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생명을 주는 진리의 길 - 김용대]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마태 2,2)
 

유대인들의 임금이 어디에서 태어나셨나 하는 것을 깊이 묵상해 보기로 합니다.
앞에서 여러분에게 여러 번 말했지만, 다시 말씀드립니다.

우리의 영혼 안에 주님의 영원한 탄생이 이루어졌고
앞으로도 영원히 탄생하시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몇 가지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첫 번째 의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만물 안에 계신다는 것을 자기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보다 더 잘 알고 있고, 하느님께서 어디에 계시더라도 역사하시게 되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아시고 당신의 영원한 말씀을 하시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주님의 탄생과 관련하여 인간의 영혼은 다른 피조물들과 비교하여 다른 점이 있을까요?

하느님께서는 만물 안에 계시면서 역사하시고 모든 일을 하시지만
하느님께서는 영혼 안에서만 태어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만물 안에서 하느님의 흔적과 발자취를 발견하지만
영혼은 하느님의 모습대로 만들어졌고
주님의 탄생으로 하느님의 모습을 완전히 알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의 다른 피조물에게는 이러한 능력이 없습니다.
하느님을 닮게 되면 빛이나 은총이나 행복을 받아 완전한 영혼이 되는데
이는 주님께서 영혼 안에 탄생하셔야만 받을 수 있게 됩니다.

더없이 소중하게 되고 위로가 되고 기쁘게 되고 가장 참된 존재가 되려면
내면생활을 하면서 주님의 탄생을 기다리십시오.
내면생활을 게을리하게 되면 선하지 않게 되고 행복하지 않게 됩니다.
주님의 탄생은 여러분에게 참된 복을 주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떠나서 어떤 기쁨을 찾더라도 또 간신히 찾았다 해도
그것은 참된 기쁨이 아닙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영혼 안에 탄생하셔야만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게 되며 다른 길은 없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탄생으로
황금과 몰약과 유향을 선물 받고 주님의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피조물은 영향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아버지께서만이 영혼의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가실 수 있으므로, 하느님 아버지께서 들어가셔서 역사하신 영원한 탄생을 영혼이 본받아 하느님과 닮게 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의문’은 영혼의 깊은 곳에 주님께서 탄생하셨다면 모든 사람의 영혼이 다 같을진대 왜 착한 사람의 영혼은 물론 죄인의 영혼에는 계시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옥에 있는 인간의 영혼도 고귀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의문에 답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의 탄생은 항상 영혼에 새로운 빛을 비추게 되는데 하느님 당신의 모습을 그대로 비추며 처음에는 내면 깊은 곳에 비추고 넘치게 되면 정신의 모든 능력에 비추며 마지막으로 외적인 삶에 비춥니다.

바오로 성인이 나자렛 예수의 추종자들을 체포하러
다마스쿠스로 가고 있었을 때 이러한 일이 일어났는데
하늘에서 갑자기 번개 같은 빛이 쏟아지더니 그의 주변을 비추었습니다.

말이 놀라서 앞발을 들고 날뛰는 바람에 그는 땅으로 나자빠졌습니다.
그는 섬광 같은 빛에 눈이 멀어 아무것도 볼 수 없었습니다.
잠시 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러나 동료들은 모든 것을 똑똑히 보았습니다.(사도 9,1-19 참조)

이와 같이 경건한 영혼들에게는 빛이 비칩니다.
하느님의 빛이 내면 깊은 곳을 채우고 나면 자신의 몸을 비춥니다.
그러나 죄인은 죄와 사악함으로 가득 차 어둠 속에 있기 때문에
빛을 받을 수도 없고 빛을 받을 자격도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 성인이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고 말했던 것입니다.(요한 1,5)

거짓과 어둠으로 빛이 차단되기 때문입니다. 영혼 안에 빛과 어둠이 함께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과 세상 것들도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들어가시기 전에 세상 것들을 몰아내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어떻게 이 빛을 감지하게 될까요?
하느님께로 돌아가게 되면 인간의 영혼에 빛이 비치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깨닫게 해 줍니다.
전에는 아무 개념도 없었지만 많은 인도를 받게 됩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세상 것들을 멀리하도록 만드신다고 답하고 싶습니다.

하느님의 빛을 받지 못하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을까요?

