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영화 - 정민아]

2017년에서 2018년으로 이어지는 길목의 극장가에서는 '강철비', '신과 함께', '1987'이 빅3를 형성하며 흥행에서 순항하고 있었다. '코코'와 '메이즈 러너' 같은 할리우드 큰 영화와 이병헌이라는 스타의 이름값에 걸맞은 흥행 성적을 보이고 있는 '그것만이 내 세상'이 흥행 순위 상위권에 올라있는 가운데, 지난주에 한국영화 '1급기밀'의 작지만 강렬한 한방이 눈에 띈다.

남북 핵위기를 둘러싼 근미래 영화 '강철비', 6월항쟁 실화를 픽션과 배합한 '1987', 군내 비리를 고발하는 '1급기밀', 1월 마지막 주에 개봉할 영화로 용산참사에서 영감을 얻은 수퍼히어로 영화 '염력'까지, 최근 한국영화에는 어떤 흐름 같은 것이 있다. ‘사회문제’와 ‘정치’, 그리고 ‘정의’를 말하는 것이 이들 영화들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점이다. 이러한 소재를 가진 영화들이 활발하게 제작됨은 물론 흥행으로도 이어지고 있는데, 여기서 우리 모두가 느끼듯이 한국사회의 변화가 감지된다.

'1급기밀', 홍기선, 2018. (포스터 제공 = 리틀빅픽처스)

2018년과 2017년 한국 흥행영화의 어떤 경향

2018년을 여는 한국 영화의 풍경은, 추악한 권력자 무리와 이에 대항하는 정의로운 자들의 대립을 그리는 진정성의 에토스로 채색된다. 2017년 지난 한 해 흥행한 한국영화들을 보면 그 양상은 더욱 확실하게 드러난다.

1980년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이들이 저지른 민중학살인 광주항쟁의 한복판에 우연히 서게 된 한 남자의 정치적 각성을 그린 '택시운전사', 제국 일본에 의해 강탈당한 피식민지 조선의 설움을 그린 '군함도', 30년에 걸친 현대사를 배경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고 법을 농단해온 검사들의 추악한 이야기를 다루는 '더 킹',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미의회에서 증언하는 과정을 따라가는 '아이 캔 스피크', 살인 누명을 쓰고 10년을 감옥에서 보낸 남자의 실화를 통해 권력층과 한국 법체계의 문제점을 파헤친 '재심',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무정부주의자 조선인의 꺾이지 않는 항일정신을 보여 준 '박열', 한국 정치사를 바꿔 놓은 한 진보 정치인의 도전과 좌절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노무현입니다'가 2017년 흥행계를 수놓았던 영화들이다.

2017년에 흥행한 한국 영화들은 과거 역사와 접속하거나, 현재의 부정의한 상황에 도전장을 내밀거나, 좌절로 막을 내린 진보적 인물을 재평가한다. 이러한 경향은 한국사회가 겪은 특별한 상황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2017년과 18년 초 한국 영화계의 키워드는 ‘정의’와 ‘정치’다. 2016년 10월부터 한국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드라마틱한 현실을 겪고 있다. 2016년 11월 촛불을 든 시민들은 불법을 저지르고 권력을 사유화한 대통령의 퇴진을 외쳤고, 2017년 초에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무혈혁명으로 한국 시민들은 권력자를 권좌에서 끌어내렸고, 새로운 진보 정권을 세웠으며, 그리고 지난 9년간 파괴된 민주주의를 다시 세우기 위한 실험에 나서고 있다.

20여 년 동안 진행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사회의 보수화는 많은 문제를 낳았다. 이른바 체제 변화를 경험한 2017년 체제에서 대중은 돈이 아니라 사람이, 개인의 출세가 아니라 공동체가, 정치 혐오가 아니라 정치 참여가, 자기비하로 인한 우울이 아니라 극복을 통해 사회로 복귀하는 애도 작업이 훨씬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지난 수십 년을 비판적으로 되돌아본 분노한 대중은 각성된 시민으로 거듭났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된 양상은 주류영화에 적극 반영된다.

