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이라 오후부터 시작한 운전이었는데 밤 늦게까지 바쁘게 일이 이어졌다. 거의 쉬지도 못한 채 몇 시간을 운전하다 보니 피곤이 몰려와 그만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서는 길이었다. 자정을 막 지난 시간이었다. 그러다 빨간 신호등 앞에 섰는데 길가에 서있던 웬 젊은이가 말도 없이 다짜고짜 차에 올라타며 불쑥 한마디를 외쳤다.

“Titirangi north, please!”

“Titirangi?” 온몸이 피곤한데다 고속도로에서 꽤나 산자락을 타고 들어가야 하는데…


“Titirangi north, please!”

거기다 술기운이 좀 심하다 싶었다. 일 마치고 집에 가는 길이라 어렵다 했더니 자기를 그날 마지막 손님으로 태워 달라며 사정을 했다. 택시 잡기가 어렵단다. 만일을 대비, 차 안에 구토 같은 것을 막기 위해 창문 유리를 내리라 하고는 Titirangi로 향했다. 산속으로 들어서고 꽤 갔는데도 아직도 멀었단다. 그 뒤로 한참을 가도 계속 앞으로 달리라고 주문을 했다. 울창한 숲 속에다 길은 서서히 좁아지고 오르막 길

경사마저 급해지더니 급커브까지 이어져 불현듯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뭔가 미궁으로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잠시 멈추고서 확인을 했다. “이 길이 당신 집 가는 길 맞냐? 취중이라 길을 잘못 든 게 아니냐? 이건 차량 통행길이 아닌 것 같다” 그러자 손가락을 위로 가리키며 혀가 약간 꼬부라진 목소리로 “Straight through! Keep going!”하고 외쳐댔다.

아, 이럴 땐 어떡해야 하나? 그 사람 말을 믿고 계속 운전하기도 어렵고 후진으로 내려올 수 있는 길도 아니고, 그렇다고 앞으로 가자니 경사가 너무 심하고… 이게 바로 진퇴양난이 아닌가? 이 술 취한 사람 말을 따를 것인가 말 것인가. 이럴 땐 참 어렵다.

말없는 시간은 새벽 1시를 넘어서고도 흐르는 물처럼 계속 잘도 가는데, 갈 길이 바쁜 나는 좀처럼 속도를 내어 갈수가 없다. 몸도 피곤했지만 맘이 깜깜해지는 듯 싶어 조금 가다 다시 차를 세웠다. 그리고는 차에서 내려서 더 이상 못 가니 내리라고 했다. 그런데 웬걸, 약 50m만 더 가면 집이 나온다며 내리지도 않고 그저 계속 올라가라고 주문을 또 외쳐댔다. 키발을 딛고 목을 위로 빼며 위쪽을 아무리 둘러봐도 집 같은 형체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땅이 고르지는 않지만 차 한 대 간신히 다닐 수 있는 오솔길이라도 있는걸 보면 사람 사는 곳이 있을 것도 같은데…


이 술 취한 사람 말을 따를 것인가 말 것인가

그저 입 꼭 다물고 어디 한번 믿어봐? 다시 시동을 걸어 천천히 오르다 보니 무슨 절간 같은 곳으로 오르는 느낌이었다. 옆으로 뻗쳐 나온 길가 나뭇가지들에 차가 스치기도 했다. 마음속으로 기도하는 가운데도 자꾸 분심이 새벽 기운에 실려 폐부 깊숙이 스며 들어왔다. 알지도 못하는 젊은이와 함께 깊은 밤 미로 속을 달린다? 뭐에 홀린 건 아닌가… 머리 속에선 방정맞게도 납량특집(?) 시나리오가 계속 엮어져 갔다.

