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티에레스 신부] 4월 15일(부활 제3주일) 루카 24,35-48

부활한 주님의 출현은 제자들이 가진 믿음을 확인시켜 주고 그들이 새로운 책임에 눈뜨도록 해 준다.

빵을 나누며

두 제자들이 “빵을 떼는”(루카 24,25) 예수님을 방금 알아보았다. 그리고 나서 그분은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나타나 평화를 준다.(24,36) 우리는 이 상황 속에서 생명의 충만함을 느낀다. 예수님은 갈릴래아의 길을 그들과 함께 걸어가면서 평화를 선언했고 이제 다시 그 메시지를 확인해 준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그분의 손과 발을 보여 주며 말한다: “바로 나다.”(24,39) 그분은 영이나 유령이 아니다. 부활한 예수님은 살과 뼈를 지니고 있다;(24,39) 그분은 배고프고,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청한다. 그분은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24,42) 잡수셨다. 식사는 항상 생명과 친교의 징표다.

복음은 역사의 예수님과 부활한 그리스도 사이의 일치를 여러 번 반복한다. 주님은 그전에 제자들에게 말했던 것을 되풀이 말한다.(24,44) 이제 그들은 예수님을 더 이해하게 되고 그들의 마음은 성경에 열리게 된다. 그들은 그들의 과제가 메시지와 주님의 부활에 증인이 되는 것임을 분명하게 깨닫는다. 그리고 그 사명을 “예루살렘에서 시작할 것”(24,48)이다. 예루살렘은 예수님이 처형되었던 자리다. 루카에게는, 죽음에 대한 승리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선포되어야 한다.

생명을 나누는 것은 다른 이들을 먹이는 행위까지 포함된다. (이미지 출처 = commons.wikimedia.org)

진리의 증인들

성령으로 강화되어, 베드로는 “이런 일들”(24,48)을 증언한다. 예수님의 반대자들은 “살인자”가 되거나 “생명의 영도자”(사도 3,15)를 선택해야 했다. 다양한 상황 속에서 성경은 우리가 생명과 죽음사이에 선택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유대 민족의 지도자들도 그런 선택을 해야 했다. 예수님의 선포는 그들의 특권에 문제 제기를 했고, 그들의 응답은 삶의 충만함을 가져오는 존재를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예수님의 행위는 풍요로운 행위였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그들이 죽인 존재를 되살렸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이 행위를 증언한다.(사도 3,15) 특권을 옹호하는 것은 항상 죽음을 선택하는 행동으로 표현된다.

우리가 믿어야 할 것에 불충실하고, 이중적 태도는 교묘하게 죽음을 선택하는 모습이다. 자기가 고백하는 것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거짓말쟁이고, 그에게는 진리가 없다”.(1요한 2,4) 부활한 존재를 믿는다는 것은 생명을 확인하고 전달하는 행위까지 포함한다. 우리가 생명을 나누지 않는다면,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완전에 도달할 수 없다.(1요한 2,5) 생명을 준다는 것은 많은 것들을 의미하는데, 부활한 예수님이 요청하는 것처럼, 매우 단순하게 보이는 것들, 예를 들면 다른 이들을 먹이는 행위까지 포함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나눌 수 있는 “구운 생선 한 토막”을 갖고 있기를 희망하자.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신부
1928년 페루 리마 출생. 의대를 졸업한 뒤에 사제로 살기로 결단했다. 사제가 된 뒤에는 리마 가톨릭대학에서 신학과 사회과학을 가르치면서 리마 빈민지역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목을 했다. 대표적인 해방신학자로 빈민의 관점에서 복음을 증거해 왔다. 주요 저술로는 "해방신학"(1971)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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