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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참사 4년, 나는, 우리는 얼마나 변했나?안산 주민 송창욱, 이은진 씨

세월호참사 4년. 어떤 것은 변했고, 어떤 것은 변하지 않았다.

정권이 바뀌었고, 이른바 ‘촛불 혁명’이라는 다시는 어려울 경험을 했고, 구조는커녕 참사의 진상규명을 방해한 정권의 책임자는 감옥에 있으며, 그 과정에서 어떤 절망은 희망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세월호참사의 온전한 진상규명에 대한 일부 정당의 방해, 이와 맞선 가족들의 싸움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고, 배 안에서 나오지 못한 다섯 명의 가족이 아직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안산 주민, 단원고 학부형으로 세월호참사를 4년간 겪어 온 이들이 있다. 고향인 제주에서 벌어진 강정해군기지 싸움에서 도저히 발 뺄 방법을 찾지 못해 뭍으로 도망쳤다가 세월호참사를 만난 이, 딸아이 선배들의 죽음을 보며, 내 아이를 지키기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는 이다.

직장 동료이자 동지이기도 한 송창욱 씨(아브라함)와 이은진 씨. 이들이 지난 4년 동안 말하고 살아온 세월호에 대해 들었다.

송창욱 씨(왼쪽)와 이은진 씨. ⓒ정현진 기자

“내 딸을 살리기 위해, 세월호 때문에 거리로 나선 이들을 위해”

이은진 씨의 딸이 중학교 3학년 때 세월호참사가 일어났다. 당시 참사를 당했던 아이들은 딸아이와 어린이집을 다닐 때부터 같이 자랐다. 선배들이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연락이 뜸했지만 유독 사고 전부터 선배들은 딸아이와 함께 꽃구경을 가고, 책을 빌려 주기도 했다. 4월 15일, 신체검사를 받느라 밥을 거른 딸아이에게 한 선배는 수학여행을 떠나기 전, 손수 장을 봐서 싼 도시락을 건넸다.

4월 16일 현장학습을 갔던 딸은 전원 구조 보도가 오보라는 것을 알고 돌아와 밤늦게까지 단원고에서 생존자들의 이름을 찾았다. 저녁에는 밖에 나가지도 않던 딸이 밤늦게 돌아오지 못하는데도, 이은진 씨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 씨는, “그날 이후 내 아이는 잠을 자거나 울기만 했다”며, “사실 아이를 잃은 가족을 감히 공감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다만 나는 내 아이가 더 아프지 않기를 바랐고, 그래서 더 간절히 아이들이 살아 돌아오기를 바랐다”고 말했다.

그동안 이 씨는 주로 다른 지역에서 세월호 활동을 하는 이들이 필요한 물품을 보내 주는 일을 했다, “굳이 활동이랄 것이 없다”고 했지만 그는, “다른 지역에서 뭐라도 하려는 이들에게 팔찌나 배지, 스티커를 보냈다. 그들의 수고를 잊지 않겠다는 마음, 당신들의 수고를 나뿐 아니라 많은 이들이 알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고, 서로가 서로를 응원하는 일”이었다고 했다.

그가 몇몇 시민들과 함께 한 일 가운데 하나는 2주기 즈음, 화랑유원지 분향소 입구에 노란리본 조형물을 만들어 세운 것이었다. 세월호가족들은 오후 4시 16분이면 불을 밝혀 사람들을 안내해 줬던 이 조형물을 단원구청 앞으로 옮길 가족협의회 사무실로 가져가기로 했다.

강정 해군기지 싸움을 피해 온 자리에서 세월호참사를 만나다

육군사관학교 출신 장교였던 송창욱 씨는 군을 제대한 뒤 고향인 제주에서 개인 사업을 하고 있었다. 2011년까지 가족들과 불편 없이 살던 그가 강정마을 해군기지 싸움에 참여하면서, 사제들과 함께 연행되기 일쑤였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지자 가족들도 힘들어하기 시작했고, 제주에 있는 한, 해군기지 싸움에서 발을 빼지도 못할 것이라 여겼던 그는, 2013년 육지로 나와 다른 사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2014년 세월호참사가 일어났다.

그는 처음 세월호참사를 지켜보면서, “고의 침몰”을 의심했다. 사람이 얼마나 악할 수 있는지, 권력이 얼마나 악할 수 있는지 생각하며, 그는 “용서하지 않을 것이고, 아이들을 위해 복수하겠다”고도 다짐했다.

그러나 그는, 강정 해군기지 싸움을 겪으면서 그랬듯, 한 번 발을 디디면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을 떨치기 힘들었다. 분노가 컸지만 두려움도 컸다. 그럼에도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제주에서 참사 직후 있었던 지방선거 운동을 돕는 일이었다.

그는, “나는 직접 정치에 참여하지 않지만, 정치적 역할을 가장 중요시하는 사람”이라며, “당시 새누리당에서 누구라도 당선되는 것은 용납하지 못했다. 일을 접고 선거 운동판을 뛰어다녔다. 비록 결과가 좋지 않았지만 당시는 절대 명제였다”고 말했다.