'1급기밀' 스틸이미지. (이미지 제공 = 리틀빅픽처스)

정의와 정치 시대의 영화, 영웅에서 시민으로

바야흐로 정의와 정치의 시대, 2017년 체제가 향하는 곳은 함께 살아가는 탈신자유주의체제가 될 것이다. 정치적 주체로 거듭난 시민은 정치의 일상화를 실천하며 새로운 진정성의 실체를 찾고 있다. 간접적으로 사회성을 함의하는 영화가 아니라,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것에 직면하는 영화들이 2017년과 18년에 부각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지금의 영화들은 판타지적 영웅 캐릭터가 활약하는 것에서 벗어나, 개인 각자의 작은 목소리들이 연대하여 일구어 내는 거대한 변화에 관심을 더욱 기울인다. '1987'는 소수의 주인공이 아닌 스타들의 멀티 캐스팅과 꼬리에 꼬리는 무는 사건의 이어짐이 거대한 파고를 일으킨다는 민중주의 관점의 영화다. '강철비'는 국내외 정치상황에 대한 감독 나름의 합리적 진단을 기반으로 상상력을 쌓아 올린 정치적 담론장으로서의 영화다. '1급기밀'은 악의 평범성에 저항하는 생각하는 직업인에 대한 화두를 진정성 있게 던진다. 영화는 군내 비리와 관련된 실화를 모티프로 한다. 한 군인이 군내 무기 관련 비리를 알게 되고, 이어서 진상을 추적하여 세상에 폭로하는 과정이 묵직하게 그려진다.

1980년대에 카메라를 들고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홍기선 감독은 1992년, 태풍으로 새우잡이 선원 80여 명이 목숨을 잃은 실화를 소재로 한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로 충무로에 데뷔했다. 이 작품은 아직 검열이 시퍼렇게 살아 있던 때라 필름이 공무원인 검열관들에 의해 마구잡이로 잘려 나가며 만신창이가 되었다. 이 상처로 홍 감독은 오랫동안 작품 활동을 하지 못하다가 2003년 세계 최장기 정치범으로 기록된 비전향 장기수 김선명의 삶을 극화한 '선택'을 연출하였다. 그리고 2009년 장근석이 주연을 맡은 '이태원 살인사건'을 통해 영화감독으로서 대중적으로 널리 알리게 되었고, 영화를 본 시민들의 적극 응원 속에서 실제 사건의 용의자가 국내로 송환되어 징역형을 선고받게 하는 데 이르렀다.

홍 감독은 이후 본격적으로 '1급기밀'의 시나리오 작업에 들어갔는데, 아쉽게도 그때는 이명박 정권 때였다. 민감한 소재 때문에 모태펀드에서 투자를 거부당하고, 지역영상위원회와 개인투자자들의 도움으로 어렵게 촬영에 들어갔다고 한다. 그리고 촛불집회가 한창이던 2016년 말까지 촬영을 마치자마자 감독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이후 영화운동 후배인 이은 감독이 후반 작업을 마친 뒤 문재인 정부에서야 비로소 개봉하게 되었다.

참으로 우여곡절도 많고 사연도 많은 영화다. 사회문제에 대한 지대한 관심, 영화가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일념으로 영화에 투신해 온 감독의 마지막 작품다운 영화다. 영화는 1997년 국방부 조달본부에 근무했던 군무원의 전투기 부품 납품 비리 폭로, 2002년 공군의 차세대 전투기 외압설 폭로, 2009년 김영수 소령의 군납 비리 폭로까지, 세 가지 실화를 유기적으로 엮어 탄생한 픽션이다.

