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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할까요?[영원한 생명을 주는 진리의 길 - 김용대]

“영원한 생명을 주는 진리의 길”, 요한 타울러, 사회와연대, 2017, 367-370쪽.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누가 벗이 있는데, 한밤중에 그 벗을 찾아가
이렇게 말하였다고 하자. ‘여보게, 빵 세 개만 꾸어 주게.
내 벗이 길을 가다가 나에게 들렀는데 내놓을 것이 없네.’
그러면 그 사람이 안에서, ‘나를 괴롭히지 말게.
벌써 문을 닫아걸고 아이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네.
그러니 지금 일어나서 건네줄 수가 없네.’ 하고 대답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루카 11,5-8)

이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신 것으로 곧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루카 11,9-10)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의 차이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청한다는 것’은 내적 인간이 진심으로 하느님께로 돌아서서 간절하게 은총을 간청하는 것을 의미하고, ‘찾는다는 것’은 다른 것보다 그것을 더 갖고 싶어 하여 기도하는 것을 의미하며, ‘두드린다는 것’은 청한 것을 얻을 때까지 결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여 청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스트라스부르에 있는 요한 타울러의 상. (사진 출처 = en.wikipedia.org)

가경자 베다(672-735)는 이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우리의 주님께서 말씀하신 ‘친구’는 ‘사람의 영혼’으로 영적(靈的)이지 않은 생각을 하면서 길을 잃고 먼 낯선 땅으로 갔지만 너무나 배가 고프고 목이 말라 뭔가를 찾다가 찾지 못하고 다시 돌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영혼은 하느님이신 친구의 집 문 앞에 서서 기도하고 문을 두드리면서 빵 세 조각을 청하는데 빵 세 조각은 거룩한 삼위(三位)의 지혜를 의미합니다. 친구는 ‘나도 잠자리에 들었을 뿐만 아니라 종들도 잠자리에 들었다’고 둘러댔습니다. 이 ‘종들’은 하느님을 관상하고 있는, 하느님께서 임명하신 ‘스승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영혼은 막무가내로 문 앞에 서서 자기가 청하는 것을 주기 위하여 친구가 잠자리에서 일어날 때까지 계속하여 문을 두드렸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스승들을 통하여 응답을 주시거나 직접 응답해 주십니다. 이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자비로운 분임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청하는 것을 기꺼이 주시므로, 진심으로 청하라고 하시고 청하는 방법까지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게으른 사람에게는 선물을 주시지 않고 간절히 끊임없이 청하는 사람들에게만 선물을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청해야 할까요? ‘사랑’입니다. 기도하거나 분심(分心)을 버리려고 할 때는 진정으로 겸손하게 하느님 발 앞에 엎드려 하느님께서 자비로 사랑을 주시기를 간청해야 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사랑의 빵을 선물로 청해야 합니다. 빵이 아닌 세상에 있는 모든 음식을 먹는다고 해도 아무 맛이 없고 배부르지도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사랑만 간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달라고 청해야 합니다. 하느님께 당신을 가장 기쁘게 해드리는 기도가 무엇인가를 여쭙고 어떤 내면의 수행(修行)을 해야 가장 좋은지를 물어 보아야 합니다. 그런 다음 자신에게 떠오르는 생각이 하느님에 관한 것이든, 거룩한 삼위(三位)에 관한 것이든, 주님의 수난과 상처에 관한 것이든 무조건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기도를 구송기도로 바쳐야 하기 때문에 모두 마음으로 기도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가능한 한 경건하게 하느님의 말씀으로 우리 주님께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께는 외 아드님을 통하여 기도하면 어떤 식으로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든 관계없이 여러분의 영혼 안에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여러분이 좋아하는 방식대로 기도하고 있을 때 자신의 죄 때문에 슬픈 생각을 하고 있든 다른 생각을 하고 있든 그 생각에 머무십시오.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찾고 발견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신 것은
하느님의 뜻을 수행(遂行)하고 이웃을 돌보는 은총을 찾고 발견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문을 두드리십시오. 그러면 왕관을 씌워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구세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11-13)

‘생선을 선물로 받는다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된다는 의미이며
‘달걀의 선물’은 ‘두터운 신앙’을 뜻합니다. 그런데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고 하셨지만, 많은 사람이 평생 살아 있는 빵, 즉 생명의 양식을 청하는데도 왜 아직도 받지 못하고 있을까요?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께서는 너무나 자비하신 분이라서 우리가 은총을 청하는 것보다 수 천 번 더 은총을 주시려고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기도문과 시편과 성령께서 가르쳐주신
많은 기도를 매일 바치고 있지만 응답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응답을 받지 못하는 이유가 있는데 정말 놀라운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그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아직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집착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거나 죽은 자신이나 일가친척들만 좋아하므로 하느님의 사랑이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좋아하는 것들을 청하는 기도를
아무리 드리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빅토르의 위그(1096-1141)가
“아무도 영혼 없이는 살 수 없듯이 아무도 사랑이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영국의 작가 체스터턴(1874-1936)은 “성경에서는 우리들에게 이웃들을 사랑하고 원수들까지도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아마 그 이웃들과 원수들은 같은 사람들일 것입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내적 치유 피정을 가보면 많은 사람들이 “남편, 아내, 부모, 자식 때문에 병을 얻게 되었습니다만 용서하고 나서는 평화를 얻고 치유되게 되었습니다” 하고 고백하는 것을 많이 봅니다.

나는 그 고백을 듣고 나서 가까운 사람들이 원수가 되지 자신과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이 원수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냐고 반문하신 것은 ‘무연자비(無緣慈悲)’를 말씀하신 것이고 핏줄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을 왜곡하여 ‘편애(偏愛)’도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기복신앙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복을 얻고 누리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먼저 회개하고 선한 일을 해야만 복을 주십니다.

그래서 인간은 연약하기 때문에 복은 스스로 창조하고 노력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으로부터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복은 자신이 짓고 가꾸어야 하는 것임에도 절대자이신 하느님에게 빌고 구해야 얻게 된다고 믿음으로써, 자신이 믿는 하느님에게 정성을 다해 복을 비는 기복행위가 신앙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깨닫기만 해서는 안 되고 자기를 버리고 사랑으로 베풀고 사는 버릇을 들이지 않으면 후손에게 복을 줄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루미(1207-1273)는 자신의 불후의 명작 “마스나비”에서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들이 진리를 찾지 못하고 종교의 덫에 걸려 성직자를 따라가면서 길을 잃고 있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믿음이 깊다고 말하며 기복신앙만 믿으려고 합니다. 이미 성직자들에게 세뇌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슬프게도 그리스도인들이 길을 잃었다고 내게 말하지 마시오.
유대인들이 길을 잃었다고 내게 말하지 마시오.
종교가 없는 자들이 길을 잃었다고 내게 말하지 마시오.
슬프도다! 형제여, 자네도 길을 잃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길을 잃은 것처럼 보이는 것뿐이라네.”

“나는 사랑 외의 어떤 종교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나의 마음은 사랑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종교는 사랑을 강조하지만 사랑에는 종교가 없습니다.”

김용대(후고)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박사.
본명은 후고입니다만 호도 후고(後考)입니다. 항상 뒷북을 친다는 뜻입니다.
20년 동안 새벽에 일어나서 묵상을 하고 글을 써 왔습니다.
컴퓨터 전공 서적을 여러 권, 묵상집 "그대 음성에 내 마음 열리고", "징검다리"를 쓰고, 요한 타울러 신부의 강론집을 번역하여 "영원한 생명을 주는 진리의 길"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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