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 황동환]

사제로 살아온 지 햇수로 17년, 저로 하여금 교회 안의 사제로서의 신원의식을 심화시키고, 그리스도의 제자된 자로서의 확신을 강화시킨 몇 가지 계기가 있었는데, 그러한 성찰과 각성을 나누고 싶어 펜을 듭니다.

성찰과 각성의 과정에서 저의 내면에서 솟구쳐 오르는 숱한 번민과 고뇌의 파고를 넘나들며, 이제는 마치 태풍이 지나간 뒤의 짙푸른 바다 색깔처럼 모든 것이 선명해지며 평화를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성찰과 각성은 공교롭게도 겉으로 보면 교회와 그리스도교 신앙과는 무관해 보이는, 그러나 결코 무관할 수 없는 세상의 영역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교회 안의 사제로서 신원의식을 심화시키고, 그리스도의 제자된 자로서의 확신을 강화시킨 계기 중 하나는 고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을 추모하는 시민사회의 현상과 5.18 광주 민주화운동입니다.

2009년 5월 23일에 일어났던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극적 죽음으로 야기된 일련의 현상들에 관한 이야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미리 드릴 말씀은 사람들 사이에 호불호가 갈리기도 하는 어떤 인물에 대해 제 개인적 호감에 근거한 성찰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 성찰의 결론이 동시대를 살았던 어떤 인물에 대한 과도한 평가로 기울어 자칫 그저 수많은 사람들 중 한 사람일 뿐인 어떤 인물에 대한 우상화로 변질되는 것에도 스스로 경계하고 있습니다.

어떤 한 인물의 죽음과 관련해 발생한 일련의 현상들이 저로 하여금 예수의 제자됨의 의미를 심화시키고 강화하게 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때의 강렬한 체험에서 기인한 각성은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사제로서 오늘을 어찌 살아야겠는지, 나침반과 이정표가 되어 일정한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비겁했던 그 제자들이 대체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체험했기에, 죽음을 불사한 용기 있는 행동을 과감하게 펼쳐 나갈 수 있었던가? 제자들의 변화를 이끌었던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2000년 전 예수님의 삶과 죽음,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 이후 보인 제자들의 극적인 변화는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 것인지는 지금도 여전히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의문입니다. 이러한 묵상을 할 때마다 남는 것은 2000년이라는 그 긴 시간의 간극이 만들어 낸 이질감, 낯선 물체가 피부에 와닿는 이물감 같은 것이었습니다. 예수 부활, 승천, 성령강림과 같은 신학적 주제들을 온전히 알아듣기 위해 수많은 서적들을 탐독했고, 수없이 많은 시간을 묵상과 성찰에 할애하였지만, 이해를 해도 무언가 항상 부족했고, 언제나 과거 2000년 전 중근동 지역의 이스라엘에서 일어난 과거 사건을 뛰어넘어 온전히 현재화하는 문턱을 번번이 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고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 이후, 그를 추모하는 시민들의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의 죽음을 목격하고 전해 들은 초기 그리스도교회의 제자들과 신자들 역시 같은 모습이었지 않았을까? 자연스레 제게 던져진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 예수의 제자됨의 의미에 대한 새로운 각성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고 노무현 대통령을 추모하는 사람들. (사진 출처 = Flickr)

고 노무현 대통령의 추모객들 중에 친부모가 돌아가신 것도 아닌데, 그보다 더 슬픔에 못 이겨 아파하는 시민들의 모습을 보면서, 혹 예수님의 제자들이 겪었을 슬픔과 아픔은 어떠했을까? 묵상해 보았습니다. 노 대통령을 지켜 주지 못해서 미안해 하는 시민들의 모습 속에 예수님이 십자가 형틀에서 최후를 맞는 것을 보며 안타까워하는 제자들의 처연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노 대통령이 생전에 추구하던 가치들을 새롭게 조명하고, 자발적으로 이어가겠다는 시민들의 모습을 보면서, 예수의 죽음이 결코 실패가 아님을 깨닫고, 그분이 설파하고 몸소 실천했던 하느님나라의 가치들을 전파하다가 기꺼이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던 제자들의 모습이 중첩되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제자들을 통해서, 그리고 이후 성인성녀들을 통해서 현재 나에게 전해 오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임을 재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동시대의 한 정치인의 죽음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여길 수도 있겠으나, 그 죽음을 대하는 시민들의 모습을 통해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현재화할 수 있었습니다.

고 노무현 대통령을 추모하는 시민들의 모습을 통해서, 공동체를 위해 이웃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한 모든 이들의 숭고한 정신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고, 그런 가운데 5.18 광주 민주화운동은 제게 남다른 각성을 촉구하고 있었습니다.