국방부 군수본부 항공부품구매과 과장으로 부임한 박대익 중령(김상경)에게 어느 날, 공군 전투기 파일럿 강영우 대위가 찾아와 전투기 부품 공급 업체 선정에 대한 의혹을 제기한다. 이에 대익이 부품구매 서류를 확인하던 중 유독 미국의 에어스타 부품만이 공급되고 있음을 발견한다. 한편 강영우 대위가 전투기 추락 사고를 당하고, 이를 조종사 과실로 만들어 사건을 은폐하는 과정을 지켜본 대익은 큰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은밀한 뒷조사 끝에 차세대 전투기 도입에 관한 에어스타와 연계된 미 국방부와 한국국방부 간에 진행되고 있는 모종의 계약을 알게 된다. 명예로운 군인으로 남고 싶은 대익은 ‘PD25시’의 기자 김정숙(김옥빈)과 손잡고 국익이라는 미명으로 군복 뒤에 숨은 도둑들의 만행을 폭로하기로 결심한다.

김영수 소령이 2009년 지금은 <MBC> 사장이 된 최승호 PD와 손잡고 실명으로 ‘PD수첩’에 등장하여 군내 비리를 고발하던 그 치열했던 과정이 영화에 적극 투영된다. 영화는 자극적이거나 흥미를 유발하기보다는 묵직하고 차분하게 폭로 과정들을 보여 준다.

'1987'이나 '강철비'가 긴박감 넘치는 정치 스릴러 장르를 빌려와 오락적으로도 승부를 걸었던 것과 대조적이다. 어쩌면 1980년대 운동권으로 살았던 홍기선 감독의 스타일일 것이다. ‘리얼리즘 드라마’라는 근사한 이름을 붙여 보지만 영화는 확실히 촌스럽다. 문어체로 이루어진 대사톤이나 매끄럽지 못한 편집으로 사건의 전개가 툭툭 튀고, 선한 캐릭터나 악한 캐릭터 모두 평면적이다. 예산이 적어 스타급 배우를 활용하지 못하여 캐릭터에의 동화가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1급기밀' 스틸이미지. (이미지 제공 = 리틀빅픽처스)

진정성으로 승부를

매우 훌륭한 소재이지만 위에서 리스트화한 사회고발 영화들의 최근 트렌드에도 한참 밀린다. 그럼에도 필자는 이 영화가 사랑스럽다. 이 영화는 ‘진정성’으로 가득하다. 87년 민주화항쟁 이후 ‘진정성의 에토스’가 사회를 한껏 자극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한국영화는 코리언 뉴웨이브시네마의 등장을 목격했다. 사회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직면했던 장선우, 박광수, 정지영 같은 신진감독들이 일군 리얼리즘 영화의 전성기는 1997년 IMF가 밀려온 뒤 달라진 사회 분위기로 인해 막을 내렸다. 출세주의, 성공지상주의, 건강주의는 나르시시즘과 탈정치화, 그리고 사적 세계에 몰두하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변화된 양상은 영화에도 적극 반영되었다. 2000년대 이후 한국영화의 소재와 장르가 획일화되고, 스타 일변도로 재편되고 있다는 불만은 아마도 이러한 토대 위에서 나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바람을 타고 한국사회는 점점 보수주의로 회귀하고 있었고, 건강과 성공, 혹은 생존에 대한 절대적 가치는 영화에서 영웅적 판타지 주인공의 활약을 지켜보며 대리만족하게 하였다. 하지만 새로운 공동체적 가치가 중요함을 깨달은 급변하고 있는 사회정치 현실이 한국 대중영화에 어떤 활력을 줄 것인지 관심 있게 지켜볼 일이다.

진지한 리얼리즘 톤의 '1급기밀'은 방산비리라는 무거운 소재를 택하고, 정치권력과 군 상층부가 결탁된 권력층 비리임을 공론화하고자 한다. 용감한 내부고발자들은 아직도 고초를 겪고 있다. 권력층 스스로 정화하지 못하는 곳에 시민이 다시 한번 나설 차례다. 그래서 이 영화가 더욱 잘되길 기대한다. 세련되지는 못하지만 진정성 있는 주제를 뚝심 있게 펼치는 영화 또한 존재 의의로 충분하다.

 
 

정민아(영화평론가, 성결대 교수)
영화를 통해 인간과 사회를 깊이 이해하며 
여러 지구인들과 소통하고 싶어하는 영화 애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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