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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형중 신부는 한국 사제들의 사표다수구 아닌 진정한 보수논객, 교회의 사람을 찾아서
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 윤형중 신부 30주기 행사 열어

   
▲윤형중 신부를 회고하는 김병상 신부의 강론 중에 한바탕 잔잔한 웃음이 배어 나왔다.

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원장 함세웅 신부)은 6월 15일, ‘교회의 사람을 찾아서’라는 주제로 윤형중 신부의 생애를 회고하면서 30주기 추모미사 및 행사를 서울 명동 꼬스트홀에서 열었다.

이날 추모미사에서 주례를 맡은 김병상 신부는 강론을 통해 "윤형중 신부는 한국 사제들의 사표(師表)"라고 표현했다. 윤형중 신부가 호교론적이고 보수적인 면모를 지녔지만, 수구적인 것이 아니라 교회전통과 진리 앞에서 겸손했다는 점에서 보수적이라는 것이다.

이날 미사는 특히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활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에서 주관한 것인데, 박정희 유신정권 당시에 윤형중 신부는 노구에도 불구하고 ‘민주회복국민회의’의 상임대표를 맡아 정의구현을 위해 분투하는 젊은 사제의 버팀목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정신적 초상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즉, 이번 미사와 추모행사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활동의 뿌리를 찾아가는 노력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오민환 연구원
추모행사에서 첫번째 발제를 맡은 오민환 연구원(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에 따르면, 윤형중 신부는 "후배신부들의 기억과 그리움 속에 시대와 사람을 넘어 살아있는 사표(師表)"이며, "천주존재에 대한 확신은 윤형중 신부의 삶을 끌어가는 근본원리였고, 이 때문에 한국교회의 대변자로서 가톨릭사상의 선구자로서 고난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실 수 있었다"고 한다. 

이날 행사에서 오민환 연구원은 윤형중 신부의 생애를 다루면서, 노기남 대주교와 윤형중 신부의 관계를 통해 윤 신부의 독특한 사제적 면모를 드러냈다. 1930년에 윤형중 신부는 노기남 주교와 함께 서품을 받은 동기였으며, 일제말 1942년경 윤형중 신부의 도움으로 아직 신부였던 노기남 신임 교구장이 주교가 되었다. 이는 일본인이 서울교구장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윤형중 신부는 주교임명제에 비판적이었다고 한다. "(이런 제도는)는 주교가 교구를 망쳐놓아도 아무런 대책이 있을 수 없는 제도다. 주교 밑에 교구평의회가 있기는 하나, 기것은 자문기관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 평의원은 주교가 자기 마음대로 지명하니, 못난 주교가 못난이들만 골라서 평의회를 구성하면 그만이다. 민주주의가 안전하다. 비밀자유투표에 의해서 다수결로 주교를 선출하는 제도가 이상적이다. 이보다도 내각책임제식이 더 나으리라. 주교는 교구의 한 상징으로 앉아 있고, 그 밑에 행정을 맡는 총리 격 신부를 교구 내 신부들이 비밀자유투표로 선출한다"고 했다.

이는 윤 신부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인데, 노기남 주교와 윤 신부는 내내 갈등을 빚었기 때문이다. 윤형중 신부가 설득하여 1946년 <경향신문>을 창간했는데, 이승만이 대통령이 된 뒤에 정실인사를 하면서 <경향신문>이 이를 비판하자, 신임장관이 노기남 주교에게 항의하고, 노기남 주교는 편집국장에게 전화해서 그 논단을 중지시켰다. 이에 <경향신문> 사장이었던 윤형중 신부가 절차를 무시한 처사를 주교에게 엄중항의했는데, 이튿날 오전에 노기남 주교는 편집국장과 사장인 윤 신부를 해고시켰다. 

   
▲ 윤형중 신부 영정
한편 윤형중 신부가 애정을 갖고 인기리에 키워온 것이 지성인 교리강좌와  순교자현양사업이었는데, 한참 진행 중에 노기남 주교에 의해 윤 신부는 미리내 산골짝으로 '귀양'을 가게 된다. 울적하게 지내던 윤 신부가 대구교구의 요청으로 대구에서 교리강좌를 개설하려는데, 그것마저 노기남 주교가 거절했다. 1961년에 <경향신문> 사장으로 재취임하였지만 몇 개월 뒤에 다시 해임시키고, 1963년 회갑연을 명동사제관 큰방을 빌리려다 노 주교의 반대로 복자수녀원에서 하게 된다. 

그런 윤 신부가 성모병원에서 투병생활을 하고 은퇴하여 명동 주교관에서 외롭게 생활할 때 마침 찾아준 사람들이 지학순 주교의 구속을 계기로 결성된 정의구현사제단 소속 젊은 사제들이었다. 이들은 유신정권에 반대해서 모임을 갖고 1974년 11월 각계 인사가 망라된 '민주회복국민회의'를 결성하면서 윤형중 신부를 천주교 대표로 초대했고, 윤 신부는 상임대표를 맡았다. 1979년 지병인 폐암으로 윤형중 신부가 선종하자 젊은 사제들이 그의 운구를 들었다.  

윤 신부는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전 재산에 가까운 백만 원을 '국제사면위원회(엠네스티)'에 내놓았으며, 자신의 안구도 기증했다. 그 신부가 6월 15일 세상을 떠나면서 남긴 마지막 말이 "고맙습니다"였다. 이를 두고 장례미사를 집전하던 김수환 추기경은 추도사에서 윤형중 신부의 사회참여를 "어떤 정치적 야심이나 사회적 명성에 대한 욕망에서가 아니라, 억눌린 사람들과 소리 없는 자들의 목소리를 대신"하는 사랑에서 나온 행위였다고 전했다. 

   

이날 행사에서 유은희수녀(한국순교복자수녀회)가 순교자현양에 황무지였던 시대에 순교자현양회를 결성하여 순교자들에 대한 인식과 관심을 한국교회에 일깨워주었으며, 스스로도 순교와 진리의 삶을 살아낸 윤형중 신부에 대해 발표했으며, 양승규 교수는 윤 신부의 신학사상을, 김석종 경향신문 부국장은 언론과 관련해서 발표하고, 마지막으로 함세웅 신부가 윤 신부의 민주회복국민회의 시절을 회고했다.

명동성당 꼬스트홀에서 이 행사가 진행되고 있던 같은 시간에, 가톨릭회관에서는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비롯해서 전국에서 찾아온 사제들이 비상시국회의를 열고 있었으며, 이날 저녁 7시부터는 용산참사가 빚어진 현장에서 이들 사제들이 모여 비상시국미사를 봉헌했다는 것은 참 묘한 일치였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윤형중

신부 같은 신부였다
인기 따위도 없고
인기 따위도 생각한 적 없다
이를테면 연탄가스 중독에도 끄떡없는 확신이
오래오래 이어져온
진부한 일상의 나날이
그의 나날이었다

단 한번도 그 자신이 신부인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불행일까?
혹은 지독한 축복일까?

그의 글은 정연하다
극도로 감정을 배제하지만
함석헌과의 논쟁에서는 적의를 더 품었다

주교도
대주교도 되지 않았건만
그는 빈 산 위쪽 어디에
깊이 박혀 있는 바위 한 모서리였다
가래 끓는 기관지까지
그것으로 되어버렸다

(고은, ‘만인보(萬人譜)’ 11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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