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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은 한반도의 역사다"박찬식 제주학연구센터장

1947년 3월 1일부터 마지막 무장대원이 생포된 1957년 4월 2일까지 약 10년 동안 지속된, 무려 희생자 3만여 명 가운데 대부분은 이유도 모르고 죽어간 살상 사건. 그러나 7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이름도 없는 사건. 제주 4.3.

1948년 당시에 태어난 사람이 70살을 맞는 동안, 이 사건의 희생자들은 명예를 찾지도 못했고, 다행히 살아남은 이들은 애끊는 울음을 겉으로 내지도 못한 세월이었다. 제주 4.3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 주는 일, 그리고 그 과정의 진상규명과 생존자, 유가족 치유, 명예회복과 배,보상을 위한 마지막 시기, 그래서 더욱 절박한 70주년. 한반도 역사상 가장 모르고 있던 사건 4.3을 들여다보는 것은 단 한 명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에게 그 죽음과 고통의 이유를 명확히 알려 주기 위해서다.

제주 4.3 진상규명보고서 초안 작성에 참여하고 현재는 ‘천주교 제주교구 제주 4.3 70주년 특별위원회’ 위원인 제주학연구센터장 박찬식 박사(시메온)에게 제주 4.3의 의미를 물었다.

“4.3을 대한민국의 역사라고 한다. (이전에 비하면) 나름대로의 의미는 있다. 그러나 4.3은 대한민국의 역사가 아니라 남북한을 넘는 한민족의 역사다. 세계 냉전 가운데 빚어진 결과이기 때문에 일본, 러시아, 미국까지 연관된 사건으로 바라봐야 한다. 세계사의 문제다. 그 속에서 결국 이 4.3은 또한 제주도민 공동체의 문제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제주 4.3 70주년을 맞아 정부와 제주도는 “제주 4.3은 대한민국의 역사”라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박찬식 박사는 4.3에 대한 이러한 호명에 대해 당시 제주도만이 갖고 있던 역사문화적 특성, 국내외 정세적 상황을 들며, “4.3은 통일지향 대중운동 또는 민중항쟁으로 보기에 앞서, 제주도민 모두의 사건이다. 또 대한민국(남한)만의 사건이 아니라 한민족, 한반도의 사건 나아가 세계 냉전과 분단이 빚어낸 사생아와 같은 사건”이라고 말했다.

제주학연구센터 박찬식 센터장. 그는 제주 4.3은 대한민국의 역사가 아니라 한반도의 역사라고 강조했다. ⓒ정현진 기자

먼저 ‘제주도민 모두의 사건’이라는 것은 사건의 발단과 이후 과정에서 제주도의 공동체성과 자치와 독립성이 짙게 배었기 때문이다. 1947년을 전후해 제주는 일본에서 돌아온 인구 6만여 명이 늘어났지만 콜레라 창궐과 생필품 부족, 가뭄으로 인한 극심한 흉년, 미군정의 실책 등으로 극심한 사회 혼란을 겪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제주 인민위원회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이념갈등 없이 제주의 자치를 보존하기 위해 일제 잔재 청산과 미군정 감시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박찬식 박사는 먼저 제주도 역사상 민란과 항일운동 등을 보면 해당 지역뿐 아니라 도민들이 모두 함께 참여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대표적으로 1862년 강제검의 난, 1898년 방성칠의 난, 1901년 이재수의 난 등을 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공동체적 저항이 1947년 3월 1일의 사건에도 그대로 드러난다고 설명했다.

당시 3.1절 행사에는 북제주만 도민 3만 명이 모였다. 그리고 관덕정 앞 발포 사건으로 6명이 죽었는데도 미군정이 정당방위로 규정하고 관련자 색출에 나서자 제주도민은 경찰까지 참여한 민관 총파업을 벌인다.

두 번째, 이것이 제주도민 전체의 문제라는 이유는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이 제주를 “빨갱이”로 규정하고 모두 없애 버리라는 ‘숙청’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이런 입장에 따르면 제주도민은 살아남을 사람이 없었다.

박 박사는 실제로 당시 제주도에 주둔한 한 부대의 이름은 ‘숙청부대’였다며, “이는 집단 학살을 전제한 것이고, 제주의 모든 공동체가 함께 죽어 나가는 상황이었다. 학살의 배경에서 결말까지 집단적이고 공동체적인 사건”이라고 말했다.

또 “이런 문제가 억압 국면에서는 발설도 힘들고 국가적 교육체계와 정치권력 아래서 4.3의 이같은 특성은 드러나지 못했다. 제주가 빨갱이 섬이라는 인식이 오래 지속된 이유”라고 말했다.

“이념 대립이나 남북대립 구조가 70년이 지난 지금도 해소되지 않으니 남남갈등도 생겼다. 김대중 정부 이후에 조금 풀리는 듯했지만 옛시대적 사고에서 아주 조금 달라졌을 뿐이다. 특별법 제정과 대통령 사과가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분단이 지속되고 (이념에 따른) 남남갈등이 지속되는 한, 통일과 제주의 자치, 자유를 보장하라는 제주도민의 요구는 폄하될 것이다”

그는 4.3이 일어났던 당시 한반도의 영구 분단을 막으려던 제주도민의 움직임, 그리고 그 해결의 지점에도 통일이 있다면서, “그런 관점에서 4.3은 대한민국의 문제, 남한만의 역사가 아니라 한반도의 역사이고 문제”라고 지적했다.