깨달음은 너무나 고귀하기 때문에 하느님의 것, 즉 하느님의 진리가 아닌 것이나 하느님께 기울어지지 못하게 하는 것은 모두 여러분을 괴롭히게 됩니다.

그러나 영혼이 이렇게 깨닫게 되면 하느님 때문에 무척 기쁘게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디서 온 것인지는 모르지만 여러분 안에 있는 수많은 훌륭한 가르치심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는 진리의 길", 요한 타울러, 111-113쪽)

 

우리 영혼 안에 주님의 영원한 탄생이 이루어졌다. (이미지 출처 = maxpixel)

비교종교학의 창시자 막스 뮐러(1823-1900)가 "독일인의 사랑"에서 말했습니다. 

“이 세상의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목사, 스님과 같은 성직자, 바리사이의 율법학자 같은 사람들에 의해 해를 입지 않고 파괴되지 않은 종교는 없습니다. 그들은 교구의 대부분 신자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다투고 싸웁니다. 자기네들이 복음서로부터 성령을 받아 성령으로 다른 사람들을 감화시킬 생각은 하지 않고, 복음서가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진리밖에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에 바쁩니다.
그러나 그런 증명은 그들의 불신을 숨기려는 궁여지책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원로 평신도들은 평생 좋은 신부 한 분 만나기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모두 성직자들로부터 세뇌당하여 진리의 길을 가지 못하고 자기 종교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는 것은 옳은 성직자를 만나지 못한 증거입니다. 무려 1500년 이상 성경을 갖지 못하게 하고, 글도 읽지 못하는 평신도를 대상으로 목자들이 복음서 해석 위주로 강론을 하고, 까막눈이었던 평신도들을 위하여 그리스도나 성모의 호칭기도나 주님의 기도 또는 성모송을 만들어 바치도록 했지만, 이제는 달라져야 합니다.

릴케는 코린토1서(13,1)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는 말씀을 묵상하며 '징 소리(1)'라는 시에서 성령을 받지 못해 사랑이 없는 성직자들의 강론을 ‘징 소리’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방문한 코린토 지방에는 이방인들의 사원이 많았고 이방인들의 성직자들은 신자들에게 약이나 포도주를 먹여 광란의 춤을 추게 하였고 징이나 꽹과리를 세차게 그리고 빠르게 때려 황홀경에 빠져들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전쟁에 나가는 병사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하여 징이나 꽹과리를 울렸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코린토인들을 보았을 때에는 미신에 빠져 있을 뿐 사랑이 없었으므로 주님을 믿고 사랑을 갖도록 독려하기 위하여 징과 꽹과리를 인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릴케는 지금도 사제들이 진리를 말하고 있지만 듣는 사람들이 징 소리나 꽹과리 소리로 들을 수 있으며, 평신도들이 하는 말들도 소음으로 들릴 수 있으며, 사제들이 알아들을 수도 없는 말을 하여 평신도들이 실망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성령을 받지 못해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징 소리(Gong) 1

 

징 소리, 그대는 더 이상 들을 가치도 없는 소음으로 들리지만,

우리가 들으라는 양 귓속 깊이까지 울려 대며,

온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고 있다.

그러나 가장 깊은 내면을 드러내고

성전이 생기기 전의 사원들을 말하고

신들의 어려운 말들을 풀이하는 듯하다.

 

징 소리, 그대는 사위(四圍)가 침묵 속에 있지만

홀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있다.

오랫동안 참고 있던 말을 쏟아 내며

지나간 별들을 쏟아 내고 있는 듯하구나.

 

징 소리, 사람들이 결코 잊지 못하는 그대는,

스스로 태어나 사라져 버려

더 이상 광란의 축제를 이해하지 못하고

보이지 않는 입으로 마신 포도주를 이해하지 못하고

버티고 선 기둥 속의 폭풍을 이해하지 못하고,

나그네가 길을 가다가 넘어지고 있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가 모든 것을 거스르고 있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구나!

(김용대 역)
 

김용대(후고)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박사.
본명은 후고입니다만 호도 후고(後考)입니다. 항상 뒷북을 친다는 뜻입니다.
20년 동안 새벽에 일어나서 묵상을 하고 글을 써 왔습니다.
컴퓨터 전공 서적을 여러 권, 묵상집 "그대 음성에 내 마음 열리고", "징검다리"를 쓰고, 요한 타울러 신부의 강론집을 번역하여 "영원한 생명을 주는 진리의 길"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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