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지가 공항인 손님이었다. 오랜만에 고국 분을 만난 자리라 반가웠다. 뉴질랜드를 방문 했다가 정작 들러서 알아보고 싶었던 골프장을 못 가봤다고 했다. 공항 가는 길에 골프장 몇 곳을 들러보길 원해서 함께 하는 길에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몹시 가슴 아픈 사연이라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안타까운 분노

여러 나라를 다녀봤지만 이번 뉴질랜드에 너무 실망이 커서 다시는 오고 싶지 않다고 했다. 사연인즉, 골프와 관련된 일로 혼자서 오클랜드에 도착해 공항 입국 수속을 밟는 도중 불법 체류자로 몰려 꽤 오랜 시간 심한 곤욕을 치르게 됐단다. 모든 물건을 조사하고 여권에 어떤 기재 사항이 지적되어 가짜 여권이라며 죄인 취급을 하기에 아무리 아니라고 발버둥쳐도 막무가내였단다. 부족한 영어가 속 시원히 전달되지 않아 항변도 제대로 못하다 늦게나마 한국 공관 직원의 개입으로 혐의에서 겨우 풀려났단다.

최근 불법 체류자가 증가하자 출입국 관리가 강화된 터라, 아마도 담당 출입국 관리자의 잘못된 개인적 편견이나 주관이 강하게 작용해서 빚어진 사건이 아니었나 싶다. 자기를 모욕했던 출입국 직원에 대한 분노의 감정을 가슴에 안은 채 이 나라에 대해 실망을 느끼며 떠나가는 발길을 그냥 두고 보기가 못내 안타까왔다. "말씀을 듣고 보니 제가 다 가슴이 답답합니다. 그 심정 백 번 이해가 됩니다. 제가 10 여 년 이 곳에 살아온 이민자로서, 현재는 이 나라 국민이 됐으니 주제 넘을지 몰라도 대신 제가 진심으로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잘못 됐습니다. 죄송합니다."

진심 어린 나의 마음이 어찌 전달이 됐는지는 몰라도 조금이라도 화가 누그러지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고맙게도 손님 마음의 문이 조금은 열린 듯 감정을 진정 시키며 말문을 열었다. "고맙습니다. 영영 뉴질랜드를 안 볼 거라 생각하며 화(禍)를 안고 떠날 뻔 했는데 그런 따뜻한 말씀을 듣고 보니 제 마음에 조금은 위로가 됩니다."

다행이었다. 그래서 이곳에 살면서 느꼈던 나의 억울하고 가슴 아팠던 이야기 몇 가지를 털어 놓았다. 정말 그 어려운 일 당할 때는 화가 너무도 나고 억울해서 울고 싶은 일도 있지 않았던가. 특히나 영어와 관련해서, 어쩜 이민자로서 느끼는 상대적 불평등과 불공정한 편견을 대할 때는 어땠는가. 그 순간에는 정말 화가 들끓어 오르기도 했다. 그런다고 그때 그 때 모두 맞대응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 분 안에서 마음을 다스리며 화를 삭이기도 해야 했다.

택시 운전한지 얼마 안 되어 몹시 속이 상한 일로 힘들었지만 잘 대응한 경우를 그 손님에게 이야기 해 줬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도저히 참기 어려운 여건이었다. 바쁜 아침 시간 운전 중에 택시 안에 장착된 소형 컴퓨터 모뎀이 작동하지 않아 택시 손님 정보를 받을 수가 없어 다음 일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 택시를 도로가에 세우고 곧바로 회사 사무실 Communication Staff에게 모뎀 마이크를 통해 도움을 요청하게 되었다. 그러자 몇 가지 지시와 방법을 이야기해 주기에 그대로 모뎀을 작동해봐도 안 되어 다시 묻게 되었다. 답변은 똑 같았다. 역시 그대로 해봤다. 결과는 역시 작동이 안 되었다. 다시 또 물어보니 버럭 화를 냈다.


한 발 앞서 가는 여유까지 주시다니

제대로 알아듣고 그대로 해봤냐는 거였다. 그렇다고 했더니 그러면 돼야지 왜 안 되냐고 한다. 어이가 없었다. 거기에다 영어가 제대로 되는 거냐. 왜 그리 못 알아듣고 딴 소리 하느냐. 한 술 더 떠서 택시 운전면허는 어떻게 땄냐고 소리쳤다. 억지도 유분수지 아니 무슨 청천벽력 같은 악담인가. 커뮤니케이션 스탭 하는 일이 이런 문제 해결해 주는 사람 아니냐고 물었다… 그러자 저쪽에서 전화를 뚝 끊어 버리는 거였다.