1950년 예비검속으로 262명이 학살당한 섯알오름터. 학살 뒤 주검을 구덩이에 암매장했으며, 6년 뒤에야 일부가 수습될 수 있었다. ⓒ정현진 기자

그는 “4.3에 대한 인식 변화는 국가에 대한 인식 변화와 정확히 궤를 같이한다”고 본다. 

“국가관, 인간의 기본권(인권)에 대한 인식이 성숙되어 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민중과 민주, 민족....이 유기적 관계 안에서 해결되어야 하는데, 현재로서는 민족의 문제가 한반도 차원에서 해결되어야 한다.”

“4.3을 좌익 폭도들이 봉기한 사건이라는 인식에 대항하기 위해 국가공권력에 의한 희생이라는 규정까지 왔지만, 그러나 지금은 4.3을 통일지향의 대중운동이나 국가공권력의 폭력이라는 두 가지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박찬식 박사는 1980년대 4.3에 대한 진상규명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민중항쟁론이 나오지만, 민주화와 통일운동 진영에서는 수많은 희생자와 유가족, 피해자에 대한 정서적 공감이 없었다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수많은 이들의 죽음에 대해 국가가 법으로도 명예회복을 해 줬다. 그리고 이제는 역사적 성격의 복원이 필요하다. 그것은 4.3이 분단체제를 통일하려는 지향이었다는 것, 분단을 거부하고 통일과 자치를 지향하는 운동이었고 그 과정에서 정치적 희생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런 맥락에서 법적 차원의 해결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4.3특별법은 1999년 통과된 뒤 수정됐지만 여전히 가해자 처벌이나 피해자에 대한 배보상 문제는 없었다. 올해 이 부분을 보완한 개정안이 제출됐지만, 아직 통과되지 못했다.

그는 “가장 중요한 것은 피해자에 대한 배,보상 지급이다. 또 이번 개정안에는 ‘피해자’라는 용어가 처음 생겼고, 종교적 의미의 희생자보다는 피해자라고 해야 법적 구제 요건이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피해자가 있다면 그 원인인 가해자가 있는 것이고, 가해 여부를 가린 뒤 처벌하고 그에 따른 인적, 물적 피해에 대해 배,보상을 해야 사건이 복원된다”며, “이는 정의구현의 원칙이다. 보상 이전에 진실을 규명하고 가해자를 가려야 한다는 것”이라고 진상규명에 따른 정의구현을 강조했다.

“4.3은 이제 경험세대의 사건에서 미체험 세대의 역사적 기억으로 전환되고 있다. 이 시점에서 현실적으로 풀어야 할 정치적, 법적 과제는 빨리 해결해야 한다. 그 다음에는 장기적으로 이 기억을 어떻게 관리하고 치유하고 또 후세대 교육과 4.3의 의미 보편화, 연구 등이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

박찬식 박사는 “70주년이라는 이 시점은 한 세대가 저물고 당사자들이 없어지는 시기”라며, “이제 더 이상 당시에 직접 이 사건을 겪었던 이들에게 무언가 해 줄 수 있는 시간이 10년도 남지 않았다”고 말했다.

4.3평화공원. 끝없이 늘어선 희생자 묘역과 추모. ⓒ정현진 기자

“4.3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역할은....”

현재 제주교구 4.3 70주년 특별위원회와 주교회의는 전국적 차원으로 4.3을 알리기 위한 여러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특별위원회 위원으로서 그는 “조금 늦었지만 그래도 교회가 4.3을 제주교구나 제주도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적 문제로 보고 4.3의 위상을 더 정확하게 또 보편화하려 노력하는 것은 감사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일반 사회의 교육이나 여러 사업도 있지만 종교 특히 교회에서 먼저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큰 힘이 될 것이다. 전국 교회가 함께 나서는 것 자체가 큰 변화”라면서, “3만 명이 죽어간 사건이다. 이에 대해 교회가 모르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교회는 화해와 상생에는 진실과 정의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며, “교회가 직접 가해자 처벌을 요구하지는 않더라도 진실 규명과 그 진실을 근거로 엄정하게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잘못은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을 통해 용서하는 것이다. 그럴 때 화합과 평화를 이어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4.3에는 좌우를 막론하고 어린아이까지 죽였던 불편한 진실이 있다. 그러나 그것까지 반성하면서 함께 가야 한다”며, “1948년 4월 3일, 그 시간이 주요한 맥락이다. 그날 무장봉기의 원인을 잘 따져야 한다. 무엇을 지향했는가는 논쟁이 필요하다. 그러나 4월 3일의 죽음 그 이전의 원인은 제대로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박찬식 박사는 올해 70년 이후의 70년이 상당히 중요하다면서, “내년에 올해 같은 추모와 기억을 할 것인지 두려워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주기적으로 한 사건을 기억한다는 것은 각 단계별로 정리하고 새롭게 나아가기 위한 발판”이라며, “기억을 정리하고 승화, 발전시키는 단계다. 그 기억은 우리를 가두는 것이 아니라 해방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제는 4.3의 미래 세대를 위한 시간이다. 종교가 그런 면에서 넓게 시대적 의미를 구원사적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교회가 앞으로의 향방에 대해 이 사회에 제언하고, 오늘 이 시점을 법적 미해결 부분을 해결하기 위한 전기로 삼아 기초가 단단한 4.3의 해결방향을 함께 잡아 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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