'오월 광주'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겪었던 역사적 경험이었고, 이 역사적 체험이 저로 하여금 2000년 전 예수님의 제자들이 보여 준 극적인 변화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역사의 현장에서 사람들이 겪는 절절한 체험이 먼 과거의 일을 눈 앞에서 생생하게 벌어지는 일로 되살려 내고 있다는 성찰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라는 '하느님의 아들'이 있었고, 제자들이라는 '골고타'의 아들들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2000년을 관통해 자신의 희생을 통해 이웃을 살리는 이웃사랑은 오월 광주 민주화운동으로 우리와 조우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공동체를 살리고 이웃을 살리는 정신은 예수님에게서, 제자들에게서도, 그리고 제자들을 통해 예수님의 삶과 운명을 자신의 것으로 삼고자 다짐했던 이들에게서 만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의 제자들, 광주의 아들딸들, 이 모두가 '하느님의 아들딸들'임을 비로소 고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2000년 전 예수님의 제자들로 하여금 죽음을 불사한 하느님나라의 전파자로 추동하게끔 했던 '힘'이 '성령강림'이었듯이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비장함'으로 불의와 부정 앞에 새로운 용기를 낼 수 있게 이 시대의 우리를 추동하는 '힘'은 '오월 광주의 정신'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성령강림'으로 추동되었던 제자들과 '오월 광주'의 정신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이들은 다른 시대의 같은 하느님의 아들, 딸들임을 어찌 고백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성당 앞에 세월호를 기억하는 노란 리본들이 걸려 있다. ⓒ지금여기 자료사진

저로 하여금 예수의 제자됨의 의미를 새롭게 성찰하게 한 계기는 세월호 참사였습니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그날(2014. 4. 16.)의 참혹한 사고가 있은 뒤 한참이 지난 어느 날이었습니다. 평소와 다름없이 미사를 봉헌하던 저는 미사 중에 전혀 낯설었지만 아주 낯익은 외침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늘 보던 미사경본의 문구 한 마디 한 마디가, 미사 중에 봉독되는 성경 말씀 한 구절 한 구절이, 그리고 성체와 성혈이 담긴 성반과 성작이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말을 걸어 오는 것이었습니다. “잊지 말아라” 그리고 “행동해라”.

그때 왜 제가 그런 목소리를 듣게 되었는지, 지금 돌이켜봐도 경이롭기만 합니다. 미사를 끝내고도 한참 동안이나 제 귓전에 아른거리던 미사 중의 목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합니다. 혹시 이런 것을 두고 성령체험이라고 하는 것일까요? 그때까지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것이었기에 낯설었고, 그러나 동시에 익숙한 것이었기에 반가웠습니다.

우리는 왜 같은 미사를 반복해서 참여하고 있는가? 한 번으로 족하다 여기지 않고. 왜, 성경 말씀을 반복적으로 듣고도 지겨워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성경 말씀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2000년 동안 매년 같은 성인들을 같은 날짜에 반복적으로 기념해 오고 있고,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똑같이 기억할 텐데, 그럼에도 우리가 지겨워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새삼스럽게 묵상해 보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적어도 3년마다 똑같은 말씀을 반복적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어떤 말씀들은 일 년 중에 여러 번 듣게 되기도 합니다. 10년 전에도 그랬을 것이고 30년 전에도 100년 전에도, 그리스도교 교회가 생긴 이래 2000년 동안 반복해서 거행해 온 미사를 통해 성경 말씀과 복음 말씀을 되풀이하여 들어도 지겹지 않고 지루해 할 수 없는 이유를 찾은 것 같습니다.

세월호 참사는 성체성사, 곧 미사의 거행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목숨을 바쳐 구현하신 십자가상 제사의 그 사랑을 기억하고, 그 사랑을 오늘 이 자리에서 재현해 내기 위함이며, 곧 예수님을 잊지 않기 위함임을 새롭게 발견하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숭고한 희생과 당신께서 가르쳐 주신 하느님나라를 잊지 않기 위해 성체성사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고, 예수님의 살과 피를 받아 모시는 영성체를 통해 예수님과 갈라설 수 없는 한몸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예수님을 절대 잊지 않겠다고 하는 우리의 노력임을 성찰하게 됩니다. 그리고 잊지 않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제가 미사 끝에 하는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실천합시다”라는 선포는 행동하자는 이야기임도 재각성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잊지 않겠습니다. 행동하겠습니다’라는 시민들의 이 구호가 사실은 그리스도교 미사의 핵심 정신이었음을 시민들로 인해 새롭게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바닷속의 아이들은 이렇게 무디어진 양심과 모호한 정신으로 살고 있던 가톨릭 신부인 저를 일깨워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잊지 않고 기억하겠다라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교가 예수의 최후만찬 이후 2000년 동안 줄기차게 거행해 왔던 미사의 진실이라 생각합니다. 또한 매년 같은 날, 우리 교회는 뭇사람들로부터 잊혀져 있을지도 모를 수많은 성인들을 다시 불러내 기억해 내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교회의 살아 있는 힘의 원천이라 생각합니다.

이제부터 미사에 참여할 때마다 잊지 않겠다는 마음과 행동하겠다는 자세로 임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실질적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고,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더 나은 우리의 삶을 만들어 나아가는 누룩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누리는 평화로 우리를 이끌 것입니다.

황동환 신부(이사악)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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