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티에레스 신부] 4월 8일(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제자 토마스와 스승 예수 조각상. (사진 출처 = Wikipedia)

부활시기는 기쁨의 때이며 파견의 때이기도 하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에 대하여 생각하는 시기다.

믿음과 불신

예수님의 제자들은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죽은 뒤 두려움의 순간을 겪는다.(요한 20,19) 그런 상황에서 부활한 주님이 나타나 그들의 사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힘을 준다.(20,21) 예수님은 두려움이 닫았던 문들을 연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평화를 가져온다. 그 평화는 그러나 휴식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평화는 복음을 선포하러 가는 데 있어야 할 전제조건이다. 제자들의 사명은 아버지 하느님이 예수님에게 주었던 사명과 같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들을 보낸다.”(20,21) 그들은 성령의 역사에 의해 그들의 사명을 수행할 것이다.(20,22)

토마스는 역사 속에서 회의적이고 의심 많은 제자로 부각된다. 그는 보지 않으면 믿지 못한다. 믿음에 저항함으로써, 토마스는 우리에게 주님이 참다운 행복의 형식으로 선포한 약속을 얻어 준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20,29) 토마스처럼, 우리도 이렇게 말해야 한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20,28) 우리는 우리 눈으로 예수님을 보지 못 했으나 믿는 사람들이다.

하느님으로부터 태어나다

예수님은 그 어느 사람도 무심하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분은 우리 삶의 모든 측면을 바꾸어 놓는다. 예수님의 추종자들은 이웃을 섬기기 위하여 모든 것을 내놓는다. 그들은 인간 실존의 모든 차원에 영향을 미치는 친교 속으로 들어간다. 루카는 우리에게 말한다: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사도 4,32) 이렇게 함으로써 제자들은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한다.(4,33) 그러한 사랑은 공동체 안의 궁핍을 없앤다.(4,34) 부활의 증인으로서 제자들은 생명을 전달하고 모든 이들의 필요를 채운다.(4,35) 초기 공동체의 이런 모습은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많은 경험들에 영감을 불어넣었다. 이런 형태의 이상향이 역사를 앞으로 전진하도록 만든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란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태어난다는 뜻이며,(1요한 5,1) 그 믿음은 부활한 주님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가 죽음을 정복하도록 해 준다. 이제 우리는 다른 이들에 대한 우리 자신의 생활의 표징을 통하여 그들이 주님의 부활을 믿을 수 있게 해야 한다. 주님의 사랑과 주님의 자녀들의 사랑은 분리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초기 공동체가 가진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여 아무도 부족한 것이 없도록 함으로써 이룩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의 상황 속에서 생명의 징표를 이웃에게 주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결정해야 한다.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신부
1928년 페루 리마 출생. 의대를 졸업한 뒤에 사제로 살기로 결단했다. 사제가 된 뒤에는 리마 가톨릭대학에서 신학과 사회과학을 가르치면서 리마 빈민지역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목을 했다. 대표적인 해방신학자로 빈민의 관점에서 복음을 증거해 왔다. 주요 저술로는 "해방신학"(1971) 외 다수가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