그러다 언뜻 보니 희미한 달빛에 시꺼멓고 육중한 집 한 채가 절벽 위에 딱 버티고 서 있었다. 그래도 다행이다 싶은 마음에 안도의 숨을 내쉬며 가파른 절벽위로 조심스레 차를 올렸다. 그런데 그 마음도 잠깐, 아차 싶은 게 차를 전혀 돌릴 수 없는 협소한 외길 같은 공간 뿐 이었다. 막다른 절벽에 서서 그야말로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이 아닌가.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며 걱정을 하자 길 끝에 보이는 차고 속으로 들어가란다. 뭐라고? 차고 속으로? 차고라기보다 창고 같은 허름하고 좁은 곳으로 들어 가라고… 그래서 통째로 가둬 버리겠다는 말인가? 어이가 없었다. 일단은 들어가 보란다. 그 차고 뒤쪽에 마당이 있으니 거기 가서 U-turn 해서 나오란다. 달리 방도가 없었다. 그 말을 믿고 들어갈 수밖에. 차고 폭이 좁아 양쪽을 조심조심 살펴 가면서 들어가는데 차 위에서 뿌지직 하고 뭐가 부딪치며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차에서 내려 살펴보니 아뿔싸, 택시 지붕에 얹혀있는 택시 등탑 라이트가 차고 천장 바에 꼭 끼여서 탑 라이트 몸체가 뒤로 뒤틀려 버린 게 아닌가. 더 이상 움직일 수도 없었다. 정말이지 차까지 깊은 산속 외딴 집 창고 속에 꼭 붙잡힌 신세가 돼 버렸다. 차 돌릴 것을 생각해서 그냥 앞으로 더 들어가니 탑 라이트 전체가 확 뒤로 뒤틀려져 버렸다.


힘들고 지칠 때 쉬어야 하는 건데

그리고 그 젊은이는 45달러 요금에 가까스로 구겨진 지폐20달러 한 장을 던지다 시피한 채 나 몰라라 “바이 바이”하고는 집안으로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그 순간 어떻게 돌아내려오냐가 더 급선무인지라 요금은 둘째 문제였다. 차고를 통과해 뒷마당에 다다르자 여러 차례 돌리고 돌려야 간신히 나올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망가져 덜렁거리는 택시 탑 라이트를 그대로 한 채, 겨우 차를 돌려 우여곡절 끝에 산을 내려오자니 마음이 착잡했다. 밤중에 경사가 좁은 길을 내려오는 것이 되려 더 어렵고 조심스러웠다. 양 손 바닥과 머리 속에 땀이 배어 나왔다. 이게 지금 무슨 일인고? 힘들고 지칠 때 쉬어야 하는 건데

그걸 좀 간과 했더니 더더욱 안 좋은 결과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만 것 이었다. 남모르는 어려움 속에 처한 이민자들, 그 가운데서도 가장들의 여러 모습이 떠올랐다. 세상사라는 게 때론 이렇기도 한걸…

남 쉬는 가운데도 밤 늦게까지 일하는 많은 이들 중에도 이런 저런 일로 남모르는 고충을 느끼는 이가 참 많을 성 싶다. 밤늦게 빌딩 사무실 청소를 마치고 나오며 열쇠로 문을 잠그다 그만 열쇠가 뚝 부러져 출근 직전까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전전 긍긍했다는 사람 심정을 남의 얘기가 아닌 내 얘기로 이제 조금 이해할 듯하다. 나 역시 날이 밝으면 망가진 부분을 고치러 차량 서비스센터에 가야 할 것 아닌가. 그러면 그 비용은 반값도 못 되게 받은 택시 요금의 십여 배는 족히 더 나올 텐데…


머잖아 새벽이 동터 오르지 않겠는가

한번 씩 이렇게 벼랑 끝에 설 때마다 한 발자국 씩 삶의 깊이를 체험하게 된다. 그럴 때마다 사람 사는 세상이 예사롭게 보이지가 않는다. 부딪쳐가면서도 가다듬어져 가는 마음인 걸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한다. 비록 필요 이상의 노력과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 해도 세상을 바라보는 눈에 조금씩 원망과 수용어린 관심이 싹튼다.

실수나 우여곡절 뒤에도 뭔가 하나씩 얻어지는 게 있다. 세월이 가면서 나이가 들면 검은 머리에 흰 머리가 하나씩 늘어나듯이 그렇게 이해 담긴 눈길도 조금씩 깊어지는 것일까. 내가 아니었으면 또 다른 택시 운전사가 그런 경험을 가졌을 법도 싶고, 그 운전사 대신 안 좋은 몫을 대신 내가 졌다 싶으니 좀 속상하긴 해도 뭔가 한 것도 같고… 전에 내려앉았던 마음이 그런대로 좀 풀리는 듯 했다. 어려움의 계곡을 넘어 서면서 다시 일어서는 마음에 이렇게 작은 위로가 따르는 것이 그저 고맙기도 하다. 머잖아 새벽이 동터 오르지 않겠는가.

그러고 보면 어쩜 벼랑 끝은 작은 은총의 수로인지도 모르겠다.

/ 백동흠 2008-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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