회의 전례는 우리에게 부활한 예수님의 출현에 관한 모든 이야기들을 전하고 있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승리, 즉 사랑의 의미를 기념하는 복음 구절들을 상기시켜 준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듯이

요한 복음 15장은 제자들에 대한 주님의 살가움이 도드라진다. 그분의 메시지는 이렇다: 나의 사랑 안에 머물러라. 그 사랑은 나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과 똑같다.(요한 15,10.12) 바로 이 사실이 우리 기쁨의 원천이어야 한다.(15,11) 예수님은 한 단어, 즉 우정으로 맺어지는 관계들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주님의 친구가 되는 것이다. 종이 아니라 친구다. 종들은, 그들이 주인을 알고 그의 생각을 나누기 때문이 아니라, 명령을 받기 때문에 일을 한다.(15,15) 종의 관계는 냉정하고 형식적이다. 친구의 행위는 안으로부터 온다. 우정은 친밀한 관계, 소통을 전제로 이루어진다. 우리가 고맙게 생각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목표와 느낌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들 때 우정이 생겨난다.

우정의 따뜻함은 평등을 창조하고 지배와 노예살이의 장벽을 깨뜨리는 나눔을 가져온다. 우리의 그리스도교적 삶은 다른 사람들을 우리의 친구로 만드는 능력에 달려 있다. 만일 우리가 상식적 차원이나 노골적 우월감에 집착하여 다른 이들을 우리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그들과 복음을 나눌 수 없을 것이다.(사도 10,26) 그리스도교적 연대는 절대로 비인격적이지 않다.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과 우정을 맺지 않는다면 그들에 대한 결단도 없을 것이다. 오로지 우정 속에 관계를 맺을 때에야 우리는 사랑 안에 머물 것이다.

친구들 (이미지 출처 = Pixabay)

하느님을 안다는 것

주님은 우리에게 그분이 우리를 친구라고 부르는 것은 “내가 너희에게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요한 15,15) 그분은 당신의 증언에 담긴 심오한 동기들을 우리에게 나누어 준다. 그분은 우리들을 그분의 “동격”으로 만든다. 다시 말하자면, 그분은 알고 있는 것을, “하느님은 사랑”(1요한 4,8)이라는 사실을 우리와 나눈다. 이것이 그분을 아는 것이다. 성경에서 하느님을 아는 것은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를 선택하고, 그분의 자유와 무상의 사랑으로 먼저 움직인다. 그런 분에 대한 우리의 응답은 사랑이다.(요한 15,16)

누구든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한다.(1요한 4,8) 사랑하면 열매를 맺어야 한다.(요한 15,16) 아버지 하느님은 그분의 아들을 우리에게 보냄으로써 그분의 사랑을 보여 준다.(1요한 4,9) 이제 우리는 그분의 계명을 더 잘 이해한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7) 이것이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길이다. 다른 이들의 필요와 갈망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하느님께 가깝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 주신다.”(사도 10,35) 하느님의 친구들의 과제는 평등을 살고 올바른 것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 안에 사랑이 있다.”(1요한 4,10)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신부
1928년 페루 리마 출생. 의대를 졸업한 뒤에 사제로 살기로 결단했다. 사제가 된 뒤에는 리마 가톨릭대학에서 신학과 사회과학을 가르치면서 리마 빈민지역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목을 했다. 대표적인 해방신학자로 빈민의 관점에서 복음을 증거해 왔다. 주요 저술로는 "해방신학"(1971)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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