그가 가장 잘하는 일은 사람들 앞에서 말하고 알리고 노래하는 것이다. 강정마을 싸움을 위해서 그랬듯 그는 분향소를 찾고 사람들에게 자신의 방법으로 세월호를 알렸다. 그리고 이은진 씨가 활동하던 ‘별리본’ 팀을 만났고, 세월호가족을 만나게 됐고, 결국 또 세월호를 떠나지 못했다.

안산 화랑유원지 분향소 앞을 지키던 리본 조형물. 이은진 씨가 활동하던 '별리본' 팀이 만든 조형물에는 오후 4시 16분이면 불이 켜진다. ⓒ정현진 기자

세월호참사, 무엇을 바꿨나?

이은진 씨는 “개인적으로 세월호를 통해 가장 많이 바뀐 것은 아이를 키우고 대하는 방식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나 역시 그 전에는 아이에게 ‘엄마가 옳아’, ‘가만히 있어’라는 입장이었다. 내 방식과 규칙을 강요했던 그것이 결국 아이를 죽이는 방법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물론 지금도 그런 면이 남아 있다. 그러나 그 전과 비교하면 상당히 깨졌고, 끊임없이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또 그는 “최소화 한다고 해도, 어떤 차원에서든 사고는 일어난다. 조금 달라졌다면, 사고 뒤의 일을 사람들이 고민하기 시작한 것 같다”며, “그래서 촛불도 평화로울 수 있었다고 본다. 지금까지와 다른 방식을 고민하고, 달라져야 한다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을 만들 수 있었다”고 말했다.

송창욱 씨는 “지금까지 살면서 사람들이 서로를 구분 지었던 틀을 깨고 있다. 어떤 이념이나 신념, 사회적 위치에 따른 구분을 떠나 다른 차원의 질문을 던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다양한 이들이 세월호에 타고 있었다. 정말 ‘누구나’였다. 세월호참사는 어떤 특정 계층이나 나이, 정치적 입장,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이들의 문제였다. 누구나 구조적 폭력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일깨움이 사람들 사이의 어떤 경계를 허문 것 같다. 어떤 식으로든 세월호는 우리 모두의 삶의 문제였고, 성찰의 대상이 됐다. 모두가 각자 받아 안았던 세월호참사가 어떤 상황이 되면 툭툭 터져 나온다. 그것이 연대의 힘이 됐다고 본다.”

그는 특전사 대테러부대 출신 친구가 세월호참사로 분노하는 모습을 보고 느낀 바를 이렇게 말했다.

그 친구는 평소 누구보다 안보의식이 강하고 나라를 지킨다는 자부심을 갖던 군인이었지만, 온갖 훈련을 경험한 자신도 물에 대한 공포가 있는데, 아이들은 그 상황에 오죽했겠다며 인간적인 분노를 드러냈다. 친구를 보면서, 그는 각자 세월호참사를 겪고 견디는 이들의 마음을 알게 됐다고 했다.

송창욱 씨(가운데)가 가장 잘하는 일은, 노래로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알리는 일이다. ⓒ정현진 기자

“안산, 너무 아파서 침묵하는”

안산 주민으로서 이들은 지역의 분위기를 어떻게 느끼며, 공동체 회복의 과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할까? 송창욱 씨와 이은진 씨는 “함께 살았던 이들이 가질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어려움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가장 가까이 살았던 이들이 오히려 도움을 주지 않았다고 보지만, 사실 가깝기 때문에 더 힘이 들기도 한다. 물론 다른 지역처럼 무심한 사람들도 있고, 유가족에 대한 선입견도 있다. 그런 선입견을 드러내는 것도 인격의 문제라고 본다. 그러나 너무 아파서 오히려 외면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 주기를 바란다. 그런 특성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산 지역은 또다른 폭력을 겪을 수 있다.” (이은진 씨)

이은진 씨는 자신의 딸을 비롯한 생존자, 희생자의 친구, 선후배들이 밤마다 새벽마다 울부짖는 것을 보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다며, “하지만 그들끼리는 세월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너무 아파서다. 그것이 침묵으로 보이겠지만 외면하고 싶어도 시선을 돌릴 곳이 없는 이들의 아픔”이라고 말했다.

그는 희생자들의 형제, 자매들조차 위로와 치유를 온전히 받지 못했지만 그 친구들은 더욱 그렇다며, “세월호 피해자의 친구, 동료, 선후배들을 위해 충분히 배려하지 못한 어른들이 잘못했고, 여전히 그렇다”고 말했다.

세월호참사 4년, 그 후...

이은진 씨의 딸이 세월호참사로 희생된 선배에게서 받았던 도시락. ⓒ이은진

송창욱 씨는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해 무엇이든 해 왔고, 앞으로도 이 일이 완결될 때까지 할 수 있는 것을 해 나갈 것이라면서, “답답하고 힘들지만, 생각보다 빨리 진행되는 것도 있다. 많은 이들의 마음, 아이들의 영혼이 이만큼 해 왔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은진 씨는 “지난 4년, 나는 얼마나 변했고 우리는 얼마나 변했는지 묻고 싶다”고 했다.

그는, “세월호참사 뒤 우리가 변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우리가 말하는 변화는 나 외의 다른 이들, 다른 주체들의 변화였다”며, “4년을 맞아 정작 나 자신은 어떤지 돌아보고 고민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그 고민이 평화를 가까이 부르고, 이 사회의 대립을 줄일 것”이라고 말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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