순간 화가 극도로 치솟았다. 차에서 내려 물을 벌컥 벌컥 들이켰다. 바로 일을 할 수도 없어서 그 억울한 내용을 글로 써내려 갔다. 이야기로 잘 안되니 글로 써서 Complaint Staff에게 올려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하려고 A4용지 두 장에 그 불만 사항을 쭉 적었다. 그리고 회사로 달려가려는데 이상하게도 교통 정체가 계속 되었다. 다른 길로 돌아서 가는데도 또 밀려 멈춰 서길 몇 번, 그러다 옆으로 시선을 돌리는 중에 우연하게 성당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나도 모르게 성당으로 방향을 돌려 들어갔다. 어떻게 그 시간에 성당 안으로 들어가 잠시 마음을 가다듬는 시간이 필요 했는지…

제대 앞을 응시하며 한참을 앉아있다 보니 나도 모르게 화가 차츰 내려앉는 거였다. 화가 나지 않는 사람… 용서하는 사람이 되라는 무언의 소리가 느껴졌다. 그래 용서, 용서, 용서… 수십 번을 되뇌는 중에 자연스레 화가 내려놓여 졌다. 기분이 좀 전환되어 모뎀을 다시 만져보니 가까스로 작동이 되어 그 날 회사에는 들르지 않고 일하게 되었다. 그런 뒤 한 시간 뒤쯤 커뮤니케이션 스탭에게서 전화가 울렸다. 정말 정말 미안하다고 했다. 내 전화 받을 때 다른 사무적인 일로 감정이 몹시 격한 상태라서 실수를 했다고... 난 이미 용서했다고 답했다.

참 고마운 일이다. 이렇게 한 발 앞서 가는 여유까지 주시다니...


사람의 운명이란 모르는 일, 무조건 용서해야

그런데 다음날 아침 운전하면서 접한 충격적인 뉴스!
컴퓨터 모뎀에 긴급 메시지가 떴다. 그 Communication Staff이 출근 중에 교통사고로 운명을 달리 했다는 거였다. 소스라치게 놀라 핸들을 그만 놓칠 뻔 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용서하고서 Complaint을 제기하지 않은 전날의 결정이 얼마나…

사람의 운명이란 모르는 일이고, 무조건 용서하는 일 만이 ‘화가 나지 않는 사람’ 되는 지름길임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인내(忍耐)는 글자 그대로 내 마음(心)에 칼(刀)을 품으니(忍) 결국은 내가 상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참는다고 모든 게 해결되는 게 아니지요. 다른 사람에 대한 분한 감정을 인내한다는 것은 '화를 내지 않는 사람' 단계밖에 못 가고 말지요. 그건 어쩜 화병으로 이어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용서(容恕) 해야 내 마음(心)이 서로 같아져서(如) 하나 되니(恕) 내 마음속에 자유함이 깃들게 되고, 결국은 '화가 나지 않는 사람' 이 되는 듯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나에게 다가오는 모든 일들을 바라보는 시각 바꾸는 훈련이 필요한 듯 싶습니다. 오늘 택시 운전을 하면서도 도를 닦는 수행의 현장을 즐겁게 달리고 있습니다."라고 손님에게 얘길 했다.

고맙게도 이 이야기를 뉴질랜드 떠나기 전 듣게 되어 자기도 조금은 화를 내려놓고 간다고 했다. 다시금 곰곰이 생각해 보면 화를 내는 것은 어쩌면 걸림돌에 넘어지는 것이고, 화가 나지 않는 것은 디딤돌을 잘 딛고 일어서는 게 아닐까 싶다.


좋은 측면에 시선을 집중하기

세상살이가 다 그런 게 아닐까. 우리의 인생길에서 만나는 크고 작은 일들, 때론 그것이 걸림돌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때마다 부정과 불평에 머물면 결국은 그 돌에 넘어지고 만다. 그렇지만 한 발치 뒤에 서서 마음을 가다듬어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나아가면 세상 도처에 있는 걸림돌을 딛고 일어나게 해 준다. 일을 당해 바라보는 시각은 우리 각자의 선택 사항이다. 좋은 측면에 시선을 집중하기가 생각만큼 쉽지는 않다.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도 걸림돌이라는 불평 너머에 있는 좋은 측면 디딤돌에 시선을 모으는 습관이 필요할 듯하다. 이 습관이 우리를 디딤돌 인연으로 맺어 주며 한 단계 올려 준다. 그러고 보면 디딤돌 인연은 아픔 뒤에 숨겨진 또 하나의 축복이 아닐까.


/백동흠 2